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원한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난다
“여어~ 에어베드. 어서 오게! 태풍 때문에 며칠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역시 약속 날짜는 칼이구먼.”
“운이 좋았습니다. 스토어슨 님. 용병대의 몸집을 불린 덕분에 공작님과 계약을 할 수 있었는데 첫 대면부터 늦어지는 것은 저부터가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요.”
“오호. 그럼 옆에 계신 분들이 새로 합류하셨다는 안닐룬드르의 전사분들이신 건가?”
처음 본 사람에게도 격의없이 구는 스토어슨은 에어베드를 보자 과할 정도로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등장한 야만족 전사들을 향해서도 친근한 관심을 표명했다.
조만간 원정이 시작될 예정이니 스토어슨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작의 측근이라는 그가 야만족에게까지 살갑게 구는 것은 의외였다.
아무래도 영지군의 합류가 불발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듯 했다.
에어베드는 무뚝뚝하게나마 목례를 하며 예의를 차리는 야만족 전사장들을 하나하나 스토어슨에게 소개하며 한숨을 돌렸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이지만 낯선 땅에 왔다는 불안감과 태풍으로 인한 피곤이 그들을 주눅들게 한 모양이다.
그리고 곧이어 스토어슨이 공짜로 돌리기 시작한 술잔이 약해진 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근엄한 전사장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작님 만세를 외치는 술꾼들이 되어 버렸다.
그제서야 스토어슨은 에어베드에게 눈짓을 했다.
사무실로 쓰는 객실로 올라오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용병 간부들이 주로 머무르는 고급 여관에서 보내는 그는 고급 여관의 방 하나를 개조하여 아예 자신의 개인 사무실처럼 쓰는 중이었다.
에어베드는 야만족 전사장들을 용병대의 선임들에게 맡기고 사무실로 따라갔다.
“승진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스토어슨 님.”
“승진은 무슨. 그냥 일거리가 늘어난 것뿐이야.”
“그래도 이제는 공작님께서 이름을 기억해 주실 것 아닙니까? 조만간 정식으로 작위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스토어슨은 프리시오 공작의 보좌관들 중 하나로 용병의 모집과 관리를 담당하는 자였다.
그런데 최근에 리딕슨과 계약했던 용병들을 별 잡음없이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하는 대박을 쳤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이제는 용병쪽의 업무는 전부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저그런 보좌관들 중의 하나에서 한 방면의 일을 전담하는 중요한 직위로 승진한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면 프리시오 공작의 가신 집단에 합류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그래서 스토어슨에게 에어베드의 합류는 반가운 일이었다.
적어도 그는 믿을 수 있는 전력이고 나름의 목줄도 잡고 있는 자였으니까.
“아직 작위까지는 무리지. 이번 일을 잘 끝낼 수 있다면 또 모를까. 그래서 확인 좀 하자고. 에어베드. 어때? 병력은 충분하겠지?”
“안닐룬드르의 전사들까지 합류했는데도 부족하다고 하면 이 장사도 때려치워야지요.”
“다행이군. 이번 토벌은 용병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로 진행이 될 거야. 영지군쪽에서는 되도록 병력을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이라서 말이지. 기사는 별도로 지원이 되겠지만.”
영지군의 원정 참가는 불발되었다.
전공을 노린 지휘관들은 원정 참가를 원했지만, 프리시오 공작은 바다를 건너서 가는 원정에 영지군을 참가시킨다는 것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혹시 폭풍이라도 휘말리면 대참사가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가신들 역시 프리시오 공작의 우려에 동의를 했다.
스토어슨이 보기에도 영지군은 단순히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귀중한 존재였다.
한 명 한 명이 마을에서 행세 좀 하고, 재산도 좀 있는 사람들의 자식이고 조카였다.
이들이 원정을 나갔다가 떼죽음이라도 당한다면 영지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이 없는 자라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리딕슨과 계약했던 용병들의 계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도, 야만족의 전사들까지 용병계약으로 끌어들인 것도, 그런 점을 참작한 높은 분들의 결단이었다.
돈은 엄청나게 들었지만, 피를 대신 흘려줄 자들을 구했으니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아니라는 재무관의 적극적인 찬성도 한몫을 했고 말이다.
이제 제대로 싸워서 이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별로 걱정할 것은 없겠습니다. 일개 도시만도 못한 섬에서 자기들끼리 왕이니 귀족이니 하면서 놀고 있지만 제대로 된 군대도 없는 곳입니다. 밀면 싹 밀 수 있습니다.”
“모조리 다?”
스토어슨의 질문에 에어베드는 웃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스토어슨의 거듭된 질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을 했다.
“다 아시는 분이 그렇게 답변을 강요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다리클리프는 안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는 용병업으로 먹고 사는 곳이라서 웬만한 백작령에 버금가는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는 쪽으로 바뀌었어. 협상이 결렬된 모양이야. 그 곳을 제외해 버리면 다른 섬들을 점령하더라도 제국 남부의 해상 교역망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이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젠장. 절반 이상 죽을 겁니다.”
“죽으면 잔금을 치를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리딕슨의 손을 탔던 자들일세. 불안 요소는 없앨 수 있을 때 없애는 것이 낫지. 그리고 야만족 전사들이야 어차피 칼받이로 데려온 것 아니었나?”
“다른 섬이라면 모를까 다리클리프를 공략할 때 에어베드가 전면에 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자네가 좋을대로 하게. 내가 지휘부에 말을 해 놓지. 아! 그런데 칼마르의 윌리엄이라는 자가 다리클리프에 갔다는 첩보가 있네.”
