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63화 (163/248)

163. 헤필드 외곽에서

“깃발을 따르라! 서두르지 마!”

“앞에 있는 적들은 무시해라! 몇 명 되지도 않잖아!”

“깃발보다 앞서 달리자 마!”

이미 몇 차례 나와 함께 전투에 참가해 봤던 자들은 절대로 튀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을 자신한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진형에서 이탈했다가는 생명을 보장받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깃발을 보라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나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기에 달하는 기마병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역시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서 정찰인지 약탈인지 모를 행동을 하고 있던 공작군의 기마병은 분명히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종류의 인간형일 것이다.

그러나 만용을 부릴 정도로 정신이 나간 자들은 아니었다.

수백 기에 달하는 기마병이 몰려오는 모습을 본 공작군의 기병들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도망치는 뒤태가 무척 유혹적이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면서 활을 쏘면 한둘 정도는 말에서 떨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적기병을 쫓아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구태여 추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말을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말은 그렇게 지구력이 강한 동물이 아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자들을 쫓는답시고 벌써부터 속도를 높여서 달리다가는 말이 퍼져 버린다.

나중에 적하고 싸워야 할 때 지친 말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 말의 체력을 관리해 줘야 한다.

헤필드를 향해 가는 동안 계속 도망병과 마주쳤다.

대부분 용병이었다.

기사나 귀족은 만나지 못했다.

헤필드에 가까이 접근하자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후퇴하는 집단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도망이 아니라 후퇴다.

여기부터는 기사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자치령의 깃발을 내걸고 달려오는 기마병을 보자 어서 지나가라고 황급하게 길에서 비켜주기까지 했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 합류해서 명령에 따라라!”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자, 축 늘어진 채 걷기만 하던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기세가 살아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전투를 겪고 후퇴하는 자들의 체력은 뻔하다.

그들의 전투의지와 달리 실제로는 한 번 더 싸우는 것도 버거워할 것이다.

결국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내가 데리고 온 기병대뿐이다.

나는 미니맵을 반투명으로 시야 한쪽에 띄운 채 계속 달렸다.

지금까지 미니맵에 표시된 적군은 돌출행동을 한 기마병 몇 명이 다였다.

아직까지는 후퇴하는 아군을 재편성할 여유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럴 여유가 없을 듯싶었다.

후퇴하는 아군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을 때 미니맵의 상단에 붉은 점이 수두룩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찰을 겸해서 선행해서 달리던 기병이 숲의 가장자리를 우회해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보였다.

“전투 중입니다! 후퇴하는 아군을 적이 가로막았습니다.”

“추격이 아니라 가로막았다고?”

“예. 적어도 3백 명은 되어 보이는 적병이 길을 막고 활을 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미니맵을 곁눈질하며 달리는 말 위에서 철창을 조립했다.

그런데 저기에 있는 공작군의 지휘관은 죽으려고 작정을 한 미친놈인가?

아니면 공적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병신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는 병사들의 무리를 가로막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다.

살기위해 날뛰는 집단은 간혹 믿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병사들에게 포위망의 한쪽을 일부러 터 주곤 하는데,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구원군의 첫 번째 전투는 정해졌다.

생각보다 시작은 수월할 모양이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지금까지 빠르게 걷던 말들의 속력을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말들도 곧 전투가 있을 것을 아는지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툭 튀어나와 있던 숲의 가장자리를 돌자마자 전투 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을 틀어막고 있는 자들은 평범한 보병집단이었다.

칼과 창을 가지고 있고, 방패수를 앞에 내세운 전형적인 구성의 방진이었다.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면 활을 들고 있는 병사가 제법 된다는 정도?

오십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그냥 짓밟아도 별 손해가 없겠다.

나는 오백 기의 기마병과 함께 적을 향해 점점 속도를 올렸다.

후속하는 오백 기의 기마병도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의 진동에 뒤늦게 우리의 접근을 눈치챈 적군은 다급하게 진형을 바꾸느라고 난리였다.

활을 쏘던 사수들 역시 기병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다.

우리가 적진을 향해 들이칠 때까지 한두발을 쏘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별 피해를 주지도 못했다.

선두에서도 몇 걸음 더 튀어나와서 돌격하고 있던 나에게도 화살이 하나 날아왔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화살은 갑옷에 맞고 튕겨나갔을 뿐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쇠뇌로 직격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제대로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서 기사를 어떻게 화살로 떨어뜨리겠나.

운이 좋아서 얼굴이라도 맞추면 모를까.

나는 가장 먼저 공작군의 진형에 뛰어들었다.

그래도 아주 맹탕은 아닌 모양인지 기병을 막는 법에 따라 일선의 병사들 중 일부가 창을 바닥에 대고 내밀었지만 별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조직적으로 빽빽하게 내민 장창이 아니라면 그냥 창끝을 피해서 짓밟으면 그만이다.

내 영리한 전투마는 알아서 창끝을 피해서 적들 사이를 달렸다.

나는 그 위해서 철창에 달린 언월도로 적의 목을 치고 나갔다.

무기와 갑옷과 목이 함께 잘려나갔다.

두부를 칼로 자르는 느낌이었다.

