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37화 (137/248)

137. 펠트리아 공방전 4

전투가 있기 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전의를 고취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전투가 있기 전날에 병사들을 잘 먹이고 잘 쉬게 하는 것은 기본이다.

전공에 따른 상금을 약속하고, 신분의 상승을 공언한다.

심지어 증오를 전투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라 뭔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여자의 속옷을 가져다가 성벽에 걸어놓는 짓을 하면서 음으로 양을 억눌렀으니 포격에서 안전할 것이라며 아군을 안심시킨다든지, 주문을 외면 총알도 튕겨내고 적이 스스로 붕괴해서 도망친다는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역사에서는 종종 보인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는 대차게 말아먹는다.

전투는 합리와 광기로 전개되는 것이지, 헛된 기대로 결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지구가 아니고 신비가 존재하는 땅이다.

나는 피를 얼굴에 바르며 주술을 행하는 것만으로 공포와 통증을 잊고 힘과 전투력이 두 배는 상승한다는 야만족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세 배가 아니고 아니고 두 배라니 짭이네’ 하고 웃어넘겼지만 팔이 잘려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달려드는 야만족 전사를 보니 그 소문이 그냥 뜬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만약 그 소문의 일부라도 진실이라면 곤란해진다.

우리 쪽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

전투를 많이 겪은 숙련된 용병일수록 전투 중에 상대의 반응을 쉽게 예상하고 그에 맞춰서 대응한다.

이 정도의 타격이면 상대가 죽을 것이다.

이 정도의 부상이면 전투 불능이다.

그러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로는 그것이 안 된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하게 움직이고, 심지어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반격까지하는 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당황해 버리면 경험을 많이 쌓은 용병쪽이 어이없게도 당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쩐지.

이제서야 아까 왕궁의 입구에 흩어져 있던 야만족의 시체가 유난히 훼손이 심했던 점이 이해됐다.

그리고 갑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은 야만족을 상대로 펠트리아의 수비병이 왜 이리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팔을 잘라도 달려드는 자들이니 평범한 병사들로는 무슨 괴물을 상대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무너져서 짓밟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펠트리아의 수비병은 칭찬받을만 했다.

나는 주변의 부하들에게 적의 상태에 대해 경고를 하며 왕궁 안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온통 야만족 전사들뿐이었다.

그들은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장식품과 인테리어를 파괴하며 날뛰고 있었다.

반쯤 미친 자들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왕궁 내부에서 죽은 자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숫자만 세어도 불과 3명이 다였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있겠지만 일단 보이는 숫자는 그게 전부였다.

게다가 그중에는 여자도 아이도 없었다.

이 정도의 희생으로 아직 대오를 유지한 채 물러서다니.

통증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야만족이 날뛰고 있는 현재 상태를 고려하면 굉장히 선방하며 물러선 것으로 보아야 했다.

약한 자는 궁전 밖에서 이미 죽었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만큼 더 정예병이라고 봐야겠다.

나는 왕궁 안으로 들어선 후 야만족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시간을 끌다가는 적에게 발목을 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해야 할 사람은 어서 구해서 왕궁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야만족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오기 전에 선제적으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방해가 된 야만족 전사는 통로의 옆에 서 있는 장식용 인물상을 깨부수느라고 전투 도끼를 휘두르던 자였다.

그는 나를 견제한답시고 나를 보자마자 전투 도끼를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위라도 부술 것처럼 강력한 기세로 날아온 전투도끼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빗나가 버렸다.

이것은 갑자기 강해진 전사의 오류같은 거였다.

평소와 다른 감각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의 전투도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무기를 잃고 맨손으로 달려드는 그는 손쉬운 상대였다.

갑자기 강해지고 통증도 느끼지 못하니까 두려움까지 없어졌던 모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 칼 든 사람에게 덤비는 것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자살과 비슷한 행동이다.

나는 그의 두 팔을 베어버리는 것으로 내 공격의 첫 번째 스텝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의 적은 바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야만족 전사였다.

그는 순식간에 날아가는 동료의 두 팔을 보면서도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고함소리였다.

싸우겠다는 의지는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바로 지척에 있는 적이 내 공격 범위 이내에 들어왔는데 내버려두고 내 갈길을 갈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리할 수 있는 적은 정리하고 가야 돌아갈 때 편하다.

두 팔이 잘린 적이 쓰러지기도 전에 한 걸음 더 앞으로 가면서 팔을 뻗었다.

고함을 지르던 적의 가슴은 내게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쭉 뻗은 내 팔과 칼의 길이의 합은 그의 가슴을 관통하기에 충분한 길이였다.

강제로 고함지르기를 멈추게 된 적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적은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대로 쓰러졌겠지만, 주술의 힘은 소문처럼 강력했다.

그가 가슴에 칼을 박은 채로 나를 잡겠다며 다가온 것이다.

시간을 끌기 싫은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의 머리를 잡고 살짝 비틀었다.

매번 느끼지만 목근육이나 목뼈는 그리 강한 조직이 아니다.

