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지진 후의 결정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은 강한 기사였다.
움직임도 기세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기사와는 격이 달랐다.
전장의 분위기에 취해 날뛰던 자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명은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고, 다른 한 명은 키가 껑충하게 컸다.
그리고 둘 다 중간 크기의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칼은 제대로 교육받은 기사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진짜 잘 사용하는 고수는 얼마 없다고들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무기였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이런저런 무기들을 몸에 숨기고 있을 터였다.
들고 있는 칼이 부러지거나 상황에 맞추어 다른 무기를 써야 한다면 어떤 무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당장 눈에 띄는 것만 해도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칼이나 허리의 전투망치 따위가 있다.
달려온 그들은 나를 향해 합을 맞춘 듯한 공격을 시작했다.
피부색이 어두운 기사의 공격이 먼저였다.
쑥하고 칼이 들이밀어졌다.
아랫배를 향한 공격이었다.
빠르고 강력하지만 단순한 찌르기.
운과 실력이 따른다면 갑옷도 뚫을 수 있다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공격을 막기보다는 피해야 했다.
나를 엄습해 오는 칼날이 이것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서면서 칼끝을 피하는 순간,
이번에는 키가 껑충하게 큰 기사의 공격이 날아왔다.
위에서 내리치는 강력한 일격이었다.
머리를 둘로 쪼갤 것처럼 강맹하게 내리치는 칼을 완갑으로 밀어치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철로 된 완갑에서 불꽃이 튀었고, 그 불빛으로 그들의 얼굴에 가볍게 음영이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무표정하지만 귀찮다는 기색도 살짝 보이는 얼굴.
칼질을 하고 사람 죽이는 것에 익숙하다 못해 고여버린 숙련자들의 얼굴이었다.
내 아랫배를 찔러 왔던 피부색이 어두운 기사의 칼이 이번에는 허벅지를 노리고 옆에서 날아왔다.
나는 지금 철로 된 흉갑을 입고, 철로 된 완갑을 찼다.
그러나 나머지는 가죽으로 된 방어구를 걸쳐야 했다.
이것은 정탐을 위해 움직이는 자의 한계 같은 것이다.
모조리 철로 된 갑옷을 입는다면 체력 소모와 소음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허벅지에도 가죽으로 된 방어구가 둘러져 있을 뿐이다.
물론 가죽으로 된 방어구라고 해도 못 믿을 물건은 아니다.
찌르기가 아니고 가로베기이니 가죽 방어구라도 한 번쯤은 막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죽 방어구를 믿고 모험을 하기에는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가 않았다.
철판도 아니고 가죽의 방어력?
실력자 앞에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반격을 포기하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동굴 안쪽으로 한발자국 더 되돌아간 것이다.
광장을 밝히고 있던 빛에서도 한발자국 더 멀어진 것과 같다.
뒤로 물러서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키가 큰 기사가 어깨를 노리고 칼을 내리쳤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빛이 땅에서 하늘까지 흐르는 것처럼 칼날의 궤적이 흘렀다.
칼날에 반사된 빛이 그려낸 반원이 한순간에 허공에 나타났다.
이것은 못 피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방패도 아닌 완갑 따위로 쳐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박에서 뒤늦게 뽑아낸 단검으로 칼날의 궤적을 막아갔다.
캉!
쨍! 쨍!
귀를 찢는 금속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이 서로의 무기를 가격했다.
내가 신경써서 주문했던 단검은 적기사의 칼에 부딪치는 순간 청량하기까지 한 금속음을 내며 단숨에 깨어졌다.
그것은 적기사의 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칼도 금속음과 함께 부러져 나갔다.
질 좋은 강철과 평균 이상의 대장장이의 솜씨에 기대서 만든 무기지만 양쪽의 공격력이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서로의 공격력을 무기가 버티지 못했다.
나는 곧장 반대편 상박에서 단검을 꺼내며 그에게 달라 붙었다.
무기를 잃은 키가 큰 기사 역시 동시에 나에게 달라 붙었다.
순간 내 단검은 그의 목을 향했고, 무기를 잃은 그는 내 허리를 잡아왔다.
그리고 남은 적기사, 피부색이 어두운 자는 완전히 비어버린 내 옆구리를 향해 칼로 찔러왔다.
