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56화 (156/248)

156. 아르보그 공작령을 향해

*

올브욜프 백작의 죽음 이후에 귀족연합자치령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했던 자들이 다 해 먹는다는 불평이 심해지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깃발을 들고 앞장서지 않는 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백작급의 고위 귀족들 역시 독립의 깃발을 들고 나서기보다는 자신들끼리 힘을 합쳐서 연합자치령 내에서 발언권을 확대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뒤늦게 합류한 고위 귀족 중에는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며 연합자치령의 수뇌부에 끼어들려는 시도를 하는 자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연합자치령에는 과거 파벌의 수장이었던 공작이 없다.

심지어 지도자급의 귀족들 중에는 백작은커녕 남작에 지나지 않는 자도 있다.

군사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나 역시 따지고들면 급조된 귀족이고 반편이 백작일 뿐이다.

귀족 사회처럼 고인물이 행세하는 집단에서 이런 구성은 정말 말이 안 된다.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날 귀족이 한둘이 아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제국이 붕괴하고 공작들조차 각자도생하는 세상이 되어버리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황에 쫓겨서 급하게 결성되었던 귀족연합자치령이 이제 제국 동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책을 덮으면서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했으면 완벽한 해피앤딩이다.

그러나 현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자들이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게 내버려 두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내부를 정리하고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틀 안에 동부의 귀족들을 묶는 데 성공하자마자,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차리리 얻어맞기 전에 선빵을 치자는 주장이었다.

그런 의견은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일수록 더 강했다.

“이 인간들이 전쟁이 장난인 줄 아나. 왜 이리 호전적인지······”

나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거야 윌리엄 백작께서 전투를 너무 쉽게 하시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연합자치령으로 묶인 이후로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전투를 할 때마다 전리품과 공적이 생기는데 피해가 좀 생긴다고 한들 전투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정신이 없는 자라도 전쟁을 장난으로 생각하는 귀족은 없습니다. 그래도 간혹 사업으로 생각하는 자는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진 것 없는 기사들은 전투를 하지 못해서 안달을 낼 정도더군요. 지난 전투에서 한몫 단단히 벌었거든요.”

베르그렌과 아돈슨은 내 한숨에 반박을 하듯 연달아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나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족이고 기사고 할 것 없이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베르그렌과 아돈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치 용병처럼 벌어들일 수익을 계산하며 전쟁을 기대하다니!

이러면 전쟁이 전쟁을 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패할 때까지 계속 폭주하는 것이다.

경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막시밀리안 파벌을 상대로 한 소소한 전투를 치렀을 뿐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전투를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경험한 전투라는 것은 사실 제대로 된 전투가 아닙니다. 우월한 병력을 바탕으로 힘으로 찍어 누른 것에 불과합니다. 막시밀리안 파벌에서 우리에게 저항했던 귀족들은 따로따로 흩어진 채 각개격파를 당한 것이지요. 그나마도 스스로 무너져 내린 자들이 대부분이에요. 우리는 먼저 이런 자들을 제대로 다독여야 합니다. 뒤가 안전해야 전쟁도 쉬워지니까요. 병력과 보급품이 다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내 말에 베르그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돈슨은 납득한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아돈슨은 귀족들과 만나면서 돌아다니다보니 현실 파악이 빨랐다.

아돈슨은 자신이 느낀 바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중과부적이었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기는 했습니다. 숫자에서 밀리지 않았다면 끝까지 버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무리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수백 년간 하나로 뭉쳐있던 세력이었습니다. 만약 아르보그 공작의 지원군이 파견되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돈슨이 말하는 중간에 베르그렌이 끼어들었다.

그로서는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이 없는 이 상황을 포기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윌리엄 백작께서는 개전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내부 단속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아르보그 공작이 행방불명으로 인해 부재한 지금이야말로 다시 없는 기회가 아닐까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개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 단속이라는 것은 어차피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고 우리끼리 시끄러워지느니 그냥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하나로 뭉치는 것도 좋은 내부 단속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정을 떠나는 일은 그리 간단하게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제대로 준비를 하려면 1년으로도 부족합니다.”

“식량이고 무기고 충분히 쌓아놓았습니다. 기사와 병사들도 전의가 충만합니다. 준비가 부족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베르그렌의 항변이었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발언이다.

