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설득 또는 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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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겔슨 남작은 뭐라고 하던가?”
“전투를 할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대신 무장을 해제하고 방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휴대하는 호신용 무기도 안 된다고 했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로 묻지는 않았습니다.”
에리겔슨 남작의 영주성에 다녀온 기사는 듣기에 매우 거북한 말을 옮겼다.
자신보다 상위의 귀족이 방문하겠다는데 무장해제를 요구하다니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러면 내가 화를 내도 다들 나보고 참을성이 강하다고 할 거다.
적어도 당장에 달려가서 목을 자르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전투 준비를 할까요?”
“아니. 아직이야. 한 번은 더 설득을 해봐야지. 노렌 경. 공성추를 준비해주게.”
“설득을 공성추로 하신다고요?”
“그게 가장 빠를 것 같아. 지난번에도 공성추 한 방으로 다들 납득을 하고 연합자치령에 귀순하기로 했잖은가?”
“그건 그랬지요. 알겠습니다. 같은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요즘 제국 동부의 거대 파벌이었던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의 세력과 글렌 공작 파벌의 세력을 귀족연합자치령이라는 느슨한 연대로 묶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 말고도 여러 명의 귀족이 이 일에 뛰어들어서 뭉그적거리는 영주들을 설득하는 중이었다.
에리겔슨 남작 역시 뭉그적거리는 자들 중의 하나였다.
양 파벌의 세력이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던 사이였고 최근에는 여러 지역에서 영지전을 벌이며 증오를 쌓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수백 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동안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지내왔던 이웃이기도 하다.
명분이 서고 이익이 된다면 서로 간에 손을 잡는 것을 구태여 마다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원칙은 그렇다지만 그래도 모든 귀족이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중 일부는 귀족연합자치령이라니 이 무슨 근본 없는 짓거리냐며 합류를 거부했고, 일부는 좀 두고보자면서 영주성에 틀어박혔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딱히 무슨 대의명분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선제후였던 과거의 대귀족들이 연달아 죽어나가고 가까운 측근이 반란을 일으켜서 하나의 파벌을 장악하는 하극상까지 벌어지는 혼란기가 지금이다.
눈치 빠르고 연줄이 있는 자들이야 재빠르게 줄을 바꿔잡고 태세를 전환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그냥 소식이 늦었고, 어떤 이들은 몸값을 올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직 미래를 걸고 도박을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서 시간을 끌며 눈치를 보는 것이다.
누가 승자인지 대충 윤곽이 보이면 그때 깃발을 들고 참가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나 귀족연합자치령을 건설하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되도록 빨리 설득해서 같은 편으로 만들어 놓아야 서부와 중부의 대귀족들을 상대로 버티기라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빠른 설득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에리겔슨 남작도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속해 있던 자였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아르보그 공작의 손길이 닿았던 자들이 많다 보니까 눈치를 심하게 보는 편인 것 같습니다.”
“한 번 배신했던 자에게 또 한 번 배신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세 번 배신할 수는 없잖은가?”
“글쎄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배신했다면 세 번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노렌 경. 그래서 에리겔슨 남작의 목도 자르자고?”
“아닙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지요. 반항한다고 무조건 목을 자르면 나중에 백작님을 따르는 귀족이 없어질 겁니다.”
용병대장 노렌은 어느 순간 내 부관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용병대장답게 눈치가 빠르고, 강단도 있어서 내가 윽박질러도 기가 죽지 않고 대꾸할 정도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용병대가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믿을 수 있는 용병대라는 평판을 얻은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우리가 잡담을 하는 동안 병사들이 공성추를 밀고 왔다.
공성추는 성문을 부수는 공성병기다.
통나무의 앞부분에 철판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뒤집어 씌우고 수레에 얹어서 고정한 형식이 보편적이다.
성문을 여러 번 두드릴 수 있게 대들보를 세우고 밧줄로 통나무를 대들보에 묶는 방식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일반 병사들이나 사용하는 것이고 내가 쓸만한 물건은 아니다.
나는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성문을 부수기 때문이다 .
나는 공성추를 준비해 둔 곳으로 움직였다.
성문에서 좀 떨어진 곳의 정면이었다.
에리겔슨 남작의 영주성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축성은 꽤나 공들여서 해 놓았다.
사용한 돌의 크기도 제법 크고, 무너진 곳도 없었다.
해자도 물은 안 채워져 있었지만 제법 깊게 파여 있었다.
문제는 해자 위에 있어야 할 도개교가 없다는 것이었다.
도개교 대신 일반 다리가 있고, 나무로 된 성문이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성문 통행을 편하게 하자고 에리겔슨 남작의 선대 중 누군가가 손을 댄 것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성문을 가리키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도개교가 없으니 함께 가도록 하지.”
나와 함께 움직이는 기사들은 칼마르뿐 아니라 여러 다른 영지에서 파견을 나온 자들이었다.
나는 여러 영지의 기사들을 섞어서 운용하면서 칼마르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직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령을 내리면 전보다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기사들은 공성추 뒤에 도열하고 방패를 든 병사들 역시 추가로 따라 붙었다.
나머지 병사들도 일제히 방진을 짜고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선임병들의 고함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는 그리 멀리 않은 에리겔슨 남작의 영주성에도 들릴 정도였다.
에리겔슨 남작의 병사들은 우리의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우리 쪽을 가리키며 연신 성 안쪽으로 연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을 보아줄 생각은 없었다.
