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49화 (149/248)

149. 뱅트손의 분노

“피 냄새가 심하군요. 마스터 요한.”

“아! 어서 오시게. 윌리엄 백작. 여기서 꼬리가 끊긴 모양일세.”

죽어 있는 자들은 3명.

일가족이었다.

부부와 어린 딸.

저항한 흔적은 없었다.

피비린내가 역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의외로 피를 많이 흘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칼에 찔리고 죽은 사람이 흘린 정도의 피,

딱 그 정도였다.

“어떻게 추적을 하신 겁니까?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았는데.”

“리네아 백작의 개인실에 있던 쿠션을 만든 곳을 뒤지다가 얻어 걸렸지. 쿠션을 만들 때 접근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조사했거든. 아무 기대도 없었는데 와 보니까 이 모양이었지. 그리고 여기를 보게.”

마스터 요한은 죽은 남자의 손을 가리켰다.

남자의 손에는 내가 쿠션의 내부에서 발견한 원통형의 나무토막과 동일한 것이 쥐어져 있었다.

“저것을 발견한 순간 백작을 부른 것일세.”

“잘 하셨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군요.”

나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쿠션 속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모양과 무게였다.

느껴지는 기운도 동일했다.

“이들은 난민으로 흘러들어온 가족인데 여자의 바느질 솜씨가 좋고, 성품도 부드러워서 최근에 공방에서 고용했다고 하더군.”

주민등록증이 있는 세상도 아니니, 난민으로 흘러 들어왔다면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하다.

과거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어떤 인연으로, 누가 이들에게 접근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남편도 피난 과정에서 다리를 다쳤고, 딸도 원래 정상이 아니라서 고생이 많았다는 말이 있었네. 사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의심도 하지 않았지. 암살자로 들어왔다기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딸이 정상이 아니라니요?”

“음. 정신이 이상했다고 하더군. 하루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길가에 서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면 누가 죽는다 누가 다친다 뭐 그런 말만 해서 다들 신비에 접했다고 하면서 두려워했다고 해. 자네도 알겠지만 정신이 이상하다고 해서 꼭 신비에 접한 것은 아니니까 진지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그것은 그렇지요.”

신비에 접했다고 해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능력을 발휘하는 자들은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다.

강한 이능을 발휘하는 자들조차도 어딘가 미친 것 같다는 평가와는 달리 실제로는 사회성이 없거나 자신만의 논리에 따라 움직여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진짜 미쳐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신비에 접한 자들을 알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에시스칼리 산에서 빛의 기둥을 흡수한 이후로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내 안목에 의하면 죽어 있는 딸아이는 신비에 접한 자가 아니었다.

신비에 접한 자 특유의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경험상 그 느낌은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라빅에서 죽였던 바람을 다루는 여인에게서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었다.

신비에 접한 자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힘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의심만 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별로 안 좋다.

“마스터 요한.”

마스터 요한은 내가 자신을 부르자 긴장을 하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사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어떨까요. 마스터 요한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지. 더 이상은 나도 무리라고 생각했네.”

이들이 전쟁통에 연고도 없이 떠밀려서 여기까지 왔다가 원하지도 않은 일에 휩쓸려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계획적으로 침투했다가 꼬리를 자른답시고 제거당한 자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과 상관없이 당한 만큼 보복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나는 뱅트손에 대한 적당한 보복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

제국의 서부에서는 프리시오 공작이 주도권을 쥐었고, 남쪽 바다를 향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선제후들이 자중지란 끝에 모두 죽어 버리고 그들의 후계자인 공작들과 독립적인 지위를 요구하는 귀족들의 연합이 곧 벌어질 전투를 앞두고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중부.

황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경제적인 중심지에서는 전통의 라이벌인 뱅트손과 스케티가 개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

개싸움이다.

그들은 화끈하게 전 병력을 휘몰아서 한차례 큰 전쟁으로 승패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최소한 네 군데서 양쪽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고, 큰 전투가 없는 대신 작은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다.

영지와 영지 사이에서는 밀고 밀리는 소소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전투가 영지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충분한 보급을 받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에서 현지 보급에 나서는 병사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영지민을 약탈했다.

영지민은 살기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

흔히 있는 전투였다.

밀고 밀리며 소소한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는 그런 전투 중의 하나였다.

어제 전투는 양쪽을 모두 합쳐서 백인대 여섯 개가 맞붙었고, 숫자에서 좀 더 유리했던 뱅트손 쪽이 스케티의 병사들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스케티 쪽의 병사들은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잃은 채 부상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뱅트손 쪽도 피해가 크기는 마찬가지라서 일단 뒤로 물러나서 재정비를 하는 것으로 기사들 간에 합의가 되었다.

