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비엘리가 멸망했다
“에어베드, 자네는 약탈에 참가하지 않을 건가?”
원정군의 사령관 게르사브 백작은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던 에어베드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에어베드는 스토어슨 보좌관이 자신이 각별히 신임하는 용병대장이라며 특별히 부탁한 사람이었다.
다방면으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잘 대우해주면 반드시 그 값어치는 할 사람이라는 귀띔과 함께 약간의 선물도 받았다.
과연 그에 대한 평가가 과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용병대가 가장 선두에 서서 갑자기 거칠어진 바다로 인해 느슨해진 비엘리의 경계망을 뚫어낸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전투라는 상륙전까지 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비엘리는 갑자기 닥쳐온 공격에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오랫동안 번성해온 섬국가의 최후치고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안닐룬드르의 전사들이 약탈에 참가하기로 하고 선두에 섰습니다. 여기에 남은 쪽은 약탈물을 분배받는 대신 경계를 하기로 한 자들입니다. 저 역시 오늘은 이쪽에 있을 예정입니다.”
“대단하군. 영지군도 아니고 용병인데 그게 통제가 되나?”
“어렵기는 하지만 해야 합니다. 모두가 약탈에 미치면 용병대는 와해되니까요. 도적떼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져서 명령을 내려도 듣지를 않게 됩니다. 부족 전체가 용병대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모조리 약탈에 참가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적어도 일부는 제정신을 차리고 언제든 전투에 뛰어들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역시 믿을만하군.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네.”
“사령관 님의 지휘가 남다르게 뛰어나서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사령관 님의 명령이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원, 이 사람. 말을 듣기 좋게 하는 재주가 있군. 경계를 부탁하네.”
원정군 사령관 게르사브는 껄껄 웃으며 에버베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에어베드의 용병대가 경계를 맡아준다면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도 비엘리의 부가 어떤지 직접 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르사브는 전투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직속 부대의 일부를 떼어서 비엘리의 왕궁을 점거하도록 파견했다.
중개 무역으로 쌓은 부가 왕궁에 쌓여 있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속부대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용병에 지나지 않는다.
믿을 만한 부하들과 함께 보냈지만 그래도 보물을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너무 늦지 않게 가서 보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게르사브는 호위 기사를 거느리고 뒤늦게 비엘리에 상륙했다.
항구 한쪽에는 갑자기 벌어진 전투 때문에 미처 탈출하지 못한 상선이 잔뜩 정박해 있었다.
게르사브는 이게 다 보급품으로 보였다.
그래서 전투가 끝나자마자 일단은 모조리 몰수대상으로 간주하고 압류를 선언했다.
그리고 선장들에게 소유주를 밝힐 것을 통고했다.
밝혀질 소속에 따라 비엘리 소속의 선박이라면 몰수할 것이고, 다른 곳에 소속된 상선이라면 벌금을 받고 풀어주면 된다.
프리시오 공작이나 외국 소유의 상선도 있기에 선장들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조치이기는 했다.
그러나 게르사브는 단순히 벌금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상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기간을 상정해서 관리비까지 받아낼 계획이었다.
소유주를 밝히면 떠나면 그만인데, 관리비라니 무슨 소리냐는 항의가 나오겠지만, 전쟁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업무가 지체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상선의 소유주를 밝히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전쟁 중에 가장 급한 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이다.
점령 후의 뒤처리같은 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뤄두어도 된다.
유감이지만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말 한마디면 어떤 항의도 무력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선과 선원이 오랫동안 발이 묶여서 손해가 막심하다고?
유감이지만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선에 실린 상품이 제때 이동을 못해서 계약을 깨지고 상품의 가치가 손상된다고?
유감이지만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마음이 급한 상단주가 급행료를 지불해서라도 선박을 빼내야 하겠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 많은 사람이 직접 돈을 써서 행정을 굴리겠다는데 막을 수는 없지.
행정업무를 하는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 와중에 원정군 사령관 게르사브에게도 한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게르사브는 즐거운 마음으로 비엘리의 중심도시를 향해 이동했다.
항구에서 말 타고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항구와 아예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이었다.
사실상 한 도시라고 봐야 한다.
중심 도시로 들어서자 항구처럼 아직도 화재의 여파가 남아 있는 곳이 보였다.
다행히 방화를 엄금한 자신의 명령 때문인지 다 타서 재와 연기만 남은 건물은 좀 있지만, 아직도 불길을 잡지 못한 건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불길이 좀 남아있는 건물이라도 용병들이 체계적으로 진화 중이라서 곧 화재는 끝날 것으로 보였다.
3일간의 약탈 허용이라서 도시가 완전 개판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약탈의 와중에서도 명령체계가 살아있어서 진화까지 하고 있다니, 역시 정예는 정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병대장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휘하는 형식이지만 어쨌든 자신의 명령하에 있는 부하들이다.
부하 병사들이 정예하고 믿을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물론 약탈에 정신을 놓고 날뛰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전투 끝에 이긴 그들의 권리였으니 사령관이 뭐라고 할 문제는 아니었다.
너무 지나치면 해당 부대의 용병대장을 불러서 한마디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름 융통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도 비엘리 왕궁에서 벌어진 난장판은 그냥 내버려두기 곤란했다.