불쾌한 진동이 내 손에 느껴졌다.

내가 상대한 두 명의 야만인은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이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이 모든 것이 상당히 인상적인 퍼포먼스였던 모양이다.

산책하듯 걸어가서 둘을 해치운 것을 시작으로 야만족의 전사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불을 본 나방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몇 명을 상대해보니 견적이 확실히 나온다.

강해지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생각할 것 없겠다.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힘은 좀 강해져서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지만 싸움의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

통증과 쇼크를 참아내는 임계치가 높아서 처음 접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만 제외한다면 상대할만하다.

기세는 맹렬하지만 움직임이 정교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일반 병사라면 모를까 이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숙련된 용병이라면 대응이 가능하다는 한계도 가진다.

즉, 자신보다 약하거나 비슷한 자들을 상대로는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겉보기와 달리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만약 나 정도의 실력으로 상대하라면?

전에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내가 이긴다!

내가 지나가는 길 뒤로 시체의 길이 생겼다.

피로 만들어진 흐름이 복도를 따라 흘렀다.

펠트리아의 남은 사람들을 발견한 것은 복도를 두 번 꺾어서 이동한 후였다.

왕궁 내부를 울리는 전투의 소음 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펠트리아의 남은 사람들은 왕궁의 입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러 개의 방과 복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방어에 꽤나 유리한 구조를 이용해 버티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지 버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누가 먼저 무너질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바로 그때, 나와 나를 따라온 병사들이 이 혼란한 전투에 쏟아져 들어갔다.

“펠트리아의 형제들이여! 지원군이 왔다!”

“칼마르! 다리클리프!”

“밀어버려!”

아무리 실내 전투의 한계로 인해 시야가 제약이 된다고 해도 수십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난전에 뛰어드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가 어느 쪽 지원군인지 양쪽다 잠깐 혼란이 있었지만 우리가 야만족을 공격하는 순간 혼란은 가라앉았다.

대신 지금까지 슬슬 물러나던 펠트리아의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면서 야만족의 전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

여전히 부상을 입어도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야만인들이었지만 앞뒤로 포위되는 상황은 그들에게도 곤란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전투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빠져들었다고 해도 제 정신을 차리고 슬슬 물러서는 자들이 나올 정도였다.

바로 그 때였다.

머리가 쭈뼛하고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지하에서 거인과 싸울 때도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구르며 옆으로 이동했다.

그 행동이 나를 위험에서 구했다.

손가락만한 길이의 쇠뇌살이 방금까지도 내가 있던 자리를 연달아 꿰뚫고 지나갔다.

내가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나를 꿰뚫었을 쇠뇌살은 나 대신 야만족 하나와 우리 쪽 기사 하나를 쓰러뜨렸다.

곧장 일어선 나는 쇠뇌를 들고 있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쇠뇌수는 쇠뇌의 등자를 발로 밟고 다시 장전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단정하게 생긴 중늙은이 2명이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연달아 비도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중늙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쇠뇌수들을 향해 던진 비도는 제 역할을 해 주었다.

쇠뇌의 등자를 밟고 재장전하기 위해 쇠뇌줄을 당기던 두 명의 야만인 전사는 내가 던진 비도를 맞고 동시에 즉사했다.

그러나 두 명의 중늙은이를 향해 던진 비도는 낭비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이라도하듯 갑자기 날아온 비도를 동시에 쳐냈다 .

프리시오 공작을 위해 일하기로 한 야만족의 기사쯤 되는 자들일까?

나는 비도를 쳐낸 후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그들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손 쓸 사이도 없이 자신들 바로 앞에 있던 쇠뇌수를 잃은 두 명의 중늙은이가 제대로 분노를 터뜨리기도 전에 내 칼은 그들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내 칼이 가진 강맹한 기세는 주술로 강화된 야만족의 기세 못지 않다고 자부한다.

내 힘은 인간 중 최강이니까.

과연 내가 휘두르는 칼을 막아내려던 중늙은이의 칼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그러나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은 내 칼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잃은 동료를 대신해 나를 막아선 자의 칼과 부딪치는 순간 이번에는 내 칼이 깨져나갔다.

나는 손잡이만 남은 칼을 적을 향해 던지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한군데 맞으면 뼈가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손잡이는 적의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야만족의 중늙은이는 그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잃고 뒤로 물러서던 나머지 적을 향해 비도를 던지며 따라 붙었다.

과연 그는 야만족의 기사쯤은 되는지 내가 던지는 비도를 모조리 쳐냈다.

그러나 내 손이 적에게 닿게 되었을 때, 잡고 끌어안는 내손까지 쳐내지는 못했다.

나는 그를 끌어안고 허리에 찬 단검을 꺼내서 그의 등을 찔렀다.

역수로 잡은 단검이 그의 등을 찌를 때마다 발버둥치던 그의 움직임이 느려지다가 결국 멈췄다.

야만족들 중 눈에 띄는 자들을 처치했음에도 야만족 전사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심지어 숫자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거세한 채 날뛰고 있었다.

무엇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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