164. 탈출로 확보
도시로 들어가자 붉은 점이 빼곡하게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화재로 인한 연기로 도시가 가득 차지 않았다면 천 명도 안 되는 기마병 따위는 신호를 받고 몰려온 공작군에 의해 금방 눌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붉은 점이 많은 곳을 피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바로 뒤에 따라 붙은 기수는 혹시나 연기 속에서 나를 놓칠까 봐 필사적으로 따라 붙었다.
구백 명에 달하는 기마병이 그 깃발에 의지해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기 속을 달리며 기시감을 느꼈다.
이제는 심드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구에서의 삶 중에서 가끔 공항으로 비행기를 타러 가던 일이 기억났다.
섬에 있는 공항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널 때면 간혹 경고음이 울리곤 했다.
안개가 낄 때마다 하늘에서 폭탄이라도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끊임없이 버저소리가 반복되었고, 기계적인 목소리의 경고음은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럴 만도 했다.
도대체가 앞이 보이지 않아서 뭐가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지금 내가 연기를 헤치고 달려가는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방 수십 미터는 눈에 보이지만 그 이상은 연기에 가려져서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미니맵을 의존해서 달릴 뿐이었다.
“창고는 어느 쪽이었나?”
“도시의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중앙대로를 따라 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원체 창고 규모가 거대해서 가까이 가면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중앙대로.
헤필드를 관통하는 아주 넓은 길이다.
여기를 달리면 정말 좋겠지만, 넓은 길은 이미 공작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길을 뚫고 달린다는 것은 정말 무리였다.
아무리 연기로 인해 우리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서로 연락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 되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숫자가 너무 많다.
우리 기병들 역시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칫 돈좌되어서 숫자에 잡아먹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나는 미니맵을 노려보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도시의 전체적인 구조가 내 앞에 펼쳐졌다.
헤필드는 반쯤은 계획도시로 건설된 모양이었다.
되는대로 건물이 들어선 곳도 있지만 일부는 현대의 도시처럼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십자모양으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넓은 길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축을 가로지르는 대로보다는 못하지만 중간중간 제법 넓은 간선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찍었다.
십자모양의 대로를 피해 바로 도시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뒷길이었다.
잘만 하면 큰 충돌없이 도시의 중심부까지 진출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뒤를 따르는 기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족 기사, 일반 기사, 기마병, 기마용병까지 되는대로 끌어모아서 잡탕이지만 지금까지 정말 잘해 준 자들이다.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어이없게 잃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래서 조급하게 굴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나는 미니맵이 있어서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지만 내 뒤를 따르는 부하들은 깃발 하나 바라보면서 오는 중이다.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는 기병들은 앞선 동료를 따라 달린다.
자칫 한 눈이라도 팔면 바로 낙오되고 만다.
게다가 이런 적지에서는 낙오병을 따로 챙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숫자라도 많으면 모를까 몇십 명 정도 낙오하는 경우는 나도 무시하고 달릴 수밖에 없다.
십자모양의 대로를 떠나서 건물 사이의 뒷길로 접어들자 공작군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들 역시 연기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목표없이 움직이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분명히 무턱대고 헤필드로 병사들을 밀어넣은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연신 철창을 휘둘렀다.
연기 속에서 헤매던 공작군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적군을 찾아서 연기 속에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기사가 연기 속에서 튀어나와서 창을 휘두르고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미처 어떻게 대응하지도 못하고 어어 하다가 몇 명 죽고 말았는데, 문제는 그런 기사가 하나가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온다는 것이다.
나와 내 기병들은 마주치는 공작군을 짓밟으며 도시의 중심으로 향했다.
드디어 내 앞에 공작군의 뒤통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창고 구역에서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는 자들이었다.
나는 공작군을 발견하자마자 속도를 올리면 고함을 질렀다.
내 고함에 맞추어 나를 따르는 기병들 역시 고함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공작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적군이 등 뒤에서 나타나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자 포위망의 일각을 형성하고 있던 공작군은 그대로 와해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병이 뛰어봐야 얼마나 빠르게 뛰겠는가.
천인대 하나는 넘어 보이던 공작군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죽어갔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명색이 정예 병력으로만 꾸렸다고 하는 지슬리 토벌군이었는데 아무리 등 뒤로 기습공격을 당했다고해도 이처럼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은 그들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칼을 뽑아들고 도망병을 베며 필사적으로 대열을 유지하려는 하사관들과 어떻게든 기병의 돌격을 막아보겠다고 다급하게 튀어나오는 기사들의 저항은 아무리 우리가 일방적인 우세를 가지고 돌격 중이라고 해도 쉽게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인족.
분명히 거인족도 왔을텐데 왜 안보이나 했는데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공작군의 병사들을 짓밟으며 달리는데 갑자기 두 명의 거인족이 연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하나는 바로 내 앞으로, 다른 하나는 조금 떨어진 옆에서 기마병의 돌격을 저지하려 들었다.