아무리 내가 급조된 귀족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상업도시의 백작이다.

과거 영업맨으로 제법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심지어 보급이 망가지면서 세계 2위의 군대가 이류 군대로 전락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런 나로서는 군대가 쓸 물자를 준비하는 것이, 그것도 원정군을 위한 물자를 준비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보급품을 충분히 쌓아놓았다고 자신하는 베르그렌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그는 자신의 할 일을 넘치게 잘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보급품을 쌓아놓은 것까지.

멀리 원정을 나가는 군대의 진짜 문제는 보급품을 전선으로 나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사실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제한되는 부분도 너무 많다.

게다가 보급에는 온갖 사고가 따라온다.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나 태만으로도 후방에는 식량이 가득 쌓여 있는데 전방에서는 하루 한끼를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 편에게 갈 보급품을 적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물자를 나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만약 준비가 부족해서 지형파악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진다.

전투에서는 이기고도 보급품을 날려먹어서 전쟁에서는 패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지금 당장 아르보그 공작을 향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고백을 들은 베르그렌은 매우 실망한 태도를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르보그 공작의 부재로 인한 혼란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아르보그 공작령 한복판에서 스스로 붕괴하는 꼴을 보고 싶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병사들은 며칠만 굶어도 먹을 것을 찾아 흩어질 테니까요. 그 이후에는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 시작되겠지요.”

그러나 내 강력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르보그 공작령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세가 되어갔다.

연합자치령에서의 입지를 높이고 싶었던 귀족들로부터 또 한번 한탕을 하고 싶어하는 용병까지 이유는 다양했지만 원하는 바는 하나였다.

지금 당장 아르보그 공작령을 공격하자!

그리고 약탈하자!

나는 현재 귀족연합자치령의 군사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몇 차례의 성공적인 전투를 치른 후인 지금 누구도 내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연합자치령의 군사지도자일 뿐 군주가 아니다.

연합자치령의 구성원을 설득할 수는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반년 만에 4만 명의 군대를 접경지대에 집결시키는 무리수를 두고 만 것이다.

“이야. 장관이군요. 2만이나 되는 군대라니. 저는 이런 숫자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여기 있는 병력이 다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2만이 넘는 숫자가 움직인다고 하니 다 합치면 4만 아닙니까? 이 정도라면 설사 아르보그 공작이 살아 있다고 해도 단숨에 밀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귀족연합자치령이 이렇게 거대한 세력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대단합니다.”

지휘부의 막사에 모여 있는 귀족들은 내 눈치를 보며 들어달라는 듯 소리를 높여 대화를 했다.

대화 내용이 어색할 정도로 칭송 일색인 것은 연합자치령의 실세인 내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 길지도 않는 분쟁 중간에 공작들이 다 죽어버리고 그들의 가문조차 간신히 이름을 보존하는 정도로 맹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때, 새로운 실력자에게 잘보이는 것은 귀족들의 본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아부섞인 감탄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출발시킨 기마 정찰대의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르보그 공작의 군대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당분간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과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이 맞닿는 곳에 배치된 약간의 경계병이 다였다.

남작성까지는 가야 제대로 된 영지병을 구경할 모양이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나는 아르보그 공작군이 강했으면 했다.

아주 강해서 첫 전투에서 우리를 패배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르보그 공작령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가 패배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이다.

나는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보급에 무지한 자가 나 대신 군대를 지휘하다가 날려먹는 일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고, 패배하더라도 적은 피해로 물러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전쟁을 설계했다.

영지 하나하나를 점령하며 천천히 진군하는 것을 기본 계획으로 잡고, 보급로의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물론,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만약 적이 생각보다 약하다면 소수의 별동대로 공작령을 휩쓰는 것도 상정해 두었다.

심지어 아르보그 공작군이 대규모 회전을 걸어오는 것도 계획에 넣고 돌출 행동은 절대 안된다고 강조해 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폐기되는 것이 작전계획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서 잡생각을 떨쳐버린 후 기마정찰대의 기사를 맞이했다.

기마정찰대의 기사는 말 위에서 그대로 군례를 한 후 자신이 본 것을 보고해왔다.

“백작 각하! 남작성 주변을 하루 거리까지 수색했지만 적정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매복은 없다는 말이겠군. 좋아. 노렌. 공성전을 준비하라고 하게.”

“예. 알겠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내일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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