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48화 (148/248)
  • 148. 뱅트손의 사절

    “축하사절로 칼마르에 왔다고? 캘로 경. 당신 미친 것 아닌가?”

    캘로는 숨을 들이켰다.

    공식석상에서 이런 모욕이라니!

    이것은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때린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격의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참지 않았겠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칼마르의 백작이었다.

    캘로는 사고없이 돌아간다는 자신의 목적을 기억했다.

    참아야 했다.

    그래도 자신의 명예를 생각해서 조금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다.

    “아니,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윌리엄 백작 각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제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뱅트손 공작 전하의 축하 전언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하시면 안 됩니다.”

    캘로는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도발에 목소리를 높이며 항의했지만,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더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윌리엄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바로 얼마 전에 칼마르는 반란을 제압했네. 반역자들은 감히 칼마르의 정당한 통치자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시도했고, 심지어 외부의 병력을 끌어들이기까지 했지. 한 번 맞춰 보게 그 외부의 병력이 어디서 왔을까? 캘로 경. 왜 가만히 있나? 대답을 해보게. 그들이 어디서 온 것 같나?”

    캘로는 침을 삼켰다.

    이것은 대놓고 알려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칼마르에서는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과 뱅트손의 관계를 다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의 병력?

    단순히 자금을 보내고 기사 몇 명이 파견을 나갔던 것이 아니었나?

    캘로는 뒤늦게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대놓고 물을 먹인 것이다.

    게다가 그 누군가에는 자신의 상관까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자신의 상관이 몰랐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파벌이 달라도 그렇지!

    뒤통수가 저릿했다.

    “칼마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소리소문도 없이 잘 숨겨놓았더군. 천 명이 넘는 병력이라니! 기사도 수십 명이었지. 덩치도 거인을 방불케 하는 자들이었네. 반역자를 지원한답시고 이런 엄청난 군대를 보낸 것을 보면 뱅트손 공작이 칼마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겠더군.”

    이것은 대충 말로 뭉개고 지나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천 명 단위의 병력이라고?

    남작령 정도는 단숨에 짓밟아 버릴 정도의 숫자 아닌가?

    게다가 거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덩치가 큰 기사들이라면 뱅트손 공작의 직할 부대에 속한다.

    그들은 뱅트손 공작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고, 움직여서도 안 되는 자들이었다.

    미친놈들!

    아무리 권력 투쟁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이런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도 않다니!

    캘로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자신은 절대로 아는 것이 없어야 했다.

    실제로 아는 것도 없었고.

    칼마르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뱅트손이 연관되었다고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말을 했다가는 나중에 실패에 대한 책임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캘로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그는 처음으로 외교관다운 말을 했다.

    “윌리엄 백작 각하. 무엇인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뱅트손 공작 전하는 칼마르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같이 보잘것없는 자조차도 두 분 백작 각하에 대한 호의적인 발언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모든 일을 판단하지 마시고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해 보시는 것은 어떨지. 가능하시다면 직접 방문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제넘지만 외신이 감히 조언 한마디를 보탰습니다.”

    윌리엄은 한껏 태도를 낮춘 캘로의 말에 흥미롭다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까지의 살벌한 기세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캘로는 윌리엄의 태도변화에 자신의 말이 먹혀들어 갔는가 싶어서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과연 윌리엄은 캘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같았다.

    “뱅트손 공작께서 스케티 공작을 상대로 자신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다지?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실수를 따지러 오는 사람이 반가울 상황은 아니지 않나? 나는 바쁜 사람에게 가서 쓸데없이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아. 그래도 상호 간에 오해가 있을 수가 있으니 경이 가서 제대로 알아보고 오해를 푸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고 싶지 않군. 오해가 깊어지면 쓸데없는 피가 흐르는 법이니까 말일세. 나는 내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이 싫어. 그리고.”

    윌리엄의 말이 끊어지자 캘로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속을 알 수 없는 차가운 눈이었다.

    부드러운 말과 태도?

    그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캘로는 자신의 기대가 어그러졌음을 느꼈다.

    윌리엄은 절대로 자신의 말에 설득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빌려서 사용하는 것을 싫어해. 그자가 듣도보도 못한 멀리 있는 놈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러니까 경은 열심히 뛰어야 할 거야.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 손에 죽는 것은 피했다고 해도 무능한 자로 낙인이 찍혀서 산골 구석으로 쫓겨나는 정치적인 죽음까지 피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경에게 선물을 하나 주지. 만약 경이 괜찮은 제안을 가져온다면 칼마르에서 뱅트손 공작을 방문하는 것도 고려해 보겠네.”

    캘로는 윌리엄이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고 자신을 별일 없이 돌려보내는 것도 호의가 아님을 이해했다.