스토어슨의 말에 지금까지 웃음을 섞어가며 능굴맞게 굴던 에어베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슬리 공작은 진작에 죽었고, 게스티 백작은 광산노예로 있다가 죽은 것이 확인됐다며? 그러면 남은 것은 칼마르의 윌리엄 뿐인가?”
영업 잘하는 에어베드의 용병대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
복수를 위해 아직까지 죽지않은 귀신이 거기에 있었다.
*
“이번 일을 마치면 바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하지요.”
사라 남작 부인의 말에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황도에 갔다와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 결혼식을 계속 미뤄야 했다.
선제후였던 공작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는 혼란기인데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다는 것에 다들 동의했다.
나도 전쟁을 치르며 정신없이 바빴고 말이다.
그러나 아르보그 공작이 지진으로 죽은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나 역시 행방불명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때, 백작의 가신들은 내가 최일선에서 뛰는 것을 너무 당연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작부군이나 되는 사람을 일선에서 첩보활동까지 하게 하다니!
첫 만남이 용병과 고용주의 관계로 시작된 데다가, 내가 앞장서서 온갖 사건사고를 해결하다 보니까 가신들도 자신들이 관성적으로 내게 휘둘린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뒤늦게 반성모드로 들어간 백작의 가신들은 내가 복귀하자마자 영주성에 나를 가둬버렸다.
당분간 어디든 갈 생각을 하지 말고 리네아 백작님과 잘 지내고 있으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내가 행방불명이라는 보고를 받고 기절을 했던 리네아 역시 전적으로 가신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녀는 암살자 마을을 정리한 후에 간소하게라도 결혼식을 올리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서 내게 화를 냈지만, 결국은 돌아와서 다행이라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식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백작의 결혼이라는 것은, 특히 이런 혼란의 시대에 고위 귀족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외교의 연장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결혼식을 이용해 우리의 세력을 과시하고 동맹과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나는 외교니 동맹이니 하며 거창하게 논의하고 있지만 별로 일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떤 주제로든 리네아와 이야기를 하며 노닥거리는 것 자체가 내게는 휴식이었다.
이런 휴식이라면 좀 오래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편의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영주성에서 휴식을 취하며 리네아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리클리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령이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결혼식 날짜의 확정이었다.
뭔가 원인과 결과가 이상하게 연결된 것 같지만 결혼식 날짜가 급하게 확정된 것은 다리클리프에서 온 전령 때문이 맞다.
“웬만하면 윌리엄 님을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만, 윌리엄 님이 아니라면 안 된다고 아예 드러누웠으니 원.”
“별일 없을 겁니다. 프리시오 공작도 미친 것이 아니라면 적당히 타협을 하고 물러서겠지요. 다리클리프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윌리엄 님을 보내는 겁니다. 정말 위험할 것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습니다.”
다리클리프에서는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나를 콕 짚어서 요청해왔다.
이미 한 번 손발을 맞춰본 후라서 신뢰할 수 있는 인선이라는 설명이지만, 백작의 부군을 지원군 사령관으로 하면 병사 한 명이라도 더 지원을 받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지원군의 규모를 좀 더 키워서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천인대 하나를 끌고 지원을 나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대신 이번 일이 마치는대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리네아와 나, 둘 뿐 아니라 가신들까지 합의를 했다.
더 이상 결혼식을 미루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사라 남작 부인의 주장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
제국 동부와 남동부를 아우르는 해상교역망의 핵심은 칼마르다.
칼마르가 없다면 지금처럼 발달한 해상교역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마르 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수많은 상단의 자본은 칼마르 시가 무력으로 지키고 있다.
상행의 위험을 나누어 가지는 보험은 칼마르의 시의회에서 담당하고 있고, 상선을 공급하는 조선소에도 칼마르의 자본이 들어가 있다.
해상 교역망의 안전은 칼마르가 주도적으로 관리한다.
외국과의 교역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신용 역시 칼마르에서 제공한다.
칼마르 백작령은 제국 동부와 동남부의 해상교역망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보증인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 대가로 칼마르는 은행업과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려왔다.
반면에 제국 남부의 해상 교역망은 제국 남부 바다에 늘어서 있는 3개의 섬국가가 중심축 노릇을 해 왔다.
비엘리, 펠트리아, 포를라.
백작령의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남작령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섬국가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자본은 백작령도 우습게 볼 정도로 막대했다.
그들이 상인들을 상대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역에 나선 상인에게 안전한 항구를 제공하고, 선원과 배를 위한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 왔다.
물론 보험과 은행업도 병행하지만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진짜는 칼마르처럼 중계무역을 통해 얻는 막대한 수수료와 차익이었다.
그들이 거둬들이는 수익을 다 합치면 공작이라도 우습게 볼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세간의 속설은 역시 그냥 속설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에 타는 비엘리의 항구는 작정하고 달려든 공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비엘리 같은 섬국가는 단숨에 짓밟혀 버릴 정도였다.
“약탈은 관례에 따라 3일간 허용된다. 계속 사용해야 할 항구니까 더 이상 불을 지르는 것은 엄금한다.”
첫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한 원정군의 사령관은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약탈 기간을 3일로 정해 주었다.
용병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펠트리아와 포를라를 지나 다리클리프를 바라보고 있던 에어베드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다르클리프에 윌리엄이 있다.
얼마 전 들어온 새로운 첩보였다.
에어베드는 자신의 가슴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게스티 백작의 병사들이 만든 상처였다.
유감스럽게도 게스티 백작은 자신의 저주대로 죽지 않았다.
그는 배 위에서 죽지 않았고, 머리가 장대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자손의 대가 끊어진 것은 모르겠다.
게스티 백작은 물고기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광산에서 노예로 죽었다.
그렇다면 윌리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