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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35화 (135/248)

135. 펠트리아 공방전 2

거칠어진 바람을 등지고 돛을 한껏 부풀린 채 바다 위를 달려가는 전투함은 죽음을 부르는 재앙신을 닮았다.

잠시 후에 벌어질 살육을 기대하며 괴성을 지르는 야만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틀린 이미지도 아니었다.

말의 목을 치고, 심지어 몰래 끌고온 포로까지 죽여가면서 흐르는 피를 얼굴에 붉게 칠한 안닐룬드르의 전사들 중 몇은 그마저도 부족하다는 듯이 자해까지 하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전신이 피로 물들어서 한바탕 전투를 치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웃고 떠드는 야만족 전사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에어베드가 선두에 서서 돌격을 하고 있는 프리시오 공작의 별동대 함대는 10여 척에 불과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

그 중 전투함은 몇 척 없었지만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그들의 돌파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상선을 개조한 정찰선이 다가와서 활을 몇 방 쏘기는 했지만 바람을 탄 그들은 적을 상대도 하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별동대의 목표는 펠트리아의 항구에 있는 선착장이었다.

펠트리아 입장에서는 유감스러운 것은 제대로 된 전투함으로 가로막지 않는 이상 에어베드의 돌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펠트리아의 준비가 부족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적어도 비엘리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는 펠트리아도 전력을 다해서 전쟁을 대비해 왔다.

그러나 숫자의 부족이라는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시간의 부족이라는 한계는 그들이 가진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도록 하는 제약이었다.

펠트리아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자마자 싸울 수 있는 남자는 나이와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끌어내서 무기를 쥐여줬다.

동시에 항구를 요새로 만들고, 상선을 전투함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전투함을 준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바다에서 막지 못하면 패배한다는 것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대를 잃고 고립된 섬나라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펠트리아는 원하는만큼 전투함을 보충하지는 못했다.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배라면 상태와 가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들이고, 상선을 전투함으로 개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전투함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했다.

배라는 것은 필요하다고 해서 갑자기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전투함은 더욱 그렇다.

펠트리아는 오랜 중계 무역과 그 과정에서 겪은 해전의 경험으로 인해 전투함의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전투함의 숫자가 많은 쪽이 무조건 이긴다.

전투함이 많을수록, 피해가 적어지고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다.

항해사 정도만 되어도 상식처럼 알게 되는 경험칙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원군을 간절하게 원했다.

펠트리아가 준비한 전투함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은 지금, 만약 다리클리프와 칼마르 연합군의 지원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면 펠트리아가 이기고 지는 문제는 펠트리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프리시오 공작군이 얼마나 많은 전투함을 끌고 오는가에 달린 문제가 된다.

펠트리아에서 전쟁 경험이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숫자의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펠트리아의 전투함은 한데 뭉쳐서 프리시오 공작군의 전투함과 맞서는 중이었고, 그 결과가 해상 방어선의 공백이었다.

그래서 싸울 수 있는 남자라면 예외 없이 모두 동원했다는 펠트리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에어베드를 선두로 한 함대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투석기다! 불이 날아온다!!”

“더 빨리 노를 저어! 가서 그냥 박아버릴 테니까!!”

견시가 경고를 하자마자 선장은 노잡이꾼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선장의 명령에 따라 북잡이의 북소리가 빨라지고, 빨라진 북소리에 맞추어 노잡이꾼들이 악을 쓰며 노를 저었다.

거친 바람을 타고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파도를 가로지르던 전투함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술을 마시고 선수에서 춤을 추던 야만족 중에는 빨라진 만큼 요동치는 전투함의 움직임에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지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

항구가 멀리 보이는 순간 불덩이가 전투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돌덩이를 타르에 적신 후 톱밥으로 감싸서 만든 화공용 돌탄환이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갑판은 깨지고 돛은 불에 타겠지만, 날씨가 이래서야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아무리 투석기가 정밀한 투척이 가능한 무기라서 탄착점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다지만, 이렇게 바람이 강하고 상대방은 빠르게 움직이는 환경에서는 운이 좋기를 기도하며 발사할 뿐이었다.

과연 기도 덕분인지 돌탄환 하나가 돛을 정통으로 직격했다.

돛을 불덩어리에 맞아 손상당한 전투함은 속도가 확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쏘아대는 투석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10여 척에 달하는 함선 중 희생자는 돛을 상한 단 한척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선착장으로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펠트리아의 항구에는 상대방의 전투함이 함부로 선착장에 접안하지 못하게 하려고, 긴 장대와 쇠사슬을 설치해 놓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친 바람을 뒤에 업고 무식하게 함선째 그대로 밀고 들어오자 장대든 쇠사슬이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나갔다.

심지어 충돌의 충격에 선착장의 일부가 박살나기도 했다.

덕분에 두 척의 배가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용골이 뒤틀려서 침수가 되었지만, 금방 가라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면 되었다.

