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에어베드, 원수를 발견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펠트리아 쪽에서 제공했다.
“나는 왕궁 경비대장이오. 다리클리프의 기사들이시오?”
야만족 전사들을 밀어내고 펠트리아의 남은 자들과 연계되자마자 그들을 지휘하던 자가 내게 왔다.
피로 된 폭우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칼부터 신발까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자였다.
그가 지금까지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한눈에 이해가 될 정도였다.
“칼마르에서 왔소. 다리클리프는 바다에서 당신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고 있소.”
내 말에 그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단번에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금방 실망으로 물들었다.
“당신들이 왔어도 패한 전투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었던 모양이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왕족 몇 명을 탈출시켜서 펠트리아의 명분이나마 남겨주려고 왔다고 말하기에는 이들이 치른 희생이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을 달래서 데리고 가야 했다.
포를라에서 깃발을 올릴 연합군에 펠트리아의 깃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명분상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전투에서는 패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펠트리아가 멸망할 일은 없을 거요. 사람이 남아있으면 언제든 다시 재건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정통성이지. 우리는 펠트리아의 왕족분을 모시고 가기 위해 왔소.”
내 말에 좀 더 안쪽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반응이 있었다.
젊은 기사 한 명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갑옷 역시 피로 젖어있는 것을 보니 보호를 받으며 편하게 여기까지 온 사람은 아니었다.
“펠트리아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요?”
흥분한 그는 내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설명이나 설득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짧은 사이에도 야만족 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왕궁 밖으로 다시 나가는 것도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소. 그리고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다시 배에 타는 것도 힘들어질 거요.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움직일 것을 권하고 싶소.”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어떻게!”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젊은 기사는 내 말에 승복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흥분해서 고함을 치며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이해할 수 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니 그의 감정적인 태도가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이고,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좀 더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뭐하는 거냐? 오르게인. 도움을 주러 온 분들에게 너무 무례하다!”
그를 꾸짖은 자는 중년의 기사였다.
풍기는 분위기를 보니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이 익숙한 자였다.
이 사람들, 역시 왕족들이었나?
“내 아들의 무례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오. 나는 이곳 펠트리아의 왕인 브르지슨이오. 그대가 하는 말을 들었소. 그대들이 온 이유가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서라고 한 거요?”
“칼마르의 백작인 윌리엄입니다. 그렇습니다. 국왕 전하. 탈출을 위해 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왕궁의 입구는 멀지 않습니다. 야만족의 숫자가 늘어난 것 같기는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왕궁 내부에 남아있으면 계속 몰려오는 야만족 전사들의 숫자에 밀려서 흩어진 채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다며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곳에서 계속 싸우기를 원한다면 펠트리아의 왕족을 탈출시키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우리끼리 철수하겠다는 경고를 했다.
내 말에 브르지슨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곳에 있는 사람 전원이 승선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배의 정원이 100명이라고 해도 100명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편을 감수한다면 몇백 명이라도 태울 수 있다.
내가 그의 조건에 동의하자 그제서야 펠트리아의 왕은 자신들이 왜 왕궁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왕궁 내부로 들어왔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곳은 함정이오. 몇 군데만 부수면 천장이 무너져 내리지. 우리는 지하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계획이었소.”
잠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더 늦게 왔으면 이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왔다가 야만족의 전사들과 함께 돌무덤을 쓸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어지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왕궁의 입구에 남겨놓은 용병들에게 즉시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야만족의 전사들이 통로를 막아버려서 전령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호루라기와 피리로 충분히 명령전달이 가능했다
왕궁의 입구가 가까웠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시 길을 뚫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상황이 정리가 되자 이제는 원활한 탈출이 문제가 되었다.
누군가가 먼저 탈출을 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지하통로의 입구를 지켜야 했다.
야만족과 싸우면서 지하통로를 지켜야 하는 임무는 매우 위험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서라도 명예와 평판이 절실히 필요했던 펠트리아측 사람들은 기꺼이 그 위험한 임무를 자원했다.
오르게인 왕자와 왕궁 경비대장이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가장 나중에 탈출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위험을 좀 줄여주려면 야만족 전사들의 기세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하통로로 떠나기 전에 잠깐 야만족 전사들 사이로 뛰어들어서 좀 튄다 싶은 자들을 처리했다.
