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52화 (152/248)

152. 신비를 사냥하는 자

귀족연합자치령, 흔히 연합자치령으로 부르는 지역은 상당한 넓이였다.

구 제국의 동남부 전체와 동부 일부를 포함할 정도였으니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권과 글렌 공작의 세력권을 합친 것보다도 더 넓은 셈이었다.

그것은 지슬리 공작의 세력권 일부가 연합자치령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 글렌, 지슬리.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

선제후였고 공작이었지만 일단 제국의 분열이 공식화되자마자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비록, 후계자들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후계자라고 할 수도 없는 자들이었다.

현재 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일개 백작만도 못할 정도였다.

대신 칼마르의 백작인 나, 글렌 공작의 측근이었던 베르그렌과 아돈슨이 이 지역의 새로운 실세로 떠올랐다.

“윌리엄 백작께서 노력해 주신 덕분에 글렌 공작의 세력권에 속한 자들은 대부분 별문제 없이 연합자치령에 합류를 했습니다.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시간 문제일 것으로 봅니다.”

“베르그렌 남작. 그들이 계속 시간을 끌면서 애매하게 군다면 차라리 토벌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 번만 더 권유해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계속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정리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구태여 병사를 보내서 토벌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같은 집안에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새로운 영주가 되고 싶은 자가 알아서 움직일 겁니다.”

글렌 공작의 최측근이었고, 글렌 공작이 죽은 이후로는 친글렌파의 수장 노릇을 했던 베르그렌은 지금 연합자치령의 두뇌 노릇을 하고 있었다.

글렌 공작의 공작성에 좌정한 채 과거의 보좌관들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글렌 공작의 최측근 노릇을 하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게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글렌 공작이 연상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일처리도 확실했다.

내 경우에는 설득할 자와 무력으로 제압할 자를 구분해 준 덕분에 꽤나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데려온 인질들은, 아니 협력자들은 막시밀리안 쪽의 귀족들을 설득할 때 데려 가시지요.”

“그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인질이 맞기는 하지요. 그래도 우리 조심합시다. 아직은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것의 실체가 애매해서 얇은 유리공을 굴리는 느낌이니까.”

이번에 내가 끌고 온 자들은 연합자치령의 가입에 미온적이었던 자들의 직계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이었다.

지원군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인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 기사로 훈련을 받았고, 일부는 초보 행정관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받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막시밀리안 쪽의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에는 많은 노력이 들 모양이다.

병사가 아니라 간부부터 충원해 주는 것을 보아하니 파견했던 사절들의 성과가 미미했던 것은 물론이고 적대적인 경우도 많았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에게 합류한 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적지는 않았는데, 이러면 다시 한번 막시밀리안의 세력권을 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베르글렌은 협력자를 내게 붙여준 것뿐아니라 하루 만에 기사와 병사들까지 확충해 주었다.

이것은 직접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어서 출발해 달라는 무언의 독촉이기도 했다.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마치자마자 다음 순회공연을 가라고 재촉하다니!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이 부족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부족하다고 해도 너무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은 어쩔 수 없었다.

열심히 설득해서 우리 편을 늘려야 했다.

사람들의 인식이 연합자치령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민은 귀족인 영주를 모시고 산다.

귀족들은 정해진 사회 질서에 따라 상위의 귀족과 계약을 맺고 보호와 충성을 교환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최상위에는 황제가 있다.

다들 그렇게 수백 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최상위에 있었던 황제는 끝났고, 선제후였던 자들은 내전을 선택했다.

그 와중에 몇 명은 순식간에 죽어버렸고 그중에는 황제로 선출된 전력이 있었던 아르보그 가문의 공작조차 있었다.

선제후 역시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버린 것이다.

귀족들이 보기에는 세계가 붕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새로운 질서인 귀족연합자치령을 제시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반동적인 정치체제일 수도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좀 더 많은 귀족을 끌어들여서 조만간 새로운 황제를 선언할 과거의 선제후들을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기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

미하우는 칼마르 시의 외곽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명상과 상상수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집밖으로 나가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간혹 그가 간부로 있는 검은곰 용병대에서 감당하지 못한 의뢰가 있는 경우에는 소집에 응해서 집을 떠나 몇 달씩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조차도 사양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간질간질하게 자신을 건드리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한다면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명상과 상상수련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미하우는 쌍검을 사용하는 쾌검수로 이름이 높았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결투나 전투 중에 죽임으로 자신의 실력이 소문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파웰 상단의 상행에 참가했다가 크게 낭패를 본 후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이 생겼다.

