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27화 (127/248)

127. 빛의 기둥

나를 이곳까지 끌어당긴 것은 빛의 기둥이었다.

처음에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그리고 무지에 따른 두려움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 빛의 기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강력하게 드는지.

솔직히 말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강렬한 욕구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뿐, 행동까지 강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기생충에 조종당하는 좀비개미꼴이 되었다면 나는 공포에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잃었다는 이야기이니까.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아르보그 공작의 표정은 좀 더 풍부해졌다.

그는 진정으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왜?

“칼마르에게 멱살을 잡힌 자가 내 측근 중에 있었군. ‘신비의 전당’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정도라면 내 측근 중에서도 진짜 중요한 자들 중 하나라는 소리인데, 언제 그렇게까지 깊숙이 더듬이를 뻗어두었는지 신기할 정도로군. 확실히 전대 칼마르 백작은 능력이 뛰어난 자였어. 역시 진작에 치워버리기를 잘했군.”

리네아의 부친을 죽인 자가 아르보그 공작이이었다고?

글렌 공작이 아니라?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두 가지나 말이다.

글렌 공작이 범인일 것이라는 우리의 추측이 아예 틀려버렸다는 것이 하나,

그리고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첩자가 있다는 것이 둘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아르보그 공작의 첩자라니!

정말이지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외부의 손길을 타기 쉬운 상인이 시의 구성원의 대부분이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권력자의 은밀한 손을 떨쳐내는 상인?

그런 것은 태생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허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점검하고 칼춤을 추는 수밖에.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보니 윌리엄 백작에게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었군그래. 그거 아나? 내 참모들 중에는 윌리엄 백작이 인간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네. 인간답지 않은 냉철함과 단호함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그 힘과 전투실력, 심지어 정치력에 행정실무까지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로 인간일 수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지. 오래 사는 아인종의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네. 그런데 역시 그것은 아닌 모양이군. 자네는 인간이었어. 나와는 다르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거부감과 함께 정신이 확 깨는 것이 날선 칼날 위에라도 올라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전과 다르게 대놓고 나를 하대해서는 아니다.

딱하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계속 거슬렸다.

자연히 내 언사도 날카로워졌다.

“제가 인간인 것은 아르보그 공께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명확합니다. 제 출신의 격이 떨어진다고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 거친 언사에도 불구하고 아르보그 공작은 여전히 내게 우호적인 관심을 표했다.

“설마. 모욕이라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네. 이런 혼란기에 출신이 뭐가 중요한가? 평화스러울 때라면 모를까 그런 것 따지는 놈은 명줄이 오래 가지 못해. 자네처럼 스스로를 증명한 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지. 게다가 백작이나 되는 귀족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은 아무리 내가 공작이라고 해도 부담이 되는 일일세. 더구나 자네를 따르는 기사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지. 칼마르의 기사들 모두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일부는 마스터 요한보다 자네에게 더 충성할걸. 그리고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리네아 백작보다 자네를 더 중요시할지도 모르지.”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런 쓸데없는 말로 저를 떠보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칼마르의 백작이자 나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대했다.

“단순히 들은 말을 옮긴 것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말게.”

아르보그 공작이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정말 묘했다.

무엇인가가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

나는 좀 더 긴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 순간 아르보그 공작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지금까지의 부드러웠던 태도를 버리고 거친 태도로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군. 내 참모들 중 목줄이 잡혀서 기어 다니는 자가 있어서 모든 정보를 넘겼다고 해도 자네같은 고위 귀족이 직접 이곳에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바르거에게 지원이 가지 않았으니 상황을 오판한 북부의 아르누트 지슬리와 남부의 귀족들이 손잡고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오라는 적들은 안오고 엉뚱하게도 칼마르의 백작이 직접 오다니! 윌리엄 공. 자네는 무엇을 알고 있나?”

아르보그 공작이 묻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것이다.

3백년 전 내전의 당사자들을 제압해서 선제후로 만들어 버린 그 존재 말이다.

원래 그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은 선제후와 그들의 직계 자손 정도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존재가 사라진 후 그 정보는 좀 더 널리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가까운 측근과 정보를 공유하는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조언이 필요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칼마르같이 선제후의 최측근까지 포섭해서 정보를 뽑아내는 세력에게 그 정보가 넘어가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용의 거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작이나 되는 칼마르의 최고위 귀족이 직접 달려왔으니 그 존재에 대해 칼마르도 알고 있다고 의심할만하다.

단지 그는 지금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다.

내 반응을 보고 자신의 판단에 근거를 더할 생각이겠지.

“용의 거처? 블라우기 녀석이군. 그놈이라면 정보를 흘릴만 하기는 해. 그 놈이 원래 좀 욕심이 많긴 했지. 용기는 부족한 편이었고. 그래도 역시 돈보다는 협박이 문제였을까?”

씨발!

이거 뭐야!

생각을 읽혔다!

아르보그 공작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급하게 뒤로 물러서면서 칼을 꺼내 들었다.

꺼내든 칼을 아르보그 공작에게 겨누며 주변을 살폈다.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르보그 공작은 빛의 기둥에 그대로 있었다.

대신 10명의 거인들이 천천히 빛의 기둥에서 나오고 있었다.

반쯤 벌거벗은 자들이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지금까지와 달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거친 태도 정도가 아니었다.

