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설득이 되지 않는 자
힐데 백작을 설득하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이었다.
막시밀리안 공작 측의 다른 귀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힐데 백작의 경우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영지와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확약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지금 같은 난세에 누가 그런 약속을 해 줄 수 있을까?
그저 불이익을 당할 일은 없으리라는 약속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내 이름을 걸기도 했다.
만족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성문을 닫고 끝까지 버티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막시밀리안 가문에서 쓸만한 성인 남자는 아예 씨가 말랐고, 아르보그 공작은 죽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새로운 공작으로 옹립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황제도 존재하지 않는 이때 누가 새로운 공작에게 권위를 부여한단 말인가.
뭐, 나설 사람이 없기도 했고.
결국, 구심점이 될 만한 고위 귀족이 없으니 흘러가는 대로 대세를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끝까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자들도 몇 명 있었다.
모두 아르보그 공작의 손이 닿았던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 흐레디의 백작 올브욜프였다.
그는 힐데 백작 다음으로 세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자였다.
전형적인 영지 귀족이고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올브욜프 백작은 영지병을 소집하고, 성문을 닫아 걸은 후 일체의 대화를 거부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따지고 보면 고만고만한 자들 중에 조금 더 강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연합자치령 정도의 체급이 가서 밟으면 밟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힐데 백작조차 내가 내건 막연한 약속을 믿고 연합자치령에 합류해 온 것이 아닌가.
올브욜프 백작성 앞에 진채를 세운 나는 하루를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나는 백작성을 향해 전령을 내보내야 했다.
그리고 전령이 돌아올 때까지 새롭게 종군하게 된 사람들을 불러모아 올브욜프 백작에 대한 평판을 들었다.
예상대로 오랫동안 같은 세력권에 속해 있던 자들이라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올브욜프 백작은 비교적 온화한 성품입니다. 조금 소심하다는 평판은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가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렇지 기사다운 용맹을 의심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오랫동안 관대하게 흐레디 지방을 다스려온 집안이라서 영지민들의 충성도가 높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행정 실무는 그의 장남이 거의 다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사와 행정관들은 올브욜프 백작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쏟아냈다.
나중에는 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아끼는 애완동물이 무엇인지 언급될 정도로 상세한 정보였다.
올브욜프 백작에 대한 정보를 들어봐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평화스러운 시기에는 무난한 통치를 펼칠 수 있는 영주라는 느낌만 받았다.
그런데 왜 저러는 것일까?
이러면 함부로 뻗대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죽여야 하는데.
“올브욜프 백작은 젊은 시절에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유학한 일이 있습니다. 한 3년 정도? 아르보그 공작 가문과 친근하게 교류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잠깐. 아르보그 공작령에서 유학한 적이 있다고?”
“오래전 일이라서 저도 집안 어른께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아르보그 공작 가문과의 친분 때문에 저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것일까?
백작이나 되는 귀족이?
설마. 그럴 리가.
귀족 간의 친분은 꽤나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친분 때문에 영지의 운명을 건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귀족은 그렇게까지 순진한 존재가 아니고, 가문의 구성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전령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뭐라고 하던가?”
“올브욜프 백작은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과 측근들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올브욜프 백작에게 직접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신호를 제게 보냈습니다.”
전령으로 갔던 기사는 평범한 기사가 아니었다.
남작령의 후계자로 정치적인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는 자였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니 신뢰할 만하다.
“이거 잘하면 안에서 무너지겠는데?”
“막시밀리안도 아르보그도 없으니까요. 버티고 있는 올브욜프 백작이 이상한 것입니다.”
“좀 도와줘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공격을 해서 혼란하게 해야 합니다.”
내 혼잣말에 내게 끌려온 남작령의 후계자 하나가 끼어들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 의견을 받아서 보태는 자 역시 영주의 아들이었다.
지금 내 지휘관 막사에 몰려와 있는 자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았다.
영주의 장남이나 차남이 가장 흔했고, 조카나 손자도 드물지 않았다.
내 군대와 함께 다니는 것도 인질이라기보다는 실전에 끼어서 경험을 쌓는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즉시 공성 준비를 하고 있던 노렌을 불러들였다.
“노렌 경. 투석기 조립은 어떻게 되었나?”
“3대를 조립 완료했습니다. 내일까지 3대 더 조립이 가능합니다. 조립 완료한 투석기는 명령만 내리시면 곧장 공격 가능합니다.”
“공성탑은?”
“조립 중입니다. 내일까지 조립은 마칠 수 있습니다.”
하루 만에 준비한 것치고는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처음부터 공성전을 생각하고 부품을 실은 마차를 끌고 다닌 덕분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처럼 공성무기를 만들기 위해 벌목부터 해야 했다면 열흘로도 부족하다.
“아쉽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따로 쌓아두는 옹성만 아니었으면 공성추를 끌고 가서 성문을 부수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제발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시면 안 됩니다. 백작님이 공성추를 직접 끌고 가신 것을 알게 된 백작가의 가신들이 제게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릅니다. 다음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제 목을 매달겠다고 하더군요.”