    윌리엄의 입장에서는 칼마르에 칼을 들이민 자들에게 골칫덩이를 하나 던지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캘로는 호의가 되었든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있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고, 거기다 공수표나 다름 없기는 하지만 방문의 여지를 남기는 답변도 받았다는 것이다.

    캘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퇴장했다.

    *

    “윌리엄. 설마 뱅트손에게 방문할 것은 아니지요?”

    캘로가 나가자마자 리네아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방문의 여지를 남기는 말을 했기 때문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뱅트손에게 갈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리네아. 내가 뱅트손에게 갈 때는 안전이 담보된 후이어야 합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입니다.”

    뱅트손은 왠지 대하기가 꺼림칙한 자였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선제후들은 대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들이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거부감이 느껴지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뱅트손은 달랐다.

    황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본 것이 다였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뱅트손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사람이 가지는 선입견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쌓아온 경험을 통한 자동반응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간혹 선입견을 뛰어넘어서, 한순간에 진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우리가 흔히 감이 좋다고 말할 때의 감도 그런 통찰력의 일종이다.

    나는 절대로 내 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쌓아온 경험도 적지 않은 데다가 지금까지 내 감이 틀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좋은 꼴 볼 것이 없다고 말이다.

    “다행이군요. 캘로인가 하는 자에게 방문할 것처럼 이야기해서 걱정했어요.”

    “그자가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의 성과는 가지고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리고 정말 괜찮은 제안을 가져온다면 방문하는 것도 한 방법으로 고려해 봐야지요.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뱅트손 쪽에서도 측근들간의 암투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상대를 모함하거나 성과를 빼앗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실패하라고 떠미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뱅트손은 자신의 부하들이 이렇게 병신 짓을 저지르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상당히 능력있어 보이는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주변 관리가 안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리네아는 뱅트손의 영지 사정은 더 심각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뱅트손은 매우 독선적이라는 말이 있어요. 뱅트손의 결정에 반론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해요. 심지어 기분에 따라 측근이 등용되거나 좌천되는 경우도 제법 있다는 말이 있어요.”

    칼마르의 첩보망을 생각해 볼 때 과장은 있을지언정 거짓은 아니라고 봐야한다.

    직업관료제가 정착된 세상이 아니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일반적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믿기 어려운데요. 사실상 일국의 왕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그렇게 일관성없이 행동한다면 통치가 엉망이 될 겁니다.”

    “의외로 별문제는 없다고 해요. 공작령의 일상적인 통치는 다른 사람이 하니까요. 뱅트손은 군사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고, 외부로 돌아다니느라고 막상 공작성에 머무르는 시간도 짧았다고 하니 그가 변덕을 부려도 막상 큰 영향은 없었을 거예요.”

    설마 그럴 리가.

    공작의 한마디에 개인뿐 아니라 가문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큰 영향이 없을 리가 있나.

    주변에 있는 유능한 측근들이 잘 커버해 준 거겠지.

    리네아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심기를 얼마나 살피는지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통치자로 태어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생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성품이 유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문제점이 두드러지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꽤나 괜찮은 통치자에 속한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저도 거래처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뱅트손 공작은 자신의 오래된 측근에게 통치를 맡기고 돌아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물자가 제 때 나오기만 하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기 때문에 모시기에는 오히려 더 낫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백작의 측근으로 신분 상승을 한 구들리였다.

    부시장이었던 그는 시장이었던 멜러가 몰락하자 곧장 시장이 되었다.

    그 역시 상단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외부의 사정에 밝았다.

    “그렇다면 만약 필요한 물자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듣기로는 목을 자른다고 하던데, 설마 실제로 목을 자르는 것은 아닐테고 직위에서 잘리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겠지요.”

    “한 번 실수로 직위에서 물러난다니······ 정말 법이 엄한 모양이군요.”

    다들 뱅트손의 엄격한 법집행에 대해 놀라고 있을 때 마스터 요한이 보낸 전령이 나를 찾아왔다.

    마스터 요한은 리네아의 개인실에서 발견한 원통형 나무토막의 출처를 찾기 위해 조사 중이었다.

    그는 청소를 맡았던 하녀와 소모품의 구입을 담당했던 시종을 고문한 끝에 공통점을 찾았다면서 기사들을 데리고 나간지 벌써 며칠이 지난 참이었다.

    나는 리네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장 전령의 안내에 따라 시 외곽으로 향했다.

    시 외곽으로 나가게 되면 크고 작은 농장이 산재해 있다.

    대부분은 시에서 소모하는 야채나 과일을 재배하는 농장이다.

    마스터 요한이 가 있는 농장 역시 그런 농장 중의 하나였다.

    내가 농장에 들어섰을 때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얼굴을 찡그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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