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26화 (126/248)
  • 126. 아르보그 공작과의 조우

    지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진이 계속되는 것인지 땅은 계속 흔들리고 간간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도 떨어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돌부스러기는 돌덩이가 되었다.

    이러다가는 바위가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냥 건물 안에 있어도 천장이 없는 곳으로 튀어나가야 할 판인데, 나는 지금 2시간은 이동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복잡한 동굴의 밑바닥에 와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당장 무너질 것처럼 협박하듯 조금씩 무너지는 동굴에.

    방금도 내 어깨에 주먹만 한 돌이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지하의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동굴이 붕괴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를 끌어당기는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강박?

    그리움?

    갈망?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불완전한 존재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발굴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발걸음을 다시 동굴 입구로 돌렸을 때 5개의 붉은 점이 동굴 입구로 막 들어오는 참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발굴 현장에 있던 자들이 모두 동굴 입구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진 때문이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감정이 죽은 것 같은 사람이라도 지하 동굴 속에서의 지진이라는 예기치 못한 위험은 그들의 생존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나는 도망쳐 나오는 자들을 피해 통로와 연결된 다른 동굴로 뛰어들었다.

    도망치는 자들은 죽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발견했음도 잠시 멈칫했을 뿐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무리의 대부분 인간이었고, 일부는 수인족이었다.

    처음 보는 아인종도 몇 섞여 있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발굴 작업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경비를 서는 자들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망치는 자들 중에 거인족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미니맵에는 여전히 10여 개의 붉은 점이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들이 발굴용 작업도구를 들고 들어갔던 거인족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장이라도 동굴이 무너질 것 같은 지진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인족 중에는 나온 자가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지진 같은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그런 무엇인가가 말이다.

    아마도 그게 나를 끌어당기는 원인이겠지?

    잠깐 몸을 피한 사이에 도망칠 자들은 다 도망친 모양이었다.

    형광물질을 발라놓은 밧줄을 따라 도망치는 자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즉시 광장을 향해 움직였다.

    축구장 2개 넓이의 광장에 들어서자 동굴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어둑한 벌판에서 저 멀리 빛나는 별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비어있는 공간의 천장에 별처럼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붙어서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공동을 둘러보며 전체적인 모양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높이는 대략 150 미터.

    가로세로 역시 비슷한 거리였다.

    저격수로 몇 년, 수적질, 산적질, 이제는 군대까지 지휘하며 터득한 눈대중이니까 오차는 거의 없으리라고 자신한다.

    공동의 모양이 정사각형이라니.

    게다가 동굴 안에 있다가 밖에 나와서 보니 사각에 있던 출입구 동굴이 생각보다 많았다.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8개가 넘는다.

    멀리 어두컴컴한 곳에 있어서 확신할 수 없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 공동에는 최소한 10개 이상의 출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적이지 않다.

    이렇게 깊은 지하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공간이 자연적으로 생성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게다가 천장의 조명과 저 많은 출입구용 동굴들은 또 어떻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는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지형이다.

    나는 ‘용의 거처’라는 단어가 어쩌면 단순한 상징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을 많이 올려잡았다.

    광장의 중심에는 천막이 몇 개 남겨져 있었다.

    침구와 식량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경비를 서던 자들은 교대근무가 아니라 붙박이 근무였던 모양이다.

    뭔가 쎄한 느낌이었다.

    거인족 발굴자는 교대 근무였고, 경비를 서는 자들은 붙박이 근무?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은데?

    사냥이 끝나면 발굴자를 삶는 것이 아니라 경비 쪽을 삶는 거였나?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였다면 이쪽이 맞는 선택이기는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뭔가 상식적이지 않는 광경에 잠깐 시선이 갔지만 그들의 속사정은 그들의 것이다.

    내 관심은 금방 발굴지로 돌아갔다.

    발굴지는 사방이 10미터 정도이고 높이는 5미터인 구덩이였다, .

    발굴지 주변에 쌓여있는 흙과 돌이 쌓여있는 양을 가늠해보니 저 구덩이의 절반 정도는 원래 있던 지형이다.

    즉, 나머지 절반을 파내려가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계단을 발견했다는 뜻이겠다.

    구덩이 안에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나 있었다.

    계단은 흰색의 돌로 만들어진 평범한 계단으로 보였다.

    평범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저 계단을 타고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를 강제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그래.

    누구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그렇게 원하니 한 번 얼굴이나 보자.

    이상하게도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부딪치게 될 거인족이 걱정되지 않았다.

    분명히 지금 발굴작업을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갔을 거인족 10여 명이 있고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구덩이의 한쪽에 걸쳐 있는 커다란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맨질맨질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 연마기로 갈아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크기는 분명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사용할 것을 예상했다면 계단의 높이가 1미터씩이나 될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껑충거리며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은 나선으로 회오리치듯 배치되어 있었다.

    동굴이 뚫린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리고 계단 벽과 천장에는 반짝이는 작은 돌덩어리가 박혀 있었다.

    천장에 박혀 있던 반짝이와 작은 종류의 것일까?

