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29화 (129/248)

129. 공작과의 헤어짐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조차 없었다.

거인 하나가 공중에 뜬 채 가루처럼 잘게 분해되고 그대로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은 무척이나 생경한 일이었으니까.

경험은커녕 상상이라도 해 본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그 모든 과정이 이곳에 있는 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천천히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한순간에 소리도 없이 신체가 허물어지면서 공중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였기에 이해의 한계를 벗어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거인들은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피도 비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윌리엄이 거인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며 빛의 기둥을 지나갈 때마다 빛의 기둥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그리고 윌리엄의 움직임을 쫓아 달려든 거인들이 밝아진 빛의 기둥을 지날 때 그들 역시 이미 사라진 그들의 동료처럼 사라졌다.

빛의 기둥 안에서

온몸이 무너지며 가루처럼 흩어지다가

그대로 허공 중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만을 바닥에 떨군 채.

한 명, 두 명, 세 명째의 거인이 빛의 기둥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 거인들은 공포에 질린 채 일제히 멈춰섰다.

*

공포에 질린 거인들의 눈동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밝아진 빛을 볼 때는 술이라도 취한 것처럼 흥분하더니 몇 명의 거인이 빛 속에서 소멸하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강아지처럼 굴었다.

꼬리를 가랑이에 집어넣고 낑낑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그 강아지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저들도 처음 겪어 보았을 테니까.

팔다리가 떨어지고, 피를 뿜어내며 비명을 지르는 것은 많이 보았어도 아무 소리도 없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공에서 그냥 소멸하는 것은 분명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빛의 기둥은 내게 아무 위험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빛의 기둥에 들어설 때마다 내 몸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진화를 하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내가 점점 강한 사람이 되고 있다고 할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모든 빛의 기둥이 밝은 빛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갔던 빛의 기둥만이 전과 다르게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시험삼아 아직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던 다른 빛의 기둥을 일부로 지나쳐갔다.

역시나 내가 그 빛의 기둥을 지나가는 순간부터 밝기가 확 세어졌다.

이곳에 있는 빛의 기둥과 내가 서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신비의 전당?

용의 거처?

나는 아르보그 공작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곳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했다.

“아르보그 공작 각하. 여전히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보그 공작은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

나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빛의 기둥.

아직 밝아지지 않는 빛의 기둥 안에 그대로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부하들이 불가사의하게 죽어나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권력자 특유의 오만함과 자신감,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눈빛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윌리엄 버로스? 칼마르의 백작 윌리엄? 아니야. 너는 윌리엄 버로스가 아니야! 진짜 윌리엄 버로스는 어디 숲속에라도 묻혀 있겠지. 평민 기사?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 실력에 그 지식은 절대로 20대 초반의 애송이 기사가 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천재라도 절대 안 돼. 내가 천재라는 인간들을 한두 명 본 줄 아나? 아무리 천재라도 경험이 필요해. 사람을 대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지. 이제는 자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보좌관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윌리엄 백작. 자네 정체는 뭔가?”

나는 내 상태창을 떠올렸다.

그곳의 가장 첫머리에는 나에 대해 이렇게 나타내고 있었다.

[인간 : 윌리엄 버로스]

바뀔 수 없는 내 정체성이었다.

2회차인지 3회차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고, 상태창이라는 신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내 정체성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각하의 멍청한 측근들부터 갈아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르보그 공작 각하. 나는 인간이고 윌리엄 버로스가 맞습니다.”

“믿을 수 없다.”

아르보그 공작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무시하고 빛의 기둥을 나와 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 밝아지지 않은 빛의 기둥이 여럿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지나치며 아직 어두운 빛의 기둥을 건드렸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스위치가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기둥이 밝아졌다.

밝아진 빛의 기둥이 늘어난 만큼 공동은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내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거인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걸어서 앞으로 가는 만큼 살아남은 거인들은 연신 뒤로 물러섰다.

결국 아르보그 공작조차도 나를 피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밝아진 빛의 기둥은 내게 힘을 주었다.

이제는 눈앞의 거인들이 그냥 일반 인간 기사와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다.

싸우면 이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나를 고무시켰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을 적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의 나를 보다가 문득 깨달은 듯 고함을 질렀다.

“너! 그 괴물이었나?”

나는 잠깐이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괴물이라니?

아무리 내가 상식적이지 않다고 해도 괴물이라는 단어는 좀 지나친······

그 괴물?

설마 3백년 전에 내전을 제압하고 선제후 제도를 세운 그 존재를 말하는 건가?

