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53화 (153/248)

153. 신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자를 향해 내리친 긴 칼은 부러졌고, 배를 찌른 짧은 칼은 찰흙 속에 찔러 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는 부러지고 하나는 빠지지 않으니 쌍검을 모두 잃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도망도 치지 못한다.

이제 미하우가 남자에게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의 균형을 흔들어서 넘어뜨리는 것뿐이다.

갑옷을 입고 싸우는 기사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갑주격투술을 사용했겠지만 미하우는 용병이고 그가 배운 것은 지구의 레슬링과 유도를 섞어놓은 것 같은 용병격투술이었다.

그리고 그의 용병격투술은 용병들 중에서도 괜찮은 축에 들어갔다.

쌍검술 정도는 아니지만 기사와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미하우는 남자에게 오히려 바싹 붙으며 목덜미를 휘감듯 잡았다.

그리고 오른쪽 어깨를 남자에게 대며 몸을 숙이듯 기울였다.

동시에 오른발로 상대의 다리를 걸고 단숨에 메쳐서 넘겨버리려고 했다.

만약 윌리엄이 봤다면 한눈에 저것은 유도의 허리후리기라고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흔하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미하우의 시도는 그냥 시도로 끝났다.

다리를 거는 것까지는 물 흐르듯 아무 저항 없이 할 수 있었지만 상대의 균형을 뺏는 것에는 실패했다.

자세를 낮추고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했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땅에 굳게 뿌리 내린 나무를 끌어안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미하우는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의 생존본능이 미친 듯이 경보를 울리며 당장이라도 도망치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리고 상대는 너무 가까웠다.

만약 그가 용병으로서 평소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면 갑옷 이곳저곳에서 단검이 나오고 송곳이 나오고 석회가루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수련용의 검 두 자루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모두 잃은 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도한 용병격투술의 기술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상황까지 밀렸다면 미하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자는 뒤로 물러서려던 미하우의 목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엄청난 힘이었다.

미하우의 저항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미하우는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목이 졸려서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죽이려는 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 살짝 웃고 있었다.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 기분 좋아하는 괴물의 얼굴이었다.

그때 미하우는 알 수 있었다.

쌍검을 모두 잃기도 전에 이미 결론은 나 있었던 것이다.

저것은 자신의 반항 따위는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았다.

미하우가 힘없이 발버둥을 쳤지만 괴물의 얼굴에 있는 미소조차 지우지 못했다.

그의 힘없는 발버둥은 약간의 걸거침조차 되지 못했다.

남자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미하우의 아랫배에 찔러 넣었다.

마치 잘 드는 단검이 배에 찔리는 것처럼 그의 손이 미하우의 아랫배를 찌르고 멈췄다.

미하우의 피가 흘러서 땅바닥에 뚝뚝 떨어졌고, 피의 일부는 연기처럼 기화되어서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그 남자의 손에서 기화되어 흡수되고 있었다.

“예언을 하는 꼬맹이가 있다는 소문을 따라 왔지만 아직 열매는커녕 꽃도 피지 못한 애송이라서 그 부모에게도 화를 좀 내고 왔거든. 그런데 그 소문이 안내한 상대는 그 꼬맹이가 아니라 자네였던 모양이야. 이렇게 자신의 신비를 깨달아가는 자와 우연히 마주치다니!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이지.”

뭔가 이상한 내용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하우는 잘 들리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말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미하우는 자신의 배를 찌른 남자의 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을 통해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빠져나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일부를 잃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영혼의 일부를 떼어가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미하우는 영혼의 일부를 잃는 것 같은 상실감과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절망 속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

나는 지금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으로 다시 출동한 참이었다.

원래 데리고 다녔던 용병부대 이외에도 인질 겸 협력자로 합류한 기사와 행정관까지 몽땅 끌고 말이다.

다리클리프에서는 연달아 전령이 와서 조만간 프리시오 공작의 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어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말을 해 놓았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막시밀리안 쪽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남해의 제해권까지 장악한 프리시오 공작이 해상 교역망을 쥐고 흔든다면 칼마르의 피해가 막대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거기다 갑자기 상륙부대를 이곳저곳에 내려놓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며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안 쪽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프리시오 공작은 멀리 있는 자였다.

그것도 아주 멀리 있는 자였다.

제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병력을 보내면 얼마나 많이 보낼 수 있을 것이며, 보급은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한 그의 우선순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베르그렌 역시 프리시오 공작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을 원정군으로 보낼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따위 짓을 하면 1년도 지나기 전에 휘하의 귀족들이 프리시오 공작의 목을 매달고 새로운 공작을 뽑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아니, 그전에 제국 중부에 있는 스케티 공작이나 뱅트손 공작이 과연 가만히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에 속해 있던 귀족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선 것이다.

과거, 우리는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을 이미 5갈래의 병력으로 한바탕 쓸고 지나간 바가 있다.

