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배후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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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욜프 백작의 죽음으로 전면적인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올브욜프 백작의 장남은 백작이 죽자마자 전령을 파견해서 즉각적인 협상을 요청했고, 나는 일단 투석기의 공격을 멈추도록 명령을 내렸다.
투석기의 공격이 멈춘 지 얼마 안 되어 백작의 장남은 몇 명의 측근들과 함께 직접 성에서 나와서 귀족연합자치령에 투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잠시의 지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거절할 틈도 없었다.
결국, 연합자치령의 합류를 망설이는 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올브욜프 백작을 토벌하려던 처음의 계획은 폐기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백작은 화재가 난 저택에서 나오려다가 실족해서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단검에 급소를 찔려서 급사했다고 한다.
같이 있던 작은 아들과 손자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상처가 너무 심각해서 별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상한 설명이었다.
투석기의 사거리는 백작의 저택에 미치지 못한다.
백작이 왜 갑자기 단검은 들고 있었는지 설명도 없다.
같이 있던 가족들이 응급처치를 했다는 것을 구태여 언급한다.
음······
대충 어떤 상황이었을지 상상은 간다.
그러나 그게 어때서?
내게는 늙은 고집쟁이가 하나 죽었다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더 윤리적으로 합당해 보인다.
그러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인 설명을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심지어 나를 비롯한 지휘부는 갑작스럽게 상을 당한 올브욜프 가문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며 조문을 하기까지 했다.
직접 성안에서 파악한 백작령 사람들의 얼굴은 비교적 밝은 편이었다.
화재로 인해 짧지만 상당한 피해를 낸 전투를 겪었음에도 우리에 대한 적대감은 심하지 않았다.
다들 전투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이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것이 중요하다.
명분을 세우고 설득하지 않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조차 따르지 않는다.
아무리 올브욜프 백작이 영지의 주인이고 가문의 가주라고 해도 혼자만 납득하는 독선적인 결정은 스스로의 목을 죄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게다가 올브욜프 백작은 영지민 뿐 아니라 가까운 가족의 공감을 얻는 것에도 실패했다.
그의 가족들조차 올브욜프 백작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을 정도니 말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전투가 끝났으니 이곳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얼마 뒤면 새로운 흐레디의 백작이 될 올브욜프의 장남은 내게 인질 겸 지원군으로 그의 아들과 기사 몇 명, 그리고 그들이 지휘할 백인대 하나를 딸려 보냈다.
식량과 무기는 덤이었다.
그리고 내 막하로 들어온 올브욜프 백작의 손자는 바로 그날로 내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래. 비오네슨 경. 사람들까지 물리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다는 말이 뭔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저와 부친 이외에는 제 숙부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숙부는 지금 행방불명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비오네슨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넘길 수는 없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은 신중하게 끝까지 들었다.
마지막에 그의 말은 개인적인 당부로 마무리 되었다.
“부친께서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반드시 백작님께만 직접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작님께도 함부로 말을 옮기는 것은 피하시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고 하시더군요.”
나는 비오네슨의 말을 듣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르보그 공작 가문의 배후에 있는 두려운 존재라고?
영혼까지 죽는?
이런 말을 노인이 진지하게 하다니.
이럴 때면 내가 깨어난 이 세상이 지구가 아니라는 점을 실감한다.
이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중세의 지구의 닮았지만 가끔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뭔가 균형이 안 맞고 뒤틀렸다는 느낌이랄까.
군사적인 부분이 특히 그랬다.
지금 제국이 붕괴하면서 일어난 일은 겉으로 보면 중세 유럽에서 흔히 벌어졌던 국가 간의 이전투구를 연상시킨다.
삼국지에서의 전투나 원말명초의 내전을 규모가 적게 해서 겪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사람이 칼을 들면 한 사람 몫의 병사 노릇을 하고,
열 명이 모이면 열 명의 힘을 발휘한다.
제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해도 열 명, 스무 명의 힘을 당해낼 수 없다.
그게 지구에서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기사가 존재하고 신비가 존재한다.
한 사람이 열 명, 백 명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심지어 내가 만나 본 신비에 접한 자들 중에는 바람을 부르거나 불을 움직이는 자까지 있었다.
이런 존재는 지구에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존재들이 세상의 역사에 끼어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예측이 안된다.
혹시 나는 지구의 법칙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총알 한 방으로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왔던 경험이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그나마 지금까지는 별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앞으로도 과연 그럴까 싶은 의문이 계속 내 머리 속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르보그 공작의 배후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선제후 제도의 성립 배후에 알 수 없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아르보그 공작의 배후에도 누군가가 똬리 틀고 있을 수 있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제국을 쥐고 흔든 존재도 있는데 가문 하나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영혼의 죽음 같은 이상한 소리는 치워두고 연합자치령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다.