“옹성이나 도개교가 없는 성이 이상한걸세. 그런 구조물이 있는 성에는 나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해. 어쨌든 가신들에게 나도 한소리 들었으니 앞으로는 그런 일을 지양하도록 하지.”
“지양이 아니라 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백작님의 신분을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 내 조심하지. 그리고 투석기는 지금 공격을 시작하도록 하게. 하나는 성벽 위를 노리고 나머지는 성 내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하지. 성 내부를 공격하는 쪽에는 돌이 아니라 화탄을 날리게.”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내 옆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노렌을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투석기까지 동원된 공성전을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어도 제국이 오랫동안 평화스러웠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간혹 있었던 전투는 기사들끼리 투닥거리는 정도였고, 용병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공성전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외국과의 분쟁은 변경백들이 맡았지만 심각한 경우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실상 한두세대 정도는 전투라면 모를까 전쟁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자들이 갑자기 전쟁을 하려고 하니 온갖 추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영지민에 대한 지나친 약탈도 그런 부작용의 하나다.
소수의 병력으로 영지전이나 벌이던 자들이니 군대의 보급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언제나처럼 종군상인에게 맡기거나 병사들이 식량을 직접 가져가게 한다.
그러면 당연히 식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굶게 된 병사들이 현지에서 징발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징발이라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은 징발과 약탈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것은 기사들 역시 비슷하다.
아마도 지금 전쟁이 벌어진 곳은 대부분 약탈로 인해 황폐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에 속한 영지 중 일부는 이미 회복 불능의 타격을 받았다.
그나마 내가 보급에 대해 강조를 했기에 내가 담당한 지역은 약탈이 아닌 징발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았다고 자부한다.
적어도 회복 불능까지는 아니니까.
입맛이 썼다.
*
전령으로 왔던 테이나 남작의 장남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투석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두세 번 엉뚱한 곳으로 돌을 날리더니 그다음부터는 정확하게 성벽 위를 직격하고 있었다.
튼튼하게 쌓은 성벽이니 어린아이 몸무게 정도 되는 돌탄환으로는 성벽을 부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몸뚱아리는 성벽처럼 단단하지 않다.
그게 문제였다.
“또 날아온다!”
윌리엄 백작군의 투석기는 규칙적으로 돌탄환을 날려보냈다.
그리고 서너 번에 한 번씩은 병사 하나나 둘을 으깨어 버렸다.
노리고 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오네슨은 이를 갈았다.
조부의 알 수 없는 고집에 죄없는 병사들만 죽어나가는 것이다.
“어! 돌이 성안으로 날아갑니다!”
옆에 있던 측근 겸 친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까지 성벽 위를 집요하게 때리던 돌탄환이 이번에는 성벽 위가 아니라 성 안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이런! 불이다! 당장 치안대를 출동시켜! 화재가 번지면 안 된다!”
비오네슨은 지붕에 떨어진 돌탄환이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깨지면서 불이 확 번지는 것을 보고, 성 내로 날아온 것이 돌탄환이 아니라 불 붙은 항아리였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돌탄환이 아니라 불붙은 항아리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도, 성 내에도 연달아 불덩이가 떨어졌다.
타르가 섞인 모래로 가득 든 항아리가 깨지면서 불이 번지면 잘 꺼지지도 않았다.
비오네슨은 다급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난리를 치는 친우를 바라보았다.
성 곳곳에 불이 번지고 사람들은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다들 화재에 신경이 다 가 있었다.
비오네슨은 크게 호흡을 한 후 그의 조부에게 향했다.
저택 내부를 지키던 병사들 중 일부가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지 원래보다 휑한 저택이었다.
심지어 경호기사조차 얼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비오네슨을 막는 자도 없었다.
비오네슨은 옆구리의 칼을 확인한 후 조부인 올브욜프 백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뚝 멈춰섰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멍청한 놈.”
“이대로 있으면 결국 우리는 다 죽을 겁니다. 윌리엄 백작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을 겁니다. 그 사람은 그럴 만한 사람입니다.”
쿨럭.
비오네슨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조부와 숙부를 보았다.
숙부의 단검은 올브욜프 백작의 배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올브욜프 백작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를 따라 비오네슨의 숙부도 몸을 낮췄다.
“너희들은 몰라. 글렌 공작을 섬기던 너구리들도 모르고, 칼마르의 애송이도 몰라. 너희들은 눈 먼 장님이야. ······나는 봤지. 아르보그 공작 가문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르보그 공작이 죽은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야. 공작의 죽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나는 영혼까지 죽기 싫어.”
마지막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비오네슨과 그의 숙부뿐이었다.
“비오네슨.”
“예? 예! 숙부님.”
“형님께 가서 백작님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나가시다가 넘어지셨다고 전해다오.”
“예. 예!”
비오네슨은 자신이 무엇을 들은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본 것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의 숙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비오네슨의 부친이 기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왔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친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백기를 든 기사를 성 밖으로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