그 당시에 우리는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은 원래부터 글렌 공작의 세력에 비교해도 규모가 작았고, 바르거의 반역이 휘하 귀족들의 세력을 많이 갉아먹어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한 귀족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함리 백작처럼 농성을 하다가 패가망신한 경우보다 무저항영지를 선언하고 눈치를 본 귀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시만해도 아르보그 공작이 바르거 막시밀리안을 돕기 위해 밀려올 것이라는 예상이 있어서 빠르게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좋게좋게 지나갔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에 속했던 귀족들 중 귀족연합자치령에 가입하는 귀족들의 숫자가 예상을 밑돌았던 것이다.

심지어 무방비 영지를 선언하고 영지군의 일부를 떼어서 종군까지 시킨 자들조차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계속 시간을 끌었다.

결국 참다못한 연합자치령에서는 몇 명의 귀족들을 사절로 파견해서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의 귀족들을 순회하며 설득하는 중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추가로 출동한 것이기도 하다.

협박을 포함한 설득으로도 답이 안 나오면 실력행사를 포함한 설득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의 귀족들 중 쓸만한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자가 30명이 좀 넘었지요?”

“지금은 좀 더 줄었습니다. 백작님. 원래는 40명이었지만 바르거의 쿠데타 와중에 몰락한 가문이 몇 개 있어서 34개 가문이 되었고, 그 후에도 우리와 부딪쳐서 몰락한 가문이 몇 개 더 있어서 지금은 25개 정도로 봅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너무 물러서 저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돈슨 경?”

“그렇습니다. 힐데 백작에게 직접 물어보았는데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는 않고 말을 돌리기만 하더군요.”

원래 우두머리가 둘이면 둘 사이가 아무리 원활해도 뭔가 이상하게 일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우두머리 둘의 사이가 좋아도 아랫사람들의 경우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렌이 글렌 공작성에 자리잡고 귀족연합자치령의 두뇌 노릇을 시작하자 아돈슨은 스스로 물러나서 외부의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제법 야망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미래를 기약하며 시간을 투자하는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칼을 목에 들이대면 속에 있는 말을 하기는 할 겁니다.”

“괜히 윌리엄 백작님만 원한을 사는 것은 아닐까요?”

“설마요. 그리고 원한을 좀 사면 어떻습니까? 이곳에 또 올 것도 아닌데. 제 영지는 저기 남쪽 끝에 있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두려움에서 온다.

저 사람이 내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 말이다.

영지 귀족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과 잘 지내려고 할까 아니면 적대하려고 할까?

“베르시달드의 백작 힐데입니다.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윌리엄 백작.”

“힐데 백작께서 뛰어난 기사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입니다.”

힐데는 바르거에게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무방비영지를 선언했고, 무방비영지를 선언했음에도 우리쪽에서 종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연합자치령에 가입하지 않은 자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미 아돈슨 경에게 연합자치령에 가입하는 문제는 좀 더 두고보자고 했을텐데 이렇게 병력까지 끌고 오다니, 한판 붙자는 것입니까?”

“진짜로 토벌을 생각했다면 이 정도의 숫자로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공성병기도 없지 않습니까? 힐데 백작께서도 그걸 아시니까 대화를 하기 위해 이렇게 나오신 것이겠지요?”

“강요하지 마시오. 백작.”

“힐데 백작께서 아르보그 공작과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 역시 대화를 위해 나왔습니다. 무턱대고 거절만 하시는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부정비를 마치는 대로 완충지로 삼은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천천히 밀고 올라갈 생각입니다. 후방에 불안요소를 남겨놓을 수는 없습니다.”

힐데 백작은 내가 하는 말에 숨겨져 있는 협박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잠깐 얼굴이 붉어졌지만 금방 평온을 되찾았다.

“연합자치령의 귀족들, 특히 글렌 공작을 따르던 자들은 글렌 공작을 그대로 닮았더군요. 심지어 윌리엄 백작조차 글렌 공작을 연상시킵니다.”

중년의 여기사는 내 눈을 노려보았다.

실전을 겪어본 자의 눈이었다.

싸우게 되면 기꺼이 싸우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힐데 백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름이야 그럴듯하게 귀족연합자치령이고,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하지만 결국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가 글렌 공작의 사람들 아닙니까? 막시밀리안 공작을 따르던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무슨 좋은 꼴을 볼 수 있을까요? 공작들이 모두 죽었으니 아무 상관 없다고는 하지 마십시오. 실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공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결국 우리는 머릿수나 채우고 방패 역할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가끔은 버리는 패로도 쓰겠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리엄 백작. 내 걱정이 기우입니까?”

할 말이 없었다.

전투에 들어가면 진짜 저렇게 될 것 같아서 부정도 못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뢰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

오랫동안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고 심지어 싸우던 사이인데 갑자기 같은 편이 되라고 강요당하면 불안한 것이 정상이기는 하다.

“칼마르가 있지 않습니까? 연합자치령 내에서 칼마르의 영향력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칼마르가 막시밀리안 파벌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적어도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칼마르와 함께하도록 합시다. 내 명예를 걸겠습니다.”

사전선거운동이라면 아무래도 아돈슨보다는 내가 좀 더 낫겠지.

나는 표정이 살아나는 힐데 백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