좌우로 휘두르며 공작군의 목을 치던 내 철창의 창끝이 거인족을 향했다.
내 앞의 거인족은 창으로 한번쯤 찔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에 끼고 있는 건틀릿으로 창을 막아가면서 나를 잡으려고 들었다.
강철로 만든 건틀릿은 잘 사용하면 방패 못지 않은 방어력을 가진다.
게다가 방어구라는 본래의 기능과 달리 둔기를 방불케하는 충격력으로 꽤나 쓸만한 무기로도 쓸 수 있다.
내 앞의 거인족은 자신이 끼고 있는 건틀릿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철창은 일반적인 무기가 아니다.
강철로 된 방패로 막아도 구멍을 뚫어버릴 정도다.
그런데 건틀릿 같이 얇은 철판으로 손등을 덮은 방어구로 내 철창을 막겠다니!
그런 시도는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저 거인족은 그런 사정을 모르겠지만.
과연 예상대로 거인족은 창끝을 노려서 건틀릿으로 막으며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미묘한 순간 창끝을 힘껏 들이밀며 건틀릿의 손등을 꿰뚫으려고 했다.
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내 창끝은 거인족의 건틀릿과 손등을 동시에 꿰뚫어 버렸다.
그리고 그 창끝은 그대로 거인족의 가슴까지 찔렀다.
나와 전투마의 몸무게와 속도, 그리고 내 힘은 거인족의 예상을 한참 넘는 충격력을 그에게 가했다.
거인족은 철창에 찔린 채 뒤로 쭉 밀려났다.
그리고 그가 버틸려고 하는만큼 철창이 그의 가슴으로 더 파고 들었다.
결국 거인족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충격과 고통으로 정신이 잠깐 나가버렸던 거인족은 자신이 쓰러졌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장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말 위에서 창을 겨눈 채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다시 한번 거인족의 가슴에 창이 꽂혔다.
일어나려던 거인족은 다시 땅으로 쓰러졌고, 그의 가슴을 꿰뚫은 창으로 바닥에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내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뒤늦게 달려들어서 아직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거인족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도끼로 후려치고 칼로 찌르는 호위기사들을 일별하고 다른 거인족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마병과 격돌한 거인족이 전투마의 머리를 건틀릿을 낀 손으로 후려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투마의 머리가 확 돌아가면서 피가 튀었다.
그리고 거인족은 쓰러지려는 말과 기마병을 한꺼번에 끌어안더니 들어서 집어던져 버렸다.
운이 없었던 기마병은 말에 깔린 채 비명을 질렀고, 거인족은 후속하는 기마병을 향해서도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특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나와 달리 일반적인 강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기병들은 건틀릿을 낀 거인의 주먹을 당해내지 못하고 연달아 쓰러지기 시작했다.
한 방으로 전투마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가까이 접근한 전투마를 잡아서 던져버리기까지 하니 일반적인 병사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기사들이 거인족을 견제하는 사이 기마용병 중 쇠뇌를 휴대하고 온 자들이 연달아 쇠뇌살을 쏘아서 거인족을 잡아내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기병이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래도 기병들이 그동안 탈출로를 막고 있던 천인대 하나를 갈아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아무리 정예병이라고 해도 적에게 앞뒤로 끼어서는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공작군의 천인대와 대치하고 있던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이했다.
하나같이 피곤과 그을음에 절어 있는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탈출로가 열려서인지 얼굴색이 확 살아나는 것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창고 구역에 들어서니 연기가 정말 엄청났다.
아무리 도시가 불에 타고 있다고 해도 짙은 안개를 방불케 하는 연기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창고 구역에 들어오니 단숨에 이해가 되었다.
도시의 거의 10%는 차지하고 있는 창고 구역에서 솟아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그리고 창고 구역 역시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창고가 모여있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창고가 연달아 늘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가의 저력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출이 우선이었다.
“아돈슨 경은 어디에 있나?”
“창고를 태워야 한다고 천인대 하나와 함께 직접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아돈슨의 생각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보급품은 중요하니까.
적의 보급품을 없애는 것은 최우선이기는 하다.
그래도 그런 것은 밑에 사람에게 맡기고 병사들의 후퇴를 지휘해야지.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숫자가 몇인데.
“나와 함께 선행했던 기병대는 후퇴하는 병사들을 엄호하며 선도하라. 후행했던 기병대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움직인다.”
나는 다른 쪽에서 공작군과 대치하고 있는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절반의 기마부대를 끌고 다시 움직였다.
*
어느새 탈출로가 뚫렸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알아서 후퇴해오는 병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윌리엄이 남긴 기병이 그들을 인도해서 탈출로로 안내했다.
그들은 운이 좋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탈출로의 반대편에서 공작군과 대치하고 있던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은 별로 운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