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39화 (139/248)

139. 암살 미수

마지막 사람들이 야만족 전사들의 공격에 밀려나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지하통로로 후퇴해 들어왔다.

어쩌면 연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정신없이 밀려나고 있었으니까.

야만족 전사들도 후퇴하는 사람들을 쫓아 지하통로로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막다른 곳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사기가 한껏 올라서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야만족 전사들의 그런 모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지하통로의 관리자들은 가장 마지막에 물러서고 있던 우리 편이 미리 정해놓은 기준선 너머까지 물러선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레버를 당기고 버팀목에 도끼질을 했다.

그 결과 왕궁의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물 몇 개가 제 위치를 잃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연쇄반응으로 지붕이 무너지고, 벽이 넘어갔다.

붕괴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자칫하다가는 지하통로까지 붕괴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큰 흔들림이 지하통로를 위협했다.

덕분에 지하통로의 일부가 무너져서 입구부터 안쪽까지 10여 미터 정도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이것은 야만족 전사들에게 재앙이 되어버렸다.

기세를 올리며 지하통로로 들어왔던 야만족 전사들의 대부분이 무너지는 바위와 흙에 깔려 버린 것이다.

운이 좋게 낙석을 피한 야만족 전사도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펠트리아 기사의 칼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하로 쫓아 들어온 야만족 전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의 복수심이 아주 조금 충족된 모양이었다.

이제 스스로를 돌보게 된 사람들은 탈출에 집중했다.

지하통로는 일직선의 단순한 구조였다.

앞사람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금방 출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출구는 왕궁 외곽의 분수대 옆에 있는 작은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느낌상 왕궁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역시 출구에서 나와서 보니 왕궁의 입구가 보일 정도였다.

탈출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곳곳에서 야만족이 튀어나왔지만 조직적인 추적은 없었다.

약한 자는 진작에 다 죽어버리고 정예병만 남은 펠트리아의 병사들에게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야만족 전사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적들은 이상할 정도로 중구난방이었다.

그냥 이곳에 자유롭게 풀어놓고 너희 멋대로 싸우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것 같았다.

탈출을 막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윌리엄의 부하 용병들은 탈출 속도를 높였다.

낙오자가 생기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빠른 행군속도였다.

해변의 상륙지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해변의 상륙지를 지키고 있던 용병들은 펠트리아의 왕족들부터 배로 옮겨 태웠다.

그것으로 칼마르와 다리클리프가 원했던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했다.

적어도 전투를 포기했다는 소리를 들을 일은 없어진 것이다.

칼마르의 전투함은 해변에 남아있던 나머지 일행까지 모두 철수하자 신호탄을 쏘아올린 후 펠트리아를 떠나기 위해 곧장 뱃머리를 돌렸다.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행동이었다.

*

“인원점검은 끝났나? 설마 펠트리아에 남겨놓고 온 자는 없겠지?”

“숨결만 붙어있었으면 중상자까지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일단 낙오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전사자의 시체를 챙기지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만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펠트리아 쪽은 낙오병의 유무가 확실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왕족들만 다 확보했으면 돼.”

보고를 위해 왔던 안처트 용병대장은 내 차가운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물러났다.

왕족만 확보하면 그만이라니.

펠트리아 쪽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장소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고생한 우리쪽 사람들에게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펠트리아 쪽 사람들이 없는데다가 우리 쪽 사람인 안처트 용병대장도 내 태도를 이해해 주었다.

지금 내 기분은 너무 저기압이었다.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칼마르 쪽은 운이 좋아서 큰 피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다리클리프 쪽은 절반에 달하는 배를 잃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기함마저 침몰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총사령관인 래그니슨은 실종됐다.

말이 실종이지 전사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죽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갑옷을 입은 자가 바다에 빠졌는데 살아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칼마르가 펠트리아의 왕족들을 구출해내는 동안 프리시오 공작의 해군을 견제하며 시간을 벌어야 했던 다리클리프의 전투함들은 견제가 아니라 아예 전투에 휘말려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력의 절반이 날아가는 패배였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바람이 너무 이상하게 불어서 제대로 배를 조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노를 젓는 정도로는 바람을 거스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배는 날지 못하는 새와 같다.

날지 못하는 새가 죽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리클리프의 용병 함대는 프리시오 공작의 해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바다의 날씨에게 패한 것이다.