“그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같은 것은 어떻게든 바꿀 수 있었을 거야.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자라면 자신의 겉모습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지. 삼백년 동안 계속 그 모습이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웃긴 노릇이었어. 그래 맞아. 이제 이해가 가는군. 아무래도 누군가가 너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20년 넘게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누구였을까? 저격에 성공한 자가. 뱅트손과 스케티가 서로 싸우는 꼴을 보면 그들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프리시오? 그렇지! 프리시오라면 말이 되지. 그 음흉한 자라면 일을 저질러 놓고 나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지. 성공했다면 모를까 결국 놓친 셈이니까 두려워서라도 입을 닫고 있었을 거야. 그래. 그러면 말이 되는구나!”

아르보그 공작은 흥분해서 혼자 떠들어댔다.

그는 지금까지의 진중하고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음흉했던 이미지와 달리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 떠버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다. 신비의 흐름이 가장 가깝게 드러난 이곳이 필요했던 것이지? 너를 치유하기 위해서? 결국 너는 강력한 신비를 깨달은 자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아마도 아주 오래 사는 아인종의 하나겠지.”

“아르보그 공작. 나는 인간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이라고 해 주지. 괴물. 너는 너무 일찍 정체를 드러냈다. 회복을 위해서는 이곳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너무 일찍 정체를 드러냈어. 아직 거인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인데 이제 어떻게 될까? 너는 이곳에서 죽게 될 거다.”

아르보그 공작은 나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리더니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저놈을 막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

그는 출구를 향해 뛰면서 살아남은 거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최후의 일인까지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을 해봤자 명령의 당사자가 도망가면 그 진지는 금방 무너지는 법이다.

누가 도망치는 지휘자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거인들은 아르보그 공작의 명령에 따라 나를 막기 위해 늘어섰다.

내가 아르보그 공작을 따라가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겠다는 기세가 넘쳐흘렀다.

지금까지 공포에 질린 채 내 눈길조차 슬슬 피하던 자들답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이 거인족에게 가지는 장악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감투정신에 감탄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도망치는 아르보그 공작을 잡아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라니!

미친!

절대로 아르보그 공작을 놓쳐서는 안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아르보그 공작이 있던 빛의 기둥을 지나서 거인들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다른 빛의 기둥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빛의 밝기가 확 밝아졌다.

이것으로 이 공동에 있던 빛의 기둥 모두가 밝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공동에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 있던 빛의 기둥이 모두 밝혀진 것이 트리거라도 되는 것처럼 새로운 빛의 기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밝기도 내 손이 닿았던 빛의 기둥처럼 밝았다.

하나하나 늘어나던 빛의 기둥은 오래지 않아서 공동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섰다.

지하 공동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찬 것이다.

빛의 기둥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 지하의 구조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은 지진이 공동을 휩쓸었다.

천장에서 바윗덩어리가 연이어 떨어지고 공동의 벽도 일부 무너졌다.

당장이라도 공동이 붕괴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를 막기 위해 늘어서 있던 거인들에게 이제 나는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들은 빛의 기둥이 자신들을 위협하듯 숫자를 불리고 지진으로 공동이 붕괴할 것처럼 흔들리자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당장이라도 출입구로 도망을 쳐서 이 공동을 떠나고 싶지만, 아르보그 공작의 명령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은 치명적이었다.

빛의 기둥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빛의 기둥에 휘말린 거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져갔다.

자그마한 알갱이로 부서진 그들은 빛의 기둥 속에서 더 미세한 알갱이로 부서지고 결국은 허공 중에서 사라졌다.

마치 분무기로 뿜어낸 작은 물방울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아서 빛의 기둥과 부딪치지 않았던 자들도 공동이 빛으로 가득 차차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고통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당혹스러움과 공포는 불을 보는 것처럼 명백했다.

모든 거인이 빛 속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르보그 공작을 찾아 빛 속을 걸어갔다.

아르보그 공작은 자신보다 더 큰 바위에 깔려 있었다.

출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었다.

빠른 판단과 도주였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다.

그 커다란 바위에 깔리고도 거인족 혼혈답게 아직 살아는 있었지만 회생할 가망은 없어보였다.

가슴부터 아래쪽으로 다 으스러졌으니 그가 죽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남길 말이 있다면 전해 주겠습니다. 아르보그 공작.”

“너, 그 괴물이 아닌 것이 맞나?”

“나는 인간입니다. 공작.”

“공작성의 서재, 위에서 두 번째줄 3, 8, 12번째 책을 수거해.”

“뭡니까? 그 책들은.”

“우리가 파악한 것들.”

좀 더 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빛은 우리에게 대화를 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동을 채운 빛에 휩싸인 아르보그 공작은 그의 부하들처럼 부서져 내리더니 사라졌다.

심지어 바닥에 흘렸던 그의 피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그의 의복뿐이었다.

빛이 모든 것을 흡수한 것이다.

지하 공동의 흔들림이 더 심해졌다, .

계단이 있는 출구가 무너지면서 천장에서 다시 몇 개의 커다란 바위가 떨어졌다.

내가 들어온 출구가 완전히 막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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