저것은 짜증과 화가 겹쳐서 빡친 얼굴이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윌리엄 백작. 왜 안 들리지?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신비를 접한 자뿐 아니라 신비를 깨달은 자라고 해도 나는 그자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네. 그런데 왜 백작으로부터는 잡음만 들리는 것일까? 마음을 흔들고, 공감을 해주고 대화를 하면 조금씩 들리기는 하는데 그런 식으로 백작이 나를 다시 경계하니 잡음뿐이야. 윌리엄 백작. 그대는 다른 자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는 궁금하군.”

아르보그 공작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냥 귀만 열어 놓고 신경을 꺼버렸다.

대신 내 신경은 빛의 기둥에서 나온 10명의 거인에게 향했다.

거인족 10명?

가능할까?

언제나처럼 비도부터 날려보았다.

이미 비도를 일부 사용한 후라서 비도집의 일부는 비어있었지만 그래도 허벅지에 감아놓은 비도집은 사용 전이라서 한 번은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가장 전면의 거인,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거인이 비도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목표였다.

하나 정도는 우선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싶었기에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게 되지는 않았다.

첫 번째 거인은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그대로 다 맞았다.

달려오던 거인은 작업복조차 바닥에 던져두고 덤벼온 것이기에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채였지만 비도는 그의 살갗조차 제대로 뚫지 못했다.

몇 개는 피부에 얇게 박힌 채 덜렁거리다가 빠졌고, 몇 개는 아예 피부를 뚫지도 못했다.

마치 잘 만든 가죽갑옷에 비도를 던진 느낌이었다.

낭패함을 느낀 나는 너무 늦기 전에 무릎을 노리고 아직 남아있는 몇 개의 비도를 모두 던졌다.

이번에는 쏟아붙는 것이 아니라 저격하듯 하나하나 정성을 들였다.

과연 거인의 무릎에 집중적으로 던진 비도는 효과가 있었다.

내게 달려오던 거인이 바로 내 앞에서 무릎을 움켜쥐며 한 바퀴 굴러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앞에 죽여달라는 듯 무방비로 넘어져 있는 거인을 처리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다른 거인들이 내게 달려든 것이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 키의 두 배가 되는 거인이라도 몇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달려든 거인들에게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이미 거인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나였는데도 불구하고 일대일로도 힘들겠다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아르보그 공작이 데리고 다닐 만한 거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모든 저항을 다 포기하고 다급하게 몸을 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싸울 수 없으면 도망을 쳐야 한다.

나는 용맹하게 싸우다가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나중의 기회를 노리며 도망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땅의 문화적 성향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정 안되면 항복하거나 몰살당한다는 쪽이라서 대놓고 도망치는 내게 야유와 비아냥이 쏟아졌다.

나는 그 모든 비난을 뒤로하고 탈출구를 찾아 광장을 헤맸다.

연달아 나를 잡아오는 거인의 손을 쳐내고, 나 못지 않게 빠르게 달리는 거인들을 피해 곡예를 벌였다.

그러나 이 광장은 너무 좁았다.

가로세로 100미터.

10명의 거인과 1명의 사람이 술래잡기를 하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었다.

우리의 추격전은 순식간에 몰이사냥이 되고 말았다.

나는 출입구 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고 한쪽으로 몰렸다.

그곳에서는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추격전이 곧 끝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온순한 사냥감이 되어줄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날뛸 각오로 무기를 들었다.

나는 내가 도망칠 방향을 막은 거인들을 뒤로하고 나를 잡아오는 거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높은 곳에서 나를 향해 내리누르듯 잡아오는 손바닥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떤 무기보다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손을 피하면서 오히려 거인의 팔을 잡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나를 놓친 거인의 당혹감 어린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기까지의 그 잠깐 사이에 내가 잡은 팔을 당기며 몸을 띄웠다.

그리고 칼로 거인의 눈을 찔렀다.

피부와 달리 눈은 칼이 잘 들어갔다.

그러나 공격의 순간 얼굴을 돌리며 피해버린 거인 때문에 눈동자 하나를 터뜨리는 것으로 공격을 끝내야 했다.

거인이 조금만 늦게 얼굴을 돌렸다면 눈동자를 뚫고 지나간 내 칼의 끝부분이 뒤통수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일격이었다.

실패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실패한 공격은 대개의 경우 반격을 허용한다.

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눈 하나를 잃은 거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허공에 떠 있던 나를 잡아챘다.

그리고 집어 던였다.

과연 거인답게 힘이 엄청났다.

나는 20미터 가까이 날아간 후 바닥에 뒹굴었다.

어딘가 한군데가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행운에 감사하며 바닥에서 일어선 나는 내가 빛의 기둥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멀리 않은 곳에 아르보그 공작도 있었다.

결국 나는 거인들이 들어가 있었던 빛의 기둥 중 하나로 굴러갔던 것이다.

그 순간 백색의 빛이 내 눈을 강타했다.

자동차의 전조등을 정면에서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에 장님이 되어버린 것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강한 빛 뿐이었다.

동시에 무엇인가가 내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휘감으며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었다.

바람도 아니고, 뜨겁거나 찬 기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깨끗하게 씻어내고 힘까지 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빛의 밝기가 사그라듬에 따라 그 감각도 사라져갔다.

눈을 멀게할 정도로 밝았던 빛이 천천히 어두워지며 형광등 정도의 밝기가 되었을 때 그 감각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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