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장. 펠트리아 공방전 1
지각이라니!
돛을 사용하는 배로 이동하는 중이니 예정보다 늦어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바람이 약하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바다를 걸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것은 우리끼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지원을 기다리는 처지에서는 애가 타는 상황이겠다.
게다가 우리 중에서도 병력 이동이 늦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많다.
군인으로서는 지극히 정상이고 건전한 사고방식이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미리 가서 전투 준비를 해도 부족한 것투성이일텐데. 예정보다 늦어지다니······”
돌격대장 역할을 하는 나 대신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엘리아슨은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난히 책임감이 강한 그로서는 병력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에 버금가는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본 적이 없는 우리쪽 입장에서 1만이 넘는 병력이 어우러진 전투를 치러 본 엘리아슨은 중요한 인재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땅에서건 바다에서건 무조건 그가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엘리아슨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정찰과 보급에 대해서만큼은 강박적일 정도로 하나하나 챙겼다.
뛰어난 전략으로 적을 압도할 자신이 없으니 기본을 잘 챙겨서 적을 이기겠다는 것이 그가 적을 대하는 기본자세였다.
나 역시 그것이 정석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변수가 발생하면 그가 지는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는 노를 젓는 인원을 늘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군인이 아닌 칼마르의 백작이라는 정치가의 관점에서 그의 불안을 덜어줄 필요가 있었다.
“설사 우리가 늦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백작 각하.”
“너무 대충 말했군요. 물론 펠트리아 쪽은 문제가 됩니다. 그쪽에서야 한 척이라도 전선이 더 있는 것이 도움이 되니 어서 우리가 도착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좀 늦어도 우리 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펠트리아가 무너져도 포를라가 있고, 그 정도까지 밀리면 관망하던 주변 왕국에서도 지원군이 올 겁니다.”
“3개의 섬나라 중 2개가 멸망했는데도 지원이 올 수 있겠습니까?”
엘리아슨의 질문은 그 정도로 밀리면 전쟁의 결말은 결정된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남부의 해상 교역망은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린 후였다.
제국 남부의 해상 교역망의 실세는 3개의 섬나라가 아니라 주변 왕국들임이 분명했다.
“3개의 섬은 너무 규모가 작습니다. 결국 중계무역의 거점에 불과하지요. 없어지면 다시 세우거나 위치를 옮기면 그만입니다. 잠시 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체할 수 없는 곳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진짜는 주변의 왕국들입니다. 제국 남부의 해상교역망은 제국과 주변 왕국이 무역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지금까지 3개의 섬나라가 지리적인 이점을 업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계무역을 해왔는데, 이것을 프리시오 공작이 장악하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주변 왕국들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시도입니다. 찬반이 있겠지만 결국은 반격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입장에서는 지금보다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겠지요.”
칼마르에서 고용해서 파견한 용병부대가 1천 명.
다리클리프에서 기존의 계약을 깨면서까지 끌어모은 병력이 4천이었다.
이 정도의 군세라면 동부 해상 교역망 세력에서 외부로 파견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모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펠트리아의 지원요청을 받고 충분히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펠트리아의 지원요청을 받고 즉각 반응한 곳이 포를라와 다리클리프 정도라는 것이다.
남부의 해상교역망에 엮여 있는 왕국들의 반응은 굼뜨기만 했다.
자신들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위험이 코앞에 닥치지 않았으니 주변의 상황을 살피며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작은 섬나라 2개와 동부의 지원군만으로 프리시오 공작의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했다.
솔직히 승패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기든 지든 큰 피해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큰 피해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칼마르의 이익도 생각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도 꺼내들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꼭’ 전투를 해야 하는 걸까?
꼭 ‘이번에’ 전투를 해야 하는 걸까?
좀 더 ‘유리하게’ 전투를 치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편의 숫자를 더 늘리고 싶은데 ‘어디서’ 우리 편을 데려올 수 있을까?
뭐 이런 선택지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다리클리프는 펠트리아의 지원요청을 받고 온 것이지만 칼마르는 다리클리프의 지원요청을 받고 합류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리클리프는 용병사업과 중계무역으로 펠트리아와 많은 이익을 공유해 왔다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3개의 섬나라가 정리되면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예상해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면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리클리프에서 적을 막아도 성공입니다.”
엘리아슨은 갑자기 깨달음이 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병사들을 지휘하여 이기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그는 자신이 다리클리프의 입장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성실한 군인답게 내 설명에 따르는 위험을 하나 지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 병력이 도착하지 못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신용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나중에 연합군으로 합류하게 되더라도 이런 전력은 두고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그 점은 저도 어쩔 수 없군요.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적어도 고의로 늦었다는 오해만 안 받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고의로 늦었다는 오해는 받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은 여전히 약했고, 우리는 계속 노를 저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람이 다시 강해진 것은 펠트리아에 가까이 가서부터였다.
지금까지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안면을 바꾸고 거칠게 굴기 시작했다.
산들거리던 바람도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연기다! 연기가 솟고 있다!”
돛대에 올라가 있던 견시가 고함을 질렀다.
그제서야 우리도 바다 멀리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바람에서 저런 연기라니!
저것은 배 몇 척이 불에 탄다고 해서 발생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분명 도시가 불타고 있다.