말을 달리면서 철창을 8자로 휘두르며 좌우의 적을 토막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정면의 적은 말이 짓밟아 버렸다.

내 뒤로 순식간에 피와 시체토막이 깔린 통로가 생겨났다.

나와 함께 삼백 명의 공작군에게 달려든 기병이 오백 기다.

그리고 다시 오백 기가 후행한다.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면 저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뒤에서 기습해오는 기마병에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삼백여 명의 적병은 앗 하는 사이에 쓸려나갔다.

그냥 전투마가 재주껏 짓밟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죽어나갔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기사와 기마병들이 알아서 처리했다.

예외가 있다면 공작군의 선두.

우리 쪽에서 보면 가장 마지막에 늘어서 있던 자들 중 몇 명이었다.

갑옷이라고 해야 흉갑을 입은 정도.

머리에 투구도 쓰지 않은 기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심지어 그는 들고 있던 무기도 버렸다.

어? 설마 수인족?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변했다.

몸에서 털이 수부룩하게 돋아나고 덩치도 조금 더 커졌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단검같은 손톱이 그의 손에서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뛸 수 없을 정도의 높이로 뛰면서 말 위의 내게 달려들었다.

빠르긴 하지만 병신 같은 공격이었다.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공중에서 어떻게 움직이려고?

이러면 훈련된 기사에게는 그냥 공중에 고정된 목표나 다름없다.

나는 공중에 떠 있는 그를 향해 철창을 빠르게 찔렀다.

푹푹!

두 번이었다.

하나는 흉갑을 뚫었고, 두 번째는 목을 꿰뚫었다.

수인족 기사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달려온 몇 명의 수인족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운명을 맞이했다.

기마대열의 뒤쪽에 있는 일반 기병에게 공격했으면 모를까 기사들로 채운 앞열에 들이박은 순간 그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내 옆의 기사들은 마스터 요한이 특별히 내게 붙여준 기사들이었다.

마스터 요한의 훈련을 받은 그들은 일반적인 기사와는 궤를 달리한다.

평범한 기사보다 빠르고 강한 그들은 신비와 접한 기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삼백 명의 보병 방진, 그것도 수인족 기사가 포함된 적군을 전멸시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진짜 순식간이었다.

천여 기의 기병이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전진함에 따라 미니맵에는 본격적으로 붉은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퇴하는 우리 편도 표시되어서 어디를 먼저 가야 할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기마부대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미 다 끝난 전투라고 생각하고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헤필드 밖으로 나왔던 공작군은 예상외의 기마전력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혔다.

공작군은 흩어져 도망치는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을 쫓기위해 병력을 나누었는데 이게 결정적인 실책이 되어 버렸다.

불과 수백 명 단위로 흩어져서 추격을 하다가 일천 기에 달하는 기마부대와 조우했으니 정상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양쪽 다 어이없는 삽질을 반복하는 정상적인 군대끼리의 전투였다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피해를 입으며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에 누가 얼마나 있는지 양쪽 모두 모르니 피해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게 미니맵이라는 사기적인 수단이 있는 이상 공작군에게 닥친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미니맵을 보면서 이동경로를 설정하고 흩어져 있는 공작군의 소집단을 차근차근 짓밟았다.

처음 조우했던 자들처럼 전멸시킬 필요도 없었다.

한두차례 부딪쳐보니 그냥 짓밟고 지나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대충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적게는 백 명, 많게는 삼백 명 정도되는 공작군의 소집단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만약 공중에서 헤필드 외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본다면 정말 청소라도 하는 것처럼 깔끔하게 공작군을 쓸어버린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결국 한시간 가까이 날뛰자 헤필드 밖으로 나왔던 공작군 중 남아있는 집단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도망쳐 나온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이 모여들어서 천인대 다섯 개를 구성할 정도가 되었다.

끔찍한 피해였다.

25%의 피해를 입어도 전멸에 가깝다고 판정을 하는데 반대로 남은 병력이 25%라니!

그것도 대부분 병사들로 기사나 귀족은 얼마 보이지도 않았다.

이러면 너무 피해가 크다.

아무리 글렌 파벌을 견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피해가 크면 아르보그 공작의 그림자가 너무 커진다.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때였다.

“윌리엄 백작 각하!”

낯익은 귀족이었다.

아돈슨의 일가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자가 미친 것처럼 내게 달려왔다.

“살려주십시오! 아돈슨 경을 구원해주십시오!”

“아돈슨 경이 아직 헤필드 안에 있나?”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에 고립되어 계십니다. 그곳에 남은 병력도 다 있습니다.”

“병력이 아직 남아 있다고?”

“창고를 완전히 태워야 한다고 후퇴할 때 그쪽을 거쳐서 오다가 길이 막혔습니다. 7천? 8천? 그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럼 그렇지!

그래야 맞지!

아돈슨 경이 멍청한 사람이 아닌데 이런 피해는 말이 안 되지!

나는 이제 곧 내가 뛰어들어야 할 헤필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금 헤필드는 화재로 인해 연기로 가득 차서 스모그와 안개에 갇힌 도시처럼 보였다.

가까운 거리라면 모를까 전체를 조망하고 지휘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내게는 이런 상황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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