전투병을 내려놓은 시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돌아갈 때는 숫자가 적어도 반 이하로 줄어 있을 테니까.

충돌의 충격을 못 이기고 비틀거리던 에어베드는 곧 정신을 차리고 상륙하라는 고함을 질렀다.

그의 옆에 있던 기수가 명령에 맞추어 깃발을 흔들었다.

“내려! 적을 쳐라!”

그러나 어쩌면 명령은 그냥 형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령이 내리기도 전에 선착장으로 뛰어내린 야만족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펠트리아군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착장에서 투석기를 조작하고 있던 병사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다.

전투함이 선착장으로 직접 밀고 들어오는 황당한 사태에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당혹감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밀려오는 야만족과 섞여 버렸다.

그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운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방에서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투석기를 조작하던 병사들은 얼마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죽어갔다.

그러나 항구에 있던 모든 펠트리아군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마차와 바리게이트로 만든 임시 방어거점이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 배치된 펠트리아의 병사들은 활과 쇠뇌를 쏘며 저항했다.

제대로된 공성병기도 없이 맨몸으로 날뛰는 야만족 전사들에게는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야만족의 뒤를 따라 몰려온 용병대에 의해 방어거점은 하나하나 공략당했다.

심지어 투석기를 확보한 용병대에서 방어거점을 향해 돌덩이를 날리기도 했다.

야만족 전사들은 익숙하지 않은 공성전은 뒤를 따라온 용병들에게 맡기고 궁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펠트리아의 왕궁 옆에 세워진 전망탑에 올라가면 항구와 그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평소에는 항구의 입출입을 관찰하기 위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전투 현장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전망탑에 올라가 있는 펠트리아의 왕세자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해상백병전을 보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비엘리를 하루 만에 멸망시킨 자들이라고 해서 과연 우리 쪽이 버틸 수나 있을까 걱정했는데 약간 밀리는 감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옆에 있던 숙부는 점점 얼굴색이 어두워져갔다.

“왜 그러십니까? 숙부님. 아직은 우리 함대가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쪽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숙부의 말에 왕세자는 다시 바다를 살펴보았다.

과연 숙부의 우려를 들어서 그런지 전투의 양상이 점점 불리하게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점점 거세지는 바람도 문제였다.

일부 전투함이 노잡이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람에 밀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척 한 척이 소중한 펠트리아의 입장에서 전열에서 잠시라도 탈락하는 전투함이 너무도 아쉬웠다.

왕세자가 지금 전망대에 올라와 있는 이유는 적을 조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리클리프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작에 도착했어야 했을 다리클리프의 지원군은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국왕은 다리클리프의 지원이 제시간에 도착하리라는 기대를 이미 포기한 모양이지만 왕세자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다리클리프의 사람들은 계약을 하면 반드시 지켰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겨서 늦어지고 뿐 분명히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할 때에 늦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점점 밀려나는 펠트리아의 전선을 보면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던 왕세자를 향해 그의 숙부가 갑자기 자신을 불렀다.

“왕자님. 저쪽을!”

다급하게 외치는 숙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질주하는 10여척의 적선이 있었다.

뒤로 빠져 있던 프리시오 백작의 함선 10여 척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적들은 항구를 목적으로 했는지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일직선으로 몰려왔다.

그들을 막는 펠트리아의 함선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항구로 배를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선착장에 자신들의 배를 들이박았다.

그 파격적인 모습에 잠깐 얼이 빠졌던 그들은 전투함에서 항구로 몰려나오는 프리시오 공작군의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전망대에서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내려가서 적과 싸워야 했다.

*

펠트리아의 국왕은 아직 자신이 한 사람의 기사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경호 기사와 왕궁의 경비병들도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궁 입구에 나와서 병사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왕답게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다.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했지만 딱 부러지는 답변을 가져온 곳은 다리클리프와 포를라 뿐이었다.

다른 곳은 이게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돕지 않겠다는 것인지 애매한 소리만 해댔다.

그 속셈을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중계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해왔던 3개의 섬나라가 무너질 것 같으니 어떤 입장을 취해야 이익이 될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아마 그들 중에는 3개의 섬나라 대신 자신이 교역망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진지하게 주판을 튕기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펠트리아까지 함락당하고 남부의 해상교역망이 붕괴하면 다들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지금까지는 규모도 작은 섬나라가 중개 무역에서 쏠쏠하게 얻는 이익에 대해 배가 아프고 질투가 났겠지만, 앞으로는 착취에 가까운 권력의 횡포 아래에서 배가 고플 테니까.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기 싫은 자라면 프리시오 공작이 남부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는 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문제는 그러한 결정이 너무 늦게 내려질 것 같다는 점이다.

“적이 상륙했습니다!”

전망대에 올라갔던 왕세자와 동생이 달려오며 외쳤다.

그리고 정찰을 나갔던 기사 역시 복귀하며 적이 왕궁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싸워야 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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