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펠트리아 공방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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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속도를 보충하기 위해 3일이나 교대로 노를 저어야 했다.
어제부터 바람이 정상이 되어서 노잡이꾼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취하도록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병사들의 피로가 다 풀린 것 같지 않았다.
병사들이야 익숙하지 않은 일을 했으니 근육통을 호소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곧 전투에 들어가야 할 입장에서는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엘리아슨은 투덜거리는 대신 용병대장들을 다독이며 전투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내게 직속으로 배당된 용병 백인대 하나를 5명의 기사와 함께 점검 중이었다.
“준비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따로 지적할 사항이 없을 정도인데? 용병 대장이 고생을 좀 했겠어.”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저희 안처트 용병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백작님을 따라간다고 해서 경력 1년 미만인 녀석들은 아예 배에 태우지도 않았습니다.”
“든든하군. 잘 부탁하네.”
안처트 용병대장은 노렌과 안면이 있는 자라서 출정 전에 노렌과 함께 인사를 오기도 했다.
노렌의 인물평에 의하면 호탕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진작에 파산했을 사람이라고 하던데, 가까이에서 겪어보니 왜 그런 인물평이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부하들을 형제처럼 대하는 상남자 스타일의 용병대장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의 부하들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몇 번 만나보니까 의리로 호소하면서 약한 티를 내면 이용해 먹기 딱 좋겠다는 견적이 설 정도로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호구에 가까웠다.
대신 그런 면이 매력적이어서 챙겨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덕분에 지금까지 용병대를 운영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 역시 업무관계로 엮인 사이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내 직할대로 부리는 중이었다.
돌격대장 역할을 하기로 한 내 뒤를 받쳐주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명령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고 달려드는 무모함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휘하 병사들의 점검을 다 끝냈다는 용병대장들의 보고를 받은 엘리아슨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백작 각하!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해안에 내릴 때 고생 좀 하겠습니다.”
“태풍이 불 시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바람이라니! 아무리 바다가 변덕이 심해도 이렇게 전조도 없이 거칠어지는 것은 드문 일 아닙니까?”
“저야 바다를 잘 모르지만, 선원들에 의하면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바람이 더 거세지지 않기만을 기도해야 하겠군요.”
바다에서의 전투라는 것이 언제나 이 모양이라서 문제다.
날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그나마 이 정도의 바람이니까 다행이지 본격적인 태풍에라도 휘말린다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이다.
문득 게스티 백작과의 전투가 기억났다.
나로서는 처음 겪는 해전이었고, 신비에 접한 자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던 전투이기도 했다.
······설마?
“적이 보입니다!”
견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해전이 벌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펠트리아의 중심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도 볼 수 있었다.
저절로 신음이 내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엘리아슨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패배한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나는 엘리아슨의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펠트리아와 포를라의 연합함대는 프리시오 공작의 함대에 밀려서 반포위된 채 차례로 점령당하고 있었다.
아마 애초부터 전투에 뛰어든 함선의 숫자가 열세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숫자의 열세가 너무 두드러져서 우리가 가담을 해도 과연 승패를 뒤엎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펠트리아의 왕궁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싸우는 와중에도 병력을 나누어서 별동대로 왕궁을 공격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화재가 난 곳이 한두 군데 아닌 것을 보면 그 공격은 성공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왕이 아직 살아있겠느냐는 불안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이 하루만 더 빨리 불었어도 ,
반나절만 더 일찍 우리가 왔어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다.
하늘이 펠트리아를 돕지 않은 것이다.
내가 펠트리아를 포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다리클리프측 기함에서 깃발 신호가 올라왔다.
기함으로 방문해 달라는 호출 신호였다.
나는 즉시 다리클리프의 기함으로 넘어갔다, .
기함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이번 원정의 총사령관인 래그니슨은 눈을 부라리며 부하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지금 당장 철수해야 한다는 쪽과 싸워야 한다는 쪽으로 갈려서 논쟁 중이었다.
래그니슨 총사령관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자신의 당혹감을 분노로 감추고 있었다.
“안 보입니까? 펠트리아의 왕궁에 불길이 솟았습니다! 끝장이 났다고요!”
“진화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저항 중 아닙니까? 게다가 해전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밀리고 있기는 하지만 패배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가담하면 됩니다. 밀어낼 수 있어요.”
비슷한 내용의 주장이 두 번 더 반복되었다.
내용은 이리저리 변주되었지만 핵심 주장은 다른 것이 없었다.
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펠트리아를 도와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래그니슨 총사령관은 두 가지 주장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확신이 필요했지만 전쟁터에서 확신은 구하기 어려운 자원이다.
아마 부패하지 않는 관리를 찾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일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고 소문도 있는데 막상 찾으면 없는, 그런 것 말이다.
결국 내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보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입씨름을 하는 동안 펠트리아의 전투함이 가라앉고 있는 모습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2척이나 침몰했습니다. 전멸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군요. 해전에서 숫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미 전투의 승패가 기울어진 지금, 우리 쪽 전투함을 다 끌고 가도 적보다 숫자가 적습니다. 패배가 확정된 전투는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저 사람들 다들 그냥 죽으라고 할까요?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저 사람들 대신 경이 죽어줄 겁니까?”