*
조금 전까지도 에어베드는 주술의 축복을 받은 안닐룬드르의 전사들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펠트리아의 정예병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부에 걸맞은 좋은 갑옷과 무기를 가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갑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야만족 전사들에게 밀리고 밀린 끝에 왕궁으로 후퇴해야 했다.
창으로 몸통을 찌르고, 칼로 베어도 야만족의 전사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라붙었다.
심지어 머리가 깨져서 뇌수를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움직이며 무기를 휘두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야만족을 상대로 거의 비슷한 비율로 죽어나간 펠트리아의 병사들은 왕궁 내로 밀린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버티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밀고밀리면서 계속 사람을 갈아넣는 혼란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어베드는 낙관할 수 있었다.
시간 문제일 뿐 자신들이 이기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있던 안닐룬드르의 전사장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래서 전투에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은 야만족 전사들이 궁전 곳곳으로 퍼져서 약탈과 파괴를 즐기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병력은 충분했고, 그것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방심은 패배를 부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 이긴 전투가 뒤집어져 버렸다.
어디선가 칼마르의 용병들이 난입해 온 것이다.
숫자는 얼마 안 되지만 하나같이 정예였고, 난전에 능숙한 자들이었다.
보통의 병사보다 몇 배는 더 유용하다고 생각해왔던 야만족 전사들조차 어이가 없을 정도로 썰려 나갔다.
펠트리아의 병사들과 달리 분명히 이런 종류의 적을 상대해본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 중 하나는 남달리 두드러진 실력을 선보였다.
검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한걸음에 한 명씩 야만족 전사를 죽여댔다.
그가 지나가는 대로 그냥 길이 생길 정도였다.
시체와 피로 이루어진 길이 말이다.
결국 펠트리아의 생존자들과 칼마르의 용병들이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사이에 에어베드는 흩어져있던 야만족 전사들을 불러모으고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쇠뇌수도 끌고 왔다.
숫자로 적을 밀어붙이고, 튀는 자들은 쇠뇌로 저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야만족 전사들이 숫자까지 불어나자 펠트리아의 정예병이든 칼마르의 용병이든 감당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칼에 찔려도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두 명, 세 명씩 한꺼번에 달려드니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력자를 향한 저격은 실패였다.
처음부터 노리던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자신을 노리는 쇠뇌살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오히려 반격을 해서 쇠뇌수 뿐 아니라 대기하고 있던 안닐룬드르의 전사장들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나름대로 전투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에어베드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처음에 든 감정은 공포였고, 다음에는 경이였다.
에어베드는 저 자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만약 자신이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배울 수 있다면.
그러면 부족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그리고 에어베드는 금방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적들 사이에서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느낀 순간 한쪽 벽이 열리고 살아남은 적들이 벽에 생긴 통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펠트리아의 국왕이 그 선두였다.
그리고 도망치는 자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듯, 진형을 이루어 야만족 전사들과 대치하던 병사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특히, 검은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는 진형에서 튀어나와 주변의 야만족 전사들의 목을 연달아 잘라냈다.
“안닐룬드르 전사들의 아버지 보르소다! 너는 누구냐!”
뒤늦게 합류한 안닐룬드르의 전사장 하나가 검은 갑옷의 기사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일반 전사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실력을 생각하지도 않고 일단 달려든 것이다.
“나는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이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안닐룬드르의 전사장에게 칼을 뻗었다.
에어베드는 자신의 머리에 벼락이라도 친 것 같았다.
지금까지 홀린 눈으로 바라보던 상대가 누구라고?
칼마르의 윌리엄?
내가 죽여야 할 자?
에어베드의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지금까지 이름만 알고 있던 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한 손을 보태고 싶은데 온몸이 굳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죽어나간 야만족 전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야만족 전사들은 토막쳐진다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며 고기덩어리로 변해버렸다.
피구덩이에 널부러진 야만족 전사들의 시체는 푸주간에 널린 소나 돼지와 별로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었다.
야만족 전사장은 프리시오 공작의 기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실력자라고들 했다.
그럼 지금 저기서 팔이 날아가고 무릎이 잘려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조금 전에 동시에 죽어나가던 자들은 또 누구였을까?
한바탕 날뛴 윌리엄이 벽에 생긴 통로로 들어가고 나서야 에어베드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처음의 계획처럼 야만족의 전사들과 함께 윌리엄을 향해 공격한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목격한 후 잠시 생각이 멈췄던 에어베드는 무엇인가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자신의 옆에 떨어지는 석재를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에어베드는 암울한 눈빛으로 왕궁의 높다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