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30화 (130/248)

130. 프리시오 공작

지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멈췄다.

아직 여진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천장에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것도 멈췄고, 벽도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진의 여파로 인해 내가 내려온 통로가 막혀 버렸다.

곤란한 일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와 흙무더기를 보니 포크레인을 가져다가 작업을 해도 한나절은 작업을 해야 할 분량이었다.

사람이 치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결국 다른 출입구, 내가 오지 않은 쪽의 동굴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동굴로 2시간이나 이동해 온 거리를?

의지할 수단은 미니맵 뿐이지만 따지고 보면 미니맵은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3차원 구조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상에서 지도로 사용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출발을 해야 하나 싶을 때 저절로 상태창이 나타났다.

상태창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의문이 드는 순간 상태창이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다시 나타났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난 상태창의 모양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글자의 폰트가 좀 더 예뻐지고, 색도 깔끔해졌다고 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세련된 느낌으로 바뀌어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마치 프로그래머가 기능만 구현해 놓고 이미지는 비상업적인 소스를 끌어다가 대충 만들어 놓은 상태창을 디자이너가 전체적으로 손 본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하는 순간 미니맵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내가 보던 미니맵과 다른 형식이었다.

지금까지 상태창이 제공하던 미니맵이 종이지도였다면 새로 튀어나온 미니맵은 3D 지도였다.

심지어 앞에 띄워놓고 방향을 바꾸거나 돌릴 수도 있었다.

상태창이 업그레이드라도 했나?

하필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공동을 채우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빛의 기둥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형광등 못지 않게 밝게 빛나던 빛의 기둥이 부드럽게 빛이 약해지더니 원래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공동 중앙에 있는 빛의 기둥 하나뿐이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그 기둥에 손을 대어 보았다.

전과 달리 약간 밝아지다가 다시 원래의 밝기로 돌아갔다.

마치 충전한 에너지를 다 소모한 건전지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아르보그 공작이 이곳을 ‘신비의 전당’이라고 불렀음을 떠올렸다.

신비의 전당?

신비!

신비는 세상을 이루는 규칙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나는 그런 상식이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구에서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설정에 나오는 마나와 마법으로 치환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상 속의 산물이라지만 나름 체계를 갖췄던 마나와 마법의 시스템과 이 세계의 신비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신비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체계자체가 없었다.

그냥 신비를 접하는 사람이 있고, 깨닫는 사람이 있어서 각자의 능력을 사용할 뿐이었다.

게다가 신비에 가깝게 접근할수록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남을 수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심지어 신비를 깨달은 자들 중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못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나는 이해하기보다는 존재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다른 자들도 오랜 탐구를 거쳐 나와 같은 결론을 낸 모양이었다.

산적으로 굴러다닐 때에야 하루하루 살아남기위해 노력하느라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단 귀족이 되고 부딪치는 상대가 고위 귀족과 비밀단체로 격상이 되자마자 내가 모르던 세상이 펼쳐졌다.

공작가들은 물론이고 각종 단체에서조차 신비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인체실험까지 해가면서!

성과물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배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신비를 강체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술화하거나 인체의 능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는 등 나름대로 이룬 것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신비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오랜 시간의 투자를 생각해 본다면 그 결과물이라는 것들은 기대 이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신비의 전당’이라는 곳에서 아르보그 공작은 신비에 대해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의 군대를 무적으로 만들어 줄 무엇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내 상태창을, 미니맵을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빛의 기둥에서 나오는 빛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신비를 강화하는 에너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신비라고 부르는 것 그 자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흡수했고 마치 진화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상태창의 업그레이드는 그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거인들의 소멸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아마 나 때문에 유입되는 양이 갑자기 늘었고, 거인들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상태창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맞았다.

지구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이야 내 기억에 맞게 구성한 것이겠지만, 상태창을 이루는 힘은 이 세상의 것이고 그것은 신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나는 신비가 강화한 3D 미니맵을 살펴보았다.

산 전체의 모습과 그 안에 있는 동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살펴보니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탈출로를 짤 수 있었다.

동굴이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중간의 일부가 무너져 있어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문제가 없을 듯했다.

의외인 것은 현재의 동공 아래에 빈 공간이 하나 더 있다는 정도였다.

나중에 다시 와서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어둠 속을 걸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지만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르보그 공작이 강화된 그의 군대를 이끌고 남부로 내려왔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화된 거인족 한두명만 포함이 되어 있어도 같은 규모의 군대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밀리기 시작하면 결속력이랄 것도 없는 귀족 자치 연합이니 분명히 깃발을 바꿔드는 자들이 속출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 영지를 지킨답시고 영지에 남아있다가 각개격파 당하는 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공작은 첩보를 다루는 솜씨도 그렇고 방첩 작전을 짜는 것도 그렇고 오랫동안 실무를 놓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뭔가 있어보이는 ‘용의 거처’라는 명칭을 이용해서 내부의 첩자를 잡기 위한 덫을 놓다니!