스케티 쪽의 증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새로운 전투를 치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병사들을 먹이고 쉬게 해주어야 했다.

전장 정리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에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부상병들은 뒤로 물러나는 동료를 따라 이동했지만 부상이 심한 자들은 그대로 전쟁터에 버려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부상이 심한 자들은 이틀을 넘기기 힘들다.

하루가 지나자 어제의 전쟁터에 다시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뱅트손의 기사인 프라보는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들과 함께 어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로 향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백인대 하나와 함께 증원으로 도착한 그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십인대를 모두 잃었다.

망연자실해 있던 그는 다음날 선임 기사의 욕설과 함께 기존에 있던 십인대에 던져졌다.

스케티 측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을 해야 하니 통솔하라는 명령이었다.

말이 통솔이지 만약을 대비한 보험으로 그를 보낸 것이다.

일반 병사들보다는 실력이 나을 테니까 말이다.

“어! 프라보 님. 저것 좀 보십시오.”

어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접근했을 때 그와 함께 이동하고 있던 선임 병사가 손을 들어서 나무 사이를 가리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말 한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어제의 전투에서 죽은 말이었다.

이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말에 달라 붙어 있었다.

다들 단검이나 긴 칼 같은 날붙이를 들고 말을 해체하고 있었다.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베어내서 어깨에 메고 있는 천으로 된 보따리에 쑤셔 넣고 있었다.

어딘가 미친 것 같았다.

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서로를 밀쳐내며 한 점이라도 더 말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힘에 부쳐서 밀려났다가 울면서 다시 사람들 사이로 끼어드는 여자도 있었다.

프라보는 뭔가 세상의 상식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임 병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저 사람들, 또 저 지랄이네.”

“뭔가? 병사. 저 사람들은.”

“근처의 주민일 겁니다. 풀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 고기를 보고 환장하고 달려드는 것이지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관을 본 선임 병사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기사님이 증원으로 오셔서 아직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 지역이 전쟁터가 된 지가 벌써 석달이 넘었습니다. 징발도 약탈도 할 만큼 다 해서 저 사람들에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식량이고 옷이고 신발이고 할 것 없이 남은 것이 없어요. 심지어 집도 허물어서 자재로 가져다가 썼거든요.”

“저 사람들이 가진 칼은? 옷도 신발도 갖췄는데?”

“어제 여기서 전투가 있었지 않습니까.”

프라보는 그제서야 죽은 말 주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날붙이는 병사들의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주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이나 신고 있는 신발도 병사들의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피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자도 있었다.

“어차피 약탈로 다시 회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 뭐라고 했나? 병사.”

“날붙이하고 갑옷은 확실하게 회수할 수 있습니다. 겸사겸사 모아놓은 식량이나 옷도 싹 걷어오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번에 보니까 버섯이나 나무 열매 같은 것을 좀 모아 놓았더라고요.”

“아니, 그러면 저 사람들은?”

프라보의 반문에 선임 병사는 이상한 질문을 듣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 저희가 알 바가 아니지요. 기사님. 기사님이 오늘 아침 드신 스튜의 절반은 저 사람들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보급이 들쑥날쑥 하거든요. 그리고 저희가 거둬 들이지 않아도 저놈들이 가져갈 겁니다요. 몸을 낮추십시오.”

프라보는 자신도 모르게 선임 병사의 말에 따라 몸을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말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일단의 병사들이 달려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스케티의 병사들이었다.

“저런. 이번에는 저놈들이 선수를 쳤네. 거기다 숫자도 많네. 기사님. 아무래도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스케티의 병사들은 말 주변의 사람들을 몰아세우며 말고기가 담긴 보따리를 빼앗고 있었다.

사람들은 울면서 무력하게 자신의 수확물을 빼앗겼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이미 세 명이나 되는 남자가 칼에 찔려 쓰러졌다.

프라보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병사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으로 몸을 숨긴 채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임 병사의 재촉하는 표정을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프라보는 돌아가는 길에 선임 병사에게 물어보았다.

“부상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전장 정리를 하면서 부상자를 데려온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발로 걷지 못할 정도라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곳에는 세르게티의 사제가 없습니까요. 대신 이곳의 주민들이 자비를 베풀어 주지요.”

“내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군.”

“전쟁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요.”

프라보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

그때 뱅트손 공작은 보급품이 왜 부족하고 늦게 도착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하던 담당 보좌관의 목을 날리고 한바탕 화를 낸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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