    덕분에 밖의 광장보다는 계단이 있는 쪽이 훨씬 밝았다.

    구름이 잔뜩 끼어서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아침과 같은 정도의 밝기였다.

    생각보다 계단은 깊었다.

    뛰어내리는 것처럼 계단을 타고 이동했지만 바닥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지진이 점점 심해졌다.

    벽에 박혀있던 반짝이는 돌이 떨어져서 계단을 굴러다닐 정도였다.

    나는 그 돌을 주머니에 넣고 좀 더 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결국 5분 정도 지난 후 계단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단의 끝에는 출입구가 하나 있었고,

    그 출입구를 나가자 다시 거대한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100미터 정도.

    가로세로 역시 그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곳에 거인들이 있었다.

    안면이 있는 자와 함께.

    선제후 카알 아르보그 공작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칼마르에 내 운명을 걸기로 한 후에 가장 위협적으로 느꼈던 세력은 선제후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이었다.

    직접 만나본 그는 야심만만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정치가였다.

    실제로 그는 오랜 공작 끝에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집어삼키기도 했고, 칼마르를 끌어들이고자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칼마르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나로서는 아르보그 공작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시간을 끌며 상황변화를 살핀다는 소극적인 결론을 내기는 했지만 한 때는 그를 암살하거나 아니면 그의 세력으로 들어가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해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공작들에게서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게 아니면 너무 멀리 있는 그대였다.

    이를테면 2약의 하나였던 막시밀리안 공작이 있다.

    나는 칼마르의 백작이었던 리네아가 진지하게 대응을 하고 나서자 그가 깔아놓았던 안배가 모조리 박살나는 과거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같이 박살이 났었을 정도니 내가 그에게 갖는 감정은 무시나 경멸에 가까웠다.

    내가 경험한 막시밀리안 공작의 세력은 그리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막시밀리안 공작가는 혼란이 시작되자마자 아르보그 공작에게 잡아먹혔다.

    그렇다면 2중의 하나였던 글렌 공작은 어떨까?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이기는 했다.

    그는 꽤나 진지하게 칼마르를 잡아먹으려고 수작을 부렸다.

    심지어 선대 칼마르 백작의 사고사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실제로 부딪쳐본 그는, 칼마르의 이너서클에서 느끼는 위기감에 비해 별 것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능력에 비해 벌려놓은 일이 지나치게 많았고 모든 것을 자신이 손에 쥐고 행사해야 마음이 놓이는 종류의 통치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세력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시기에 그가 사라지자마자 그의 세력은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차라리 그가 고용한 암살자 단체가 더 위협적이고 충성스러웠다.

    2약의 나머지 하나였던 리딕슨은 이름도 거의 들어보지도 못한 자였고, 실제로 선제후들간의 내전이 벌어지자마자 잡아먹혔으니 의미가 없다.

    2중의 나머지 하나였던 지슬리 역시 산에서라면 모를까 바다에서는 칼마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좋은 거래 상대는 되겠지만 우리가 산으로 가지 않는 이상 위협적인 적이라는 위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더구나 가족끼리 꾸려나가는 중소기업 느낌이 나는 그의 세력은 확장성이 너무 떨어졌다.

    귀족연합자치령으로 묶인 세력들을 잡아먹어보자고 벼르고 있는 칼마르와 비교한다면 더욱 그렇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선제후들이라지만 2중 2약에 속하는 자들은 한 지역을 제패할망정 건국까지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그냥 역사 속에서 이름만 남기고 말 병풍 비슷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4강에 속하는 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선출직 황제를 배출한 적이 있는 가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가문 안에 뭐가 또아리를 틀고 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들 중 프리시오, 뱅트손, 스케티가 있다.

    그들 3명은 강력한 선제후였고, 공작이지만, 내게는 그냥 멀리 있는 맹수를 보는 느낌이다.

    모두 칼마르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것이다.

    프리시오에게 가려면 배를 타고 내해를 가로질러가야 할 판이고, 뱅트손과 스케티에게 가려면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권을 지나야 한다.

    그들 3명의 공작이 어떤 힘을 갖고 있든지 그 힘으로 칼마르와 연합자치령을 위협하겠다면 먼저 아르보그 공작부터 처리해야 말이 된다.

    그러니 칼마르에게 지금 당장 실제적인 위협이 되는 자는 하나 뿐이다.

    칼손 아르보그 공작.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인족 혼혈이 바로 그다.

    계단을 벗어나 공동으로 들어서자 아르보그 공작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마치 내가 이 곳에 들어서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누가 왔나 했더니 알고 있는 사람이 왔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말이 또렷하게 귀에 날아와서 박혔다.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가볍게 목례하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고 다시 전투태세로 돌아가는 나를 보고도 그는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윌리엄 백작. 가까이 오게.”

    그는 내게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주변에 있던 10명의 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멀리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빛의 기둥이었다.

    거인들 그리고 아르보그 공작 역시 빛의 기둥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솟아있는, 아주 약한 빛의 기둥이었다.

    가까이 가서야 비로소 보일 정도로.

    나는 그 빛의 기둥을 보자 무엇이 나를 끌어당겼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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