이곳의 문명 수준이 중세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측근마다 이곳을 부르는 명칭을 달리해서 누가 정보를 유출하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칼마르의 손이 닿았던 블라우기에게는 용의 거처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다른 측근에게는 다른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용의 무덤’이라든가 아니면 ‘용의 창고’같은 명칭 말이다.

그리고 걸려들었겠지.

아르보그 공작의 능력이 강화되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큰 문제였다.

내가 ‘용의 거처’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누가 다른 세력의 첩자 노릇을 하는지 파악해 버릴 정도였으니, 그의 통치가 흔들리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지진으로 아르보그 공작이 죽지 않았다면 그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다.

빛의 기둥이 나타나고 신비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이기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가 그에게 떨어져서 죽음까지 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쪽의 행운이었다.

들어오는 데에는 2시간이 걸렸지만 나가는 데에는 6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들어온 쪽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산 중턱의 환기구 역할을 하는 좁은 구멍을 통해서 나가야 했다.

지진으로 인해 동굴의 이곳저곳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

기존에 통로로 쓰던 동굴도 중간에 세군데나 무너져 있는 것으로 나와서 탈출자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만약 3D로 업그레이드된 미니맵이 없었다면 나역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산 내부의 동굴이 무너진 여파는 산 외부에서도 드러났다.

산정상의 일부가 무너졌고, 움푹 들어간 지형도 몇 군데 생겼다.

덕분에 에시스칼리 산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은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산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몽땅 산으로 올라와서 수색작업을 하는 모양인데, 동굴 내부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면 아무 쓸모없는 짓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 절반, 공황에 빠진 지휘부의 삽질이 절반이겠지.

나는 혼란에 빠진 아르보그 공작군을 뒤로하고 에시스칼리 산을 떠났다.

*

프리시오 공작은 새로운 리딕슨 공작이 변경백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바닥에 던졌다.

프리시오 공작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리딕슨은 한때는 프리시오 공작과 같은 반열에 서있던 선제후였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리딕슨. 우리 사이의 우호는 꽤나 오래 되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4대 1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저희 가문은 프리시오 공작님께 충실한 조력을 보탰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래서 나는 자네를 내 친구로 삼았던 걸세. 그리고 자네의 조력에 감사하는 의미로 높은 지위와 보상을 약속했네. 공작가의 초창기부터 충성을 다해온 가신들보다, 내 말한마디면 기사와 병사를 이끌고 내 깃발 아래에 몰려오는 영주들 보다 더 높은 지위와 보상을! 그런데 이건 뭔가?”

“오해이십니다. 저는 이 편지를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편지에 찍혀있는 인장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리딕슨은 할 말이 없었다.

편지를 밀랍으로 밀봉한 인장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다.

편지지 끝에 서명과 함께 찍혀있는 인장 역시 자신의 것이었다.

심지어 서명도 자신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장 반지는 잠을 잘 때가 아니라면 손가락에서 떼어낸 적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편지에 인장이 찍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라딕슨은 과연 자신이 음모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리딕슨의 이름을 가졌던 자들이 모조리 죽어나갈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명예를 걸겠습니다. 편지에 찍힌 인장은 분명히 위조일 것입니다.”

“위조? 밀랍에 찍혀 있는 인장의 깊이까지 동일한데 위조? 나는 이미 공작가의 문장담당관에게 문의해서 위조 여부도 확인했네. 그는 위조일 가능성은 없다고 하더군. 다른 전문가 누구를 불러도 같은 결론을 낼 것이라고 확언했네.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하니까 다른 의견이 나온다면 자신을 파면하라고까지 말했네.”

저자가 저 정도로 말한다면 위조는 진짜 아니다.

리딕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그를 절망으로 밀고 갔다.

인장반지를 빼놓은 때는 오직 잠을 잘 때뿐.

그때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의 부인과 시종장 뿐이었다.

최근에는 암살을 피하기 위해 애첩조차 들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그리고 시종장이?

리딕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기만 했다.

“내용도 가관이군. 변경백들에게 병력을 요청하다니. 그것도 나를 치기 위해? 이봐. 리딕슨. 변경백들은 내전 중이라도 국경을 지켜야 해. 그게 전통이야. 변경백이 그런 전통을 지키지 않으면 주변의 왕국들 때문에 개판이 된다고! 그런데 네 놈이 변경백들을 불러들이려고 해? 변경백들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내게 부하 관리 잘하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따로 보냈더군. 너는 내 얼굴에 똥칠을 했어!”

프리시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리딕슨에 사형을 언도했다.

리딕슨의 신분을 고려하여 피를 보지 않고 죽이는 것이 유일한 배려였다.

그리고 한 가지 배려가 더 있다면 리딕슨의 아들이었다.

리딕슨의 부인이 조력을 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아들의 생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적어도 당분간은 그 약속을 깰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기사인 리딕슨의 아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전쟁터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프리시오 공작은 판결을 내린 후 대기하고 있던 가신들을 불러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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