나는 그게 궁금했다.
“비오네슨 경은 아르보그 공작의 가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좀 멍청해 보인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르보그 공작이 워낙에 인상적인 분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보니 신기한 일이군요. 귀족 개인보다 가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상식인데.”
내가 보기에도 비오네슨의 의견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아르보그 공작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까지 그의 가문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이 중심인 제국에서 거인족 혼혈로 선제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단순히 그가 능력이 뛰어나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를 지지하고 밀어준 세력이 가문 내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는 다양한 수인족과 거인족이 있었다.
수인족은 라그닐드처럼 충성을 바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단순한 협력 관계로 보였다.
반면 거인족의 충성은 확고한 듯했다.
그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반드시 거인족이 있었던 것을 보면 거의 운명공동체 수준이 아니었을까?
아르보그 공작이 사라진 지금 수인족과 거인족의 입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올브욜프 백작의 말이 맞다면 그들의 입장은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아르보그 공작의 존재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혼란이 발생하거나 수인족이나 거인족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난다면 아르보그 공작가의 배후에 있는 누군가 따위는 늙은이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이전과 동일하다면?
그렇다면 새로운 아르보그 공작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그 주변에 그의 배후가 있을 테니까.
아르보그 공작령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겸사겸사 칼마르에 편지를 보내야 할 모양이다.
*
흔히 거인은 멍청하다는 속설이 있다.
내기에 속아서 인간에게 보물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거인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퍼진 우스갯소리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거인은 어리석은 거인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오히려 그를 아는 자들 사이에서는 현명하다는 평판까지 듣는 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재앙이나 폭력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쾅!
사람 몇 명을 합쳐놓은 것만큼 거대한 바위였다.
전체가 돌로 된 그 거대한 바위가 허공을 날아서 두꺼운 벽을 부수고 한아름이 넘는 기둥을 쓰러뜨렸다.
결국 지지대를 잃은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미쳤나! 작작 좀 하라고! 열이 받은 자는 너 뿐만이 아니야! 그래도 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안 돼!”
그러나 붉은 피부를 가진 거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바위를 하나 더 집어던졌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나온 인간을 향해서였다.
바위가 인간을 짓이기려는 순간 인간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바위는 인간이 있던 자리를 부딪쳤다가 튀어올라서 그나마 남아 있던 벽을 무너뜨렸다.
인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인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력이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되는 빠르기였다.
심지어 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다채롭게 움직였다.
가끔은 순간이동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간을 뛰어넘었다.
거인이 휘두르는 손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공격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인간의 손과 발이 연달아 거인을 때렸다.
그 때마다 찰진 소리와 함께 거인의 붉은 피부가 더욱 붉게 변했다.
그러나 거인은 아프지도 않은지 멈칫하는 것도 없이 두 손으로 인간을 향해 휘둘렀다.
인간의 움직임보다는 느린 속도였지만, 무시할 만한 속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파괴력이 엄청났다.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거인 주변에 있던 나무가 꺾이고 깨어진 바위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인간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잽싸게 공격을 피하며 계속 거인을 때렸다.
결국 거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돌멩이를 한움큼 주워들었다.
“무슨 짓이야! 당장 집어치워!”
거인이 손아귀에 쥔 돌무더기를 본 인간이 놀라서 고함을 질렀지만 거인은 인간의 항의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돌무더기를 집어 던졌다.
주먹만한 돌멩이 수십 개가 한꺼번에 인간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리 몸놀림이 빠르다고 해도 수십 개의 돌멩이가 한꺼번에 흩어져서 날아오는데 피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몇 번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는 했지만 결국 돌멩이에 걸리고 말았다.
다리에 돌멩이를 맞은 인간은 허공에서 한바퀴 돌더니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거인은 땅에 쓰러져 있는 인간을 보고도 그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돌덩이를 여러 개 잡고 던지기 시작했다.
돌덩이가 인간을 스치고 지나가자 기절한 듯 쓰러져 있던 인간은 펄쩍 옆으로 뛰어버렸다.
그리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치 포탄이라도 날아가는 것 같았다.
거인은 인간과 충돌한 후 뒤로 몇 바퀴를 구르며 미끄러지다가 거대한 바위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그제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놈아.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참아야 해.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인간은 거인의 옆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멀리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지붕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아르보그 공작 가문의 저택 하나가 그렇게 박살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