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도망병은 병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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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필드는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3개의 도시 중의 하나였다.
특히 파벌에 속한 주변의 귀족에게서 걷은 세금을 공작령의 중심도시로 옮기는 중간 정거장 역할을 했다.
외곽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도시에까지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아르보그 공작이 지배하는 영역의 1/4 정도는 통제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돈슨 역시 헤필드가 가지는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윌리엄보다 더 잘 이해할지도 몰랐다.
“헤필드! 헤필드! 여기를 점령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지만 아돈슨 경. 윌리엄 백작은 더 이상 진군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전령에 의하면 그는 이미 진군을 멈추고 대규모로 목책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아예 나무로 성을 짓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아돈슨은 핏발이 선 눈으로 막사 안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는 아니지만 자신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윌리엄 백작의 의견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해는 한다.
명성이 높은 자니까.
실제로 전투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기사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용맹한 기사 그 자체였다.
언제나 가장 앞에 서서 가장 먼저 적을 상대하고 일방적으로 이겨왔다.
반면에 자신은 언제나 뒤에서 말로 명령하는 지휘관이었다.
자신도 이번 전쟁에서 계속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이용해서 일방적으로 적군을 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돈슨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어도 비슷한 전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자신도 알고 저들도 아는 일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과 함께 있는 이 귀족들은 자신을 지휘관으로 인정하고는 있지만, 믿고 존중하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자신은 같은 파벌에 속했던 능력있는 행정관이지 사령관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돈슨은 강력하게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헤필드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승리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2인자로 격하될 것이다.
어쩌면 3인자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헤필드가 세금이 모이는 중간 거점이라는 것은 다들 알 겁니다. 그리고 아르보그 공작령에 있던 비축 식량은 지슬리 공작령으로 원정을 간답시고 다 긁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헤필드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돈슨의 말에 동의하는 귀족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적군이 보이지도 않는데 과도하게 몸을 사리는 것은 겁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헤필드 공격에 대한 명분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 아돈슨의 의견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아돈슨 경의 말대로 헤필드를 공격하는데 찬성합니다. 보급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 겁니다. 윌리엄 경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몇 번이고 강조했으니까. 분명히 헤필드에는 막대한 식량이 쌓여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혹시 우리가 후퇴하게 되더라도 순조롭게 후퇴하려면 아르보그 공작군을 굶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저 막대한 식량을 적에게 그냥 넘겨주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 보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 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마지막 의문을 제기했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대답 역시 간단하게 돌아왔다.
“그러면 더 서둘러야지.”
헤필드에는 따로 외성벽이 없었다.
일부러 성벽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애초에 수비를 생각하지 않고 건설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대신 식량창고는 따로 만든 거대한 창고와 그 창고를 둘러싼 벽돌담에 의해 엄중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엄중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시의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엄중함이었다.
도적떼를 막고, 불만을 가진 귀족의 항의를 막는 정도?
이미 몇 차례 실전을 거친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과 하루의 전투로 헤필드는 아돈슨의 손에 들어갔다.
헤필드를 지키던 천여 명의 영지군은 좀 버티다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자 도시에 불을 지르고 물러났다.
덕분에 아돈슨이 헤필드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불을 끄는 일부터 해야 했다.
쓸만한 방어 거점 하나 없던 헤필드는 화재로 인해 정말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불에서 보호받는 곳은 거대한 창고뿐이었다.
몇 군데 불에 타기는 했지만 가장 먼저 창고부터 달려간 아돈슨에 의해 간신히 불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엄청나군.”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산이라고 하기에는 작으니까 그냥 뒷동산이라고 할까? 그것도 이상하나?”
창고를 처음 본 귀족들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기에 바빴다.
대부분 이런 거대한 규모의 창고는 아예 본 적도 없었다.
그 안에 쌓여 있는 막대한 식량은 아예 상상 밖이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것이었다.
“맙소사. 이런 것을 포기하고 후퇴하자고 했다니! 내가 멍청한 놈이었구나.”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는 귀족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 거대한 창고와 막대한 식량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아돈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식량을 바탕으로 아예 눌러앉는 것은 어떨까 하는 유혹까지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막대한 식량이라면 병사를 모병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귀족연합자치령의 지원까지 등에 엎는다면 새로운 백작의 탄생도 무리가 아니었다.