과연 자신의 실력이 정말 뛰어난 것일까?

그는 쌍검을 쓴다.

그래서 쌍검의 미하우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용병 중에 쌍검을 쓰는 자가 거의 없기에 그의 별명은 그의 실력을 알리는 광고판이기도 했다.

쌍검을 쓴다는 것은 제대로 된 무술 수련을 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배 용병의 어깨 너머로 어설프게 칼 휘두르는 법을 익힌 농촌 출신의 용병이나 군대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검술을 배운 병사 출신의 용병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쌍검술이다.

미하우는 검술의 한 유파에 속했던 그의 부친으로부터 쌍검술을 익힌 경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실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보다는 용병 생활 때문에 부족한 수련을 탓하며 명상과 상상수련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파웰 상단에서 상대 기사들의 연환진에 걸려들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다.

자신은 단순히 빠르기만 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쌍검술의 정교함이 아니었다.

쌍검술의 정교함보다는 단순히 몸놀림이 빨랐기 때문에 가진 우위였다.

그를 상대하던 자들은 상대적으로 빠른 미하우의 몸놀림에 휘말려서 패한 것이었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는 자신이 신비를 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웃기는 일이지만 몸놀림이 빨라지는 신비도 있는 모양이었다.

외부에 자신의 힘을 투사하는 신비가 아니라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신비라니!

그리고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만약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 피요트르의 참견이 아니었으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마법사 피요트르는 미하우에게 자신과 비슷한 향기를 느낀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그런 향기를 느낀 자들은 몇 명 없었지만 예외없이 신비를 접한 자들이었다면서 스스로를 확인해 보라고 했다.

가끔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거나 아니면 정신을 어디에 던져두고 다니는 것 같던 사람치고는 꽤나 진중한 충고였다.

그때부터 미하우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접한 신비를 좀 더 쓸모있게 만들 수 있을까 궁리를 거듭했다.

그러나 뭔가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간질간질한 감각이 그를 괴롭히기만 했다.

“답답하기만 해. 도저히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군. 신비라는 것은 그냥 접하기만 할 수 있을 뿐 수련으로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내가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너는 잘하고 있어. 한고비를 넘기기 직전이야.”

“누구냐!”

미하우는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개인 수련장은 외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어서 가족의 안내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람 하나가 빙글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하우는 수련장의 외곽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눈으로는 분명히 사람이 하나 앉아있는데 눈을 제외한 그의 감각으로는 아니었다.

미하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왔더니 적당히 익어서 숙성하기 직전이군.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 같았는데 아쉬워라.”

“정체를 밝혀라.”

미하우는 양손에 검을 쥐고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준 동료들이었다.

길고 짧은 칼.

공격적이고 싶으면 극단적으로 공격적이 될 수 있고,

방어적이고 싶으면 극단적으로 방어적이 될 수 있는 조합이었다.

미하우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움직였다.

수련장의 외곽에 앉아 있는 남자는 미하우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별로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혀를 내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별미이기는 했는데 제대로 익기는커녕 열매도 맺히지 못한 떫은 새싹에 지나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기운보다도 못한 맛에 기분만 상해서 돌아가던 참이었단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열매를 만나는구나. 깨달은 자의 정수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오싹한 기분이었다.

맹수를 눈앞에 둔 기분?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를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상대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근본적인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아니면 혐오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미하우는 눈앞의 남자가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만나본 적들 중 가장 위험한 적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용병생활은 미하우에게 중요한 교훈을 하나 가르쳐 주었다.

먼저 공격한 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리고 공격할 때 망설이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상대와의 거리가 미하우의 간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력을 다해 일검을 휘둘렀다.

미하우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번보다 더 빠르게 칼을 휘둘러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상한 남자의 반응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자신의 팔을 들어서 미하우의 일검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미하우의 검은 상대의 팔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나갔다.

마치 돌덩이를 때린 것 같았다.

미하우는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짧은 칼로 견제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상대는 견제를 무시하고 그에게 접근해왔다.

미하우가 뒤로 물러서는 속도보다도 훨씬 빠른 접근이었다.

남자는 미하우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숨결이 미하우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그래. 이 냄새. 정말 잘 익었군.”

미하우의 짧은 칼이 남자의 배를 찌른 후였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했다.

분명히 칼이 배를 찌르고 들어갔음에도 피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서 바로 이마를 맞대고 미하우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미하우는 그제서야 왜 그에게서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이 자의 눈은 포식자의 눈이었다.

자신을 먹이로 생각하는 자가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미하우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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