내가 주전론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주전론을 주장하던 장교 하나가 대놓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내가 정색을 하고 반박을 하자 금방 쭈그러들었다.
같이 싸워줄 의리는 있지만 대신 죽어줄 의리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이미 승패가 난 전투였군.”
그제서야 래그니슨은 결단을 내리고 후퇴를 결정했다.
그래도 조직의 운영상 주전파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펠트리아를 대놓고 버리는 것은 모양새가 나쁘다.
자칫 재수가 없으면 실각하는 것도 각오해야 할 판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면피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면피할만한 제안을 했다.
“승패는 났지만 사람은 좀 살려가야 합니다. 비엘리에서 왕족이 전멸을 하니까 불편한 점이 많더군요. 펠트리아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왕족, 되도록이면 계승권이 있는 왕족을 하나라도 살려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병력을 나누어 우리 쪽은 왕족의 탈출을 맡고 다리클리프는 왕족이 탈출할 때까지 적의 배를 막기로 했다.
나는 즉시 내 직속 용병대를 거느리고 해안에 상륙했다.
따로 선착장같은 시설이 없어서 일일이 작은 배로 전투함과 해안을 왕복해야 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아슨은 나와 내 직속 용병대가 출발한 후에도 계속 작은 배로 병력을 실어날라서 백인대 하나를 더 뒤따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해변에 교두보를 확보하기로 하고, 임시로나마 쓸 방어시설의 건설에 들어갔다.
왕궁이 어디 있는지 방향을 잡기는 쉬웠다.
연기가 솟아오르는 곳을 향해 달리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달려간 지 두 시간 만에 왕궁으로 가는 길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적 용병도 만날 수 있었고.
한 무리의 용병들이 우리가 왕궁으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았다.
아마 왕궁에서 도망치는 자들을 잡기 위해 길을 막으라고 남겨 놓은 병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왕궁 쪽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거쳐온 방향에서 처음 보는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나는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버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우리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그들을 향해 돌격을 선사해 주었다.
걷거나 뛰면서 화살을 쏘는 것은 제법 난이도가 있는 기술이다.
쏘는 것이야 활을 좀 쏘아보았다면 별 문제 없이 쏘지만 맞추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많은 수련이 필요한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안처트 용병대의 고참 용병 중 몇은 뛰면서도 화살을 쏘고 거기다 속사까지 할 수 있는 인재였다.
그들의 능력은 적과 코 앞에서 대면한 지금 빛을 발했다.
돌격해 들어가는 용병들 사이에서 연달아 화살이 발사됐다.
그리고 그 화살은 길을 막고 있던 용병들의 숫자를 한꺼번에 줄여버렸다.
뒤늦게 자신들과 마주한 낯선 용병집단이 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산토끼처럼 튀어 버렸다.
몇 배나 되는 숫자의 적과 화살을 맞고 한꺼번에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그만 패닉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쫓지 마! 우리 목표는 왕궁이다!”
도망치는 적을 따라가던 용병 몇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다.
적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왕족의 탈출이 우리의 목표였다.
적을 쫓아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은 곤란했다.
그러다가 혹시 낙오되기라도 한다면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곧 떠날 테니까.
빠르게 뛰어 올라간 우리는 머지않아서 펠트리아의 왕궁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미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왕궁의 입구는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야만족과 용병,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모두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러나 전투의 소음.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고함은 아직 끊이지 않았다.
아직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왕궁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반갑기까지 했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왕궁 내부로 뛰어들었다.
“백작님! 백작님! 같이 가셔야 합니다.!”
기겁한 경호 기사들이 내 뒤를 따라서 달려오고, 그 뒤를 용병들이 따라왔다.
야만족.
그러니까 제국이 위치한 대륙 말고, 남쪽 바다 건너에도 거대한 대륙이 있다.
그곳에 사는 자들을 통틀어서 야만족이라고 부른다.
프리시오 공작은 병력의 부족을 야만족으로 메꾸어 버린 모양이다.
왕궁 내에 들어서자마자 가죽 조끼 하나를 방어구랍시고 걸친 야만족 전사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별로 빠르지도 정교하지도 않았지만 기세만큼은 기사에게도 뒤지지 안을 정도로 위맹했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저돌적이었다.
나는 그를 살짝 피하며 내 칼을 그의 어깨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칼을 회전하며 어깨를 잘라버렸다.
팔 하나를 어깨부터 잃어버린 야만족 전사는 쇼크로 인해······
뭐 이런!
분명히 쇼크로 쓰러졌어야 할 야만족 전사가 멀쩡하게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한쪽 팔이 날아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아래배를 찔렀지만 마찬가지였다.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게 달라붙으려 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의 목을 일격에 날려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전투에서 튄 피를 닦아낸 것이 아니라 공들여서 피로 얼굴을 바른 것이다.
피로 얼굴을 칠하는 야만족이라니.
들어본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