칼마르의 리네아 백작이 윌리엄을 얻은 것처럼 전투에 앞장서 줄 쓸만한 기사만 구할 수 있다면 자신도 가능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행복한 날은 불과 하루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헤필드로 거대한 군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십 배에 달하는 병력으로 일방적으로 적을 두드려 패던 아돈슨의 군대는 자신들의 두 배에 달하는 적을 마주한 후에야 진짜 전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리 불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을 밀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본 아돈슨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패배를 직감했다.
처음에 세웠던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명령을 내려도 전령이 출발한 후면 상황이 바뀌어서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무리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불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다들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했다.
마치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아돈슨이 무엇보다 당황한 것은 양쪽 합쳐서 6만에 달하는 병력이 충돌하자, 전투 현장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싸우는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러면 전략이고 전술이고 다 집어치우고 순수하게 힘으로 맞붙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돈슨이 아무리 전투에 대해 잘 모르는 행정관 출신이라고 해도 두 배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가서 힘 대 힘으로 숫자 대 숫자로 싸우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돈슨은 패배를 직감하자마자 예비대로 빼두었던 천인대의 일부를 창고로 보내서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다.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그가 한 가장 올바른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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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헤필드에서 벌어진 전투는 분명히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무전기가 없는 시대의 전투가 계획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지휘관이 이순신 장군급이 되든가
아니면 아주아주 운이 좋아야 한다.
둘 다 있을 수 없는 쪽에 한없이 가깝다.
대개의 경우는 삽질을 덜 한 쪽이 이긴다.
아니면 삽질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압도할 정도로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긴다.
그래서 내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다.
4만에 달하는 적을 상대로 불과 1,300여기에 불과한 기병을 끌고 온 내게도 말이다.
나도 병신, 너도 병신이니 아르보그 공작군도 병신이다.
그들이 지금 무슨 맵핵을 켜놓고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어디에 병력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게는 미니맵이 있다.
나는 이제 병신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역으로 한 번은 찔러도 되지 않을까?
“테디슨 남작! 노렌 경. 경들은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해서 진형을 짜고 적을 막도록 한다.”
내 명령에 노렌은 자신이 이끌고 온 기마용병을 즉시 하마시켰다.
테디슨 남작 역시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후퇴하는 병사들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노렌은 거칠게 병사들을 다루며 고함을 질렀다.
“깃발을 세워라!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라! 멀리서도 우리를 보고 집결할 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
후퇴하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서 그들만으로 벌써 수십 명이 되었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었는지 노렌은 병사들로 하여금 진형을 갖추고 헤필드를 향해 천천히 전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물론 명령에 불복종하고 계속 도망치려던 자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은 테디슨 남작의 기사들이 쫓아가서 목을 베었다.
독전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의 태도가 한결 순종적이 되었다.
나는 집결해오는 기병들에게 확신을 섞어서 강조했다.
“우리가 이긴다. 전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없이 전리품이나 챙기러 오는 놈들이니까 그냥 짓밟아주면 돼.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나를 따라라!”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기사와 기마병이 섞인 병력을 오백 명씩 둘로 나누었다.
기마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는 모두 테디슨 남작에게 맡겼다.
대충 임무를 나눈 후 헤필드를 향해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오던 연합자치령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기병을 보고 처음에는 아르보그 공작군인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게 깃발을 확인한 후에는 안심을 하고 심지어 주저앉기까지 했다.
“지원군이 오고 있다. 대기하라.”
“도망치는 자는 군법에 의해 참한다!”
기병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만날 때마다 똑같은 경고문을 외쳤다.
위협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원군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상을 입고 지친 채 도망치던 패잔병들은 도망병에서 다시 병사로 돌아왔다.
한참을 달리자 살짝 지대가 높은 낮은 언덕이 나왔다.
그곳을 올라가서 보니 헤필드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후퇴하는 우리 병사들과 추적하는 적기병들.
아직까지는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진짜 많은 숫자는 헤필드 가까이에 있겠지.
생각보다 멀리까지 나온 적기병은 전리품을 수집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말에는 갑옷과 무기가 실려 있었고, 몇 명은 고급스러운 천을 둘둘 말아서 말뒤에 실어 놓기도 했다.
운이 없는 귀족의 유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운이 없기는 그들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언덕길 위의 나를 발견한 적기병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보았다.
놀라움 그리고 공포를 눈동자에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