그래도 봐줄 만한 부분이 있다면 펠트리아와 포를라의 전투함을 어느 정도 살려서 데리고 후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리클리프의 전투함이 바다속에 처박히는 동안 대신 목숨을 구한 셈이다.

이번 패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두고 봐야 했다.

과연 우리의 예상대로 프리시오 공작에게 대항하는 연합군이 결성될 것인지 아니면 프리시오 공작을 주인님으로 모시게 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것은 프리시오 공작의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승승장구하면서 세력을 불리면 그를 적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상교역망을 구성하는 세력 중에서 프리시오 공작을 맹주로 모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이 다른 공작들과의 전투에서 약세를 보인다면, 아니, 비등비등한 모습만 보여도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며 프리시오 공작에게 저항하는 자들이 속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예상대로 연합군이 결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예상하지 않기로 했다.

중간에 무슨 변수가 어떻게 생길 줄 알고.

그러나 그 변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칼마르에게 생길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변수는 내 운명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

살아남은 함대를 데리고 포를라에 입항하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칼마르 시의 고급 여관 주인이자 객주인 마틴이었다.

내가 칼마르에 정착하는 첫 발걸음을 제대로 딛게 해준 자였다.

마틴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다.

그는 백작의 자문위원인 린트스톰을 뒷배로 두고 있고, 리네아조차 이름을 알 정도로 나름 지명도가 있는 상인이었다.

“마틴. 이런 곳까지 어쩐 일입니까? 포를라에도 여관을 세울 계획인가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기에 너무 반가워서 다가갔지만 마틴의 얼굴은 반쯤 죽은 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파산을 당해서 자신의 사업체를 모두 날려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노점부터 다시 차릴 것 같은 강단있는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도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윌리엄 님. 윌리엄 님께만 전달할 소식이 있습니다. 자문위원이신 린드스톰 경이 저를 보냈습니다.”

뭔가 대형 사고가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나는 즉시 그를 데리고 선실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안처트에게 명령해서 고참 용병들로 하여금 선실 주위를 지키도록 했다.

“자. 이제 우리 둘뿐입니다. 용병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와서 엿들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해 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마틴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리네아 여백작께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현재 의식불명이십니다.”

뭐!

뭐라고?

처음에는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의 마틴을 보고 있자니 내가 들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영혼 저 깊숙한 곳에서 불이 올라와서 머리를 통해 치솟는 것 같았다.

세상이 붉게 보였다.

모든 것을 죽이고 싶어졌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내 앞의 탁자를 움켜쥐었다.

탁자는 내 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내 손아귀에 잡힌 나무는 시커멓게 변색되며 연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봐.”

이를 악물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내 귀에서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멀리서 웅웅 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마틴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가쁘게 쉬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살기를. 제발.”

그의 말을 듣고 내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여전히 세상이 붉게 보였지만, 적어도 생각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내 노력에 따라 마틴의 안색도 조금 돌아왔다.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가슴을 움켜쥐지는 않았다.

그를 난도질하던 살기가 사라진 것이다.

“아직 살아계십니다. 의식을 아직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아직 살아 계십니다.”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필사적인 마틴의 말에 나는 간신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되었다.

“범인은 찾았나?”

“누군지 모릅니다. 단지, 마을을 없앤 것에 대한 복수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아크후!

그놈들이다.

다 죽은 것이 아니었나?

아니지.

외부에서 활동하던 자들은 남아있었겠지.

그런데 왜 리네아를?

어떻게 알고?

“그리고 윌리엄 님도 죽이겠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마을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내 얼굴을 아는 자가.

미니맵 이 불량품이!

“나를 죽이겠다고 했으니 내게도 오겠군.”

나는 그제서야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인을 알고 그 자가 내게도 온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틴. 또 무슨 일이 있는 거지요? 리네아에 대한 것 말고 말입니다.”

마틴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백작님에서 그냥 님으로.

이것은 내 지위에 대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리네아 여백작님께서 쓰러지시자마자 시의회에서 윌리엄 님의 지위에 대해 유권 해석을 내리고 백작위를 박탈했습니다.”

아하!

공범이 있었군.

외부와 손잡은 자들이.

그렇다면 사라 남작 부인이나 마스터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영지군은?

시의회가 저렇게 날뛰는데?

“다른 자들. 리네아의 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지금 뭐합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지금 모두 리네아 여백작 님 곁에 있습니다. 린드스톰 경은 즉시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귀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숙청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칼마르에 손을 뻗었던 자가 대단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칼마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핏빛 미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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