*
펠트리아는 비엘리와 달리 기습이 불가능했다.
절대 기습은 당하지 않겠다는 펠트리아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프리시오 공작의 원정군은 펠트리아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바다에서부터 정찰선과 맞부딪칠 정도였다.
그때부터 프리시오 공작의 원정군은 정찰선을 달고 다니다시피 했다.
몰래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르사브 사령관은 이번에는 기습으로 재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대신 이전과 달리 제대로 된 해전을 기대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전투의 시작은 그리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양쪽 다 횡으로 전선을 앞에 세우고 돌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서로 부딪치기 전까지는 화살을 날리고 불이 담긴 항아리를 쏘았다.
양쪽 다 운이 없는 자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아주 재수없는 배에는 불덩이가 떨어졌다.
더 재수없는 배는 충각에 부딪혀서 반파된 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운이 없는 자들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일선에 나란히 늘어서서 돌격한 대부분의 전선들은 최초의 충돌을 이겨냈다.
그리고 곧 두세 개씩 단단하게 얽혀서 하나가 되었다.
바다의 성채가 하나로 붙은 것이다.
성채에 있던 병사들은 상대방의 성채를 함락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바다 위에서 뒤가 없는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그때 에어베드는 2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양쪽의 전선들이 엉켜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가 되면 곧장 펠트리아로 상륙해서 왕을 잡으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명령이었다.
이미 비엘리에서 어떻게 왕궁이 공략당했는지 소문이 난 후였다.
당연히 펠트리아에서는 상륙지점부터 왕궁까지 쉬운 공략 지점이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닐룬드르의 미친놈들이······”
그는 이를 갈았다.
약탈을 하러 갔던 안닐룬드르의 전사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가장 보물이 많을 만한 곳을 먼저 덮쳐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곳이 왕궁이라는 점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도 왕궁의 재물만 털었다면 눈을 감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야만족 전사들은 포로로 잡은 자들을 노예로 데려간다고 왕족까지 손을 대 버렸다.
악명만큼이나 상식이란 것이 없는 놈들이었다.
하긴 전투 직전에 주술이랍시고 말을 죽여서 얼굴에 피를 바르는 자들이 제정신일리가 없으니.
그것도 약식이고 원래는 적을 잡아서 적의 피로 해야 한단다.
근엄한 얼굴을 한 야만족 전사장들이 배까지 끌고 온 말의 목을 치고 흐르는 피로 야만족 전사들의 얼굴을 붉게 칠할 때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피를 칠한 야만족 전사들의 기세가 흉흉해지면서 당장이라도 적을 죽여 버리겠다고 날뛸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
신기했다.
진짜 주술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고, 정말 유용해 보였다.
그러나 이성을 잃고 날뛰는 야만족들이 사고를 쳐대니 주술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는다.
명령에 따르는 병사가 통제되지 않는 야만족 전사보다 백배는 낫다.
뒤늦게 나타나서 왕궁에서 벌어진 일을 파악한 게르사브 사령관은 왕궁에 있던 사람들 중 비엘리에 속한 자들을 싹 죽여버렸다.
남여노소, 신분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인 것이다.
그리고 에어베드에게 안닐룬드르의 전사들까지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을 요구해왔다.
곤란한 요구였다.
에어베드는 이번 전투에 칼마르의 윌리엄이 참전한다는 소리를 듣고 안닐룬드르의 전사들을 이용해서 그를 잡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벼락출세로 귀족이 된 자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백작씩이나 되는 자니까 기사가 몇 명이나 그 주변에 경호랍시고 붙어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정군 사령관인 게르사브는 야만족을 다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왕족을 함부로 다룬 일이 소문 나면 자신의 체면에 큰 손상이 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제국의 귀족도 아니고, 제국민 출신조차 아닌 그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다니던 인상과는 다르게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야만족은 물론 다른 나라의 왕족까지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을 서슴지 않는 자였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야만족보다 더 미친 자였다.
그런 자가 원정군의 사령관이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장. 보슈.”
간판장이 다가와서 전투 현장을 향해 손짓을 했다.
멀리 대장선의 돛대에 올라간 붉은 색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독전기였다.
아직 남아있는 전선은 모두 적에게 달려들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적들이 선상 백병전에 묶였으니 섬으로 돌격하라는 신호였다.
독전기의 신호에 따르지 않으면 전투 후에 사형이다.
사령관의 비밀스런 명령에 따라 야만족 전사들을 제거하지 않아도 죽음이다.
에어베드는 다시 이를 갈았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칼마르에서 온다던 지원군 소식은 없었다.
전함 중에서 칼마르의 깃발은 물론이고, 다리클리프의 깃발도 없었다.
느려터진 놈 같으니라고!
운이 좋은 놈인 것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이번에 얼굴을 들이밀었으면 야만족도 아직 휘하에 있으니 반드시 죽였을 텐데.
그런데 자신은?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윌리엄을 볼 수 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옆에 있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탁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태풍을 방불케 할 정도로 바람이 날뛰었다.
그리고 그의 선단은 바람을 타고 펠트리아의 항구를 향해 거칠게 나아갔다.
2선에 대기하고 있던 함선들도 일제히 돛을 올리고 그의 뒤를 따라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