아무리 작은 섬나라이고, 근본이 없는 왕이라고 해도 왕족은 왕족이다.
양식있는 제국의 귀족이라면 적당한 예의로 상대해 주는 것이 기본 예절이다.
게다가 전쟁 중이라고 해도 왕과 왕의 가족들에게까지 험하게 구는 일은 거의 없다.
귀족을 상대로라면 모를까.
하물며 악감정이 쌓일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끝에 승리했는데, 이런 전쟁에서는 상대편 병사들에게도 심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난장판이라니!
게르사브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벌거벗은 채 울면서 춤을 추는 일단의 여인들이 있었다.
용병으로 온 야만족 전사들 역시 그녀들 사이에 끼어서 춤을 추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내키면 끌고 나가기도 했다.
이곳이 왕궁임을 감안하면 궁녀이거나 왕의 가족일 수도 있는 여인들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궁에 있던 남자들은 옷을 벗긴 후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노예를 의미하는 문양이었다.
노예라니! 누구 멋대로!
게르사브와 같은 생각을 갖고 저항했던 남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저항했던 자는 자신의 내장을 바닥에 펼쳐놓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의 문신은 바로 그 옆에서 새기고 있었다.
저항하면 똑같이 해주겠다는 협박이다.
게르사브 사령관은 이 일을 그대로 두면 귀족사회에서 자신의 평판이 나락으로 갈 것임을 깨달았다.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의 입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게르사브 사령관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비엘리가 멸망했다!
남해의 해상교역망이 마비되는 것과 동시에 퍼진 소문이었다.
프리시오 공작이 남해의 해상 교역망을 탐내고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오래된 소문이었다.
그러나 비엘리, 펠트리아, 포를라로 연결되는 3개의 섬나라의 기득권을 부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가도 같이 따라다녔다.
섬나라라고는 하지만 쌓여있는 저력이 만만하지 않은데다가 출신부터가 제국과는 별개의 나라였고, 무엇보다 제국 내부간의 거래보다는 제국과 외국을 중개하는 거래의 규모가 커서 프리시오 공작의 압력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공작가의 모든 힘을 모아서 바다로 진출하려고 해도 힘든데, 프리시오 공작이 주변의 적대 세력을 두고 바다로 전력을 투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리시오 영지군이 자리를 비우면 말썽을 일으킬 자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프리시오 공작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해상교역망에는 별 위험이 없으리라는 것이 모두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한 평가는 칼마르 백작령을 필두로 하는 동부의 해상 교역망세력이 지슬리 공작의 공격을 패퇴시키면서 더욱 굳어졌다.
육지에서는 공작이어도 바다에서는 남작이라는 말이 정론처럼 떠돌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소리소문도 없이 프리시오 공작이 비엘리를 점령한 것이다.
더구나 그 공격이 너무 치명적이어서 왕궁에 있던 사람들 중 살아난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프리시오 공작의 원정군을 지휘하는 게르사브 사령관이 비엘리의 왕족과 귀족들만 깔끔하게 제거하고 비엘리의 남아 있는 세력은 그대로 잡아먹는 묘기를 부린 것이다.
잔인하지만 효과적인 한 수였다.
그것은 펠트리아의 왕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비엘리는 완전히 무너진 것인가? 단 한 줌의 저항세력도 없이?”
“첩보를 전해주는 자가 몇 있습니다만, 우리쪽과 연이 있는 상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식을 보내는 것이 한계입니다.”
“어떻게 해서 왕족 중에 살아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교역을 위해 외국에 나가있던 왕족조차 없었다는 것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지금 비엘리에서 살아남은 최고위 귀족은 남작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도 상단 출신이라 전투에 관한 것은 문외한 입니다.”
펠트리아의 어전은 심각한 분위기였다.
위치상 비엘리 다음은 펠트리아일 수밖에 없다.
단 하루 사이에 비엘리를 멸망시킨 세력이 조만간 펠트리아에 몰려온다는 사실은 모두의 마음에 불안감을 넘어 공포까지 불러일으켰다.
“비엘리가 그렇게 무력했었나? 그들이 가진 병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무너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혹시 내부에서 호응한 자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운이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악운이 겹쳤던 거지요. 비엘리에서 돌아온 상선 선장의 보고에 따르면 그날 바다의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찰을 돌던 군선도 항구로 돌아왔고, 다들 일찍 쉬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래서 공격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항구에 적들이 잔뜩 내린 뒤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안닐룬드르의 전사들은 다른 곳은 돌아보지도 않고 왕궁으로 직행을 했다고 합니다.”
“적은 계획도 잘 세웠고 운도 좋았지만, 비엘리는 운이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믿기 어렵군. 믿기 어려워! 하지만 일어난 일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원군은 어떻게 되었나?”
“포를라에서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포를라로 안심할 수 없었다.
그가 진짜 기대하는 곳은 다른 곳이었다.
“다리클리프는? 그들이 가장 중요해! 그들까지 있어야 우리가 압도적이야!”
“반드시 온다고 했습니다. 오는 중일 겁니다.”
*
그때 나는 바람이 죽어버린 바다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지각은 확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