백작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방문하라니!
이것은 분명히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간을 본 것이다.
단숨에 성문을 부수고 에리겔슨 남작을 불러서 고개를 숙여야 할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해 줄 생각이었다.
부하들의 준비가 끝나자 공성추의 옆에 가서 섰다.
공성추의 옆에는 나를 위해 특별히 달아놓은 손잡이가 있었다.
뒤에서 밀면 공성추의 방향을 조정하기 어려워서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 붙인 손잡이였다.
나는 공성추의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공성추의 크기에 따라 달라붙은 병사의 숫자가 달라지지만 내가 밀고 있는 정도의 공성추라면 못해도10명은 되는 힘좋은 병사들이 붙어서 밀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출발할 때 약간 뻐근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공성추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상인들이 오가며 다져놓은 길을 따라 공성추의 바퀴가 점점 빨리 굴러갔다.
성문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부터는 전력으로 질주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공성추를 밀면서도 단거리 달리기 선수 못지않은 속도로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뒤늦게 성벽에서 반응이 왔다.
쏴!
쏘지마!
쏘라는 명령이 긴장한 티가 나기는 했지만 평범한 어조의 명령이었다면 쏘지마라는 명령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상반되는 명령에 성벽 위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서 난리가 아니었다.
서로 욕하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화살도 몇 발 날아오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고,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를 맞춘 화살은 갑옷을 맞고 튕겨져 나갔다.
“간다~~~!”
순식간에 성문 바로 코앞까지 간 나는 고함을 지르며 공성추를 끌어안고 성문을 향해 돌격했다.
감히 장담하건대 말의 돌격 속도보다 빠르면 빨랐지 절대로 느리지 않은 속력이었다.
꽝!
성문을 직격한 공성추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성문을 박살내 버렸다.
성문을 고정하는 여러 개의 거대한 경첩이 동시에 망가지고 뜯기면서 성문이 뒤로 넘어간 것이다.
성문 하나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서 안쪽으로 넘어졌고, 다른 하나 역시 경첩이 망가지면서 반쯤 뒤틀린 채 안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공성추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공성추의 앞부분은 철판으로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뭉개졌다.
바퀴 역시 축이 나가서 수레를 못 쓰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공성추를 밀고 온 나와 내 뒤를 따라 달려온 기사들은 손끝 하나 다친 곳 없이 성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 앞에는 경악한 얼굴로 굳어있는 병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에리겔슨 남작은 어디에 있나? 방문을 해 달라고 해서 왔는데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도 없는 것인가?”
내 말은 충격으로 굳어져 있던 성안 사람들의 귀에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아무래도 내 태도가 전투를 시작하려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자 슬슬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서고 있던 에리겔슨 남작의 병사들을 밀치고 몇 명의 기사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딱 봐도 에리겔슨 남작과 그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그들 중 투구를 벗고 있던 중년의 기사가 황당하다는 태도를 숨기지도 못하고 내게 다가왔다.
“윌리엄 백작 각하. 이게 무슨······”
그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했다.
“무장해제를 하고 방문해 달라고 해서 경의 말대로 하고 왔는데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겁니까? 에리겔슨 남작.”
“이게 무슨 무장해제입니까?”
그는 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처지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식한 기사 노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반응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반쯤 박살난 공성추로 걸어갔다.
그리고 충격으로 분리된 통나무를 들어서 옆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호신용 무기에 대한 말은 없지 않았소? 그래서 호신용 무기로 공성추를 가져왔는데 뭐가 문제요?”
내 고함 소리와 함께 뒤늦게 도착한 내 부하 병사들이 성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제대로 갖춰입은 갑옷을 통해 자신들이 여러 전투에 참전했던 숙련병임을 과시하며 살기에 찬 눈빛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기사들 역시 내 뒤로 늘어서서 언제라도 명령만 내린다면 전투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뒤늦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에리겔슨 남작은 입을 다물고 허리에 있는 자신의 칼로 손을 옮겼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저항을 무시하고 바로 앞까지 걸어가서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충고했다.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판단이 안 되는 거요? 우리가 뒤통수에 불안요소를 남기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경은 귀족의 자격이 없어.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이 혼란기에 가문을 건사할 수 있을까? 가주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물러서는 것이 경의 가문을 위해 더 나을 거요.”
“하지만 귀족연합자치령이라니! 그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내밀면서 따르라고 하면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에리겔슨 남작은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을 보았음에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나는 그를 죽이기보다는 설득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경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확실히 맞는 것 같군. 그런데 주변의 참모들까지 용감한 것은 곤란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어야지. 귀족연합자치령이 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요?”
“예?”
“제국의 황제를 선제후가 뽑은 것과 다를 것이 뭐요? 8명의 선제후 대신 자격을 가진 모든 귀족이, 선거 대신 합의로, 황제 대신 임기가 있는 지도자를 세우자는 것이지 않소?”
내 말에 그는 입을 다물고 혼란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의 판단을 돕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주기로 했다.
“내일 정오에 내가 머무르고 있는 병영으로 와서 식사나 함께 합시다. 대답은 그때 듣겠습니다.”
결론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에리겔슨 남작이 부서진 성문과 망가진 공성추를 번갈아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면 내일 그가 와서 할 말은 뻔했다.
나는 다음에 내가 방문해야 할 영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