내게 목을 드러낸 키가 큰 기사와 그에게 허리를 잡도록 허용한 나는 서로의 시큼한 땀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바싹 붙었다.
순간 키가 큰 기사는 내게 더 바싹 붙으며 발을 걸어서 나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서로가 빈손이라면 모를까, 내가 단검을 쥐고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을 뻔히 보았는데도 그는 내 단검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되려 나를 몸싸움으로 땅에 넘어뜨리려고 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동료를 믿고 모험을 건 것이다.
내가 그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기 전에 자신의 동료가 내 옆구리를 찔러 줄 것이라는 그런 종류의 믿음 말이다.
내가 그의 발에 걸려 자연스럽게 넘어졌다면 그 믿음이 승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한 발을 뒤로 빼면서 버텼다.
키가 큰 기사의 발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처럼 뒤로 몸을 뉘이다가 몸을 약간 기울인 채 더 이상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이다.
그리고 찍어내는 것처럼 강맹하게 찔러오는 칼이 내 등을 스치듯 지나갔다.
바로 순간 나는 적기사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비틀었다.
내 허리를 잡고 있던 키가 큰 기사의 손아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즉사해버린 키가 큰 기사의 몸통을 잡은 채 곡예라도 하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리며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내 등을 따라 위로 지나가며 가죽 갑옷을 긁는 적기사의 칼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등을 스치고 지나갔던 칼을 방향을 바꾸어 위로 올려 친 것이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저 칼은 내 등쪽의 가죽 갑옷을 긁는 것이 아니라 내 뒤통수를 잘라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늦기 전에 몸을 돌리며 일어설 수 있었다.
내 뒤통수를 자르고 지나갔을 공격이 내 갑옷을 긁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적의 시체를 방패로 삼고 비도를 던지려는 순간 피부색이 어두운 기사의 칼이 죽은 기사의 몸통을 뚫고 튀어나왔다.
살아남은 기사가 동료 기사의 시체가 훼손되는 것을 불사하며 내게 공격을 가해 온 것이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가죽 갑옷이라고 해도 잘 만든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방호력을 가진다.
하물며 이런 비밀스러운 곳까지 파견 나올 정도의 기사라면 특별히 신경을 쓴 갑옷을 입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갑옷을 뚫고 칼이 튀어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란 나는 뒤로 구르는 것처럼 물러서면서 칼끝을 피한 후 동굴의 어두운 쪽으로 다시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적기사는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동료 기사의 사체를 칼에 꿴 채 그대로 내게 돌격해 왔다.
뭐 이런 미친!
나를 노리고 찔러오는 적기사의 칼끝을 보며 욕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귀족이 된 후로는 욕을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는 꼴을 보니 산적 시절의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처음의 기습 공격은 괜찮았다.
의외성이 있는, 제법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물론 칼이 시체에서 절반 가까이 튀어나와 있으니 찔리면 다치기는 하겠다.
그러나 기세를 잃고 당황한 병사를 상대로 한다면 모를까 저렇게 뻔히 보이는 공격에 당할 기사는 없다.
그런데 내게 저런 공격을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진짜 공격은 다른 쪽이다.
과연 뒤로 물러서는 내게 가까이 돌격해 온 적기사는 그 기세를 빌어서 내게 칼에 꿴 시체를 밀어서 던졌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칼을 뽑으면서 그대로 나를 향해 내리쳤다.
사람 하나 정도는 반으로 갈라놓을 것 같은 기세의 세로베기였다.
지금까지 가해온 공격 중 가장 강력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적이 가장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거리를 빼앗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다.
창을 든 적에게는 가까이,
칼을 든 적에게는 더 가까이.
그리고 미친 것 같은 담력과 단검 한 자루.
산적일 때 깨달은 싸움법이었다.
토벌군의 화살에 박살나기 전까지는 꽤 유용하게 써먹었다.
지금도 그 깨달음은 유효했다.
나는 내게 날아온 적기사의 시체를 옆으로 밀면서 피부가 어두운 기사에게 바싹 붙었다.
그것으로 그 기사의 공격은 무력화되었다.
내가 너무 가깝게 접근했기에 칼의 손잡이로 나를 때리는 공격이라면 모를까 칼날로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적기사에게 붙는 순간 한 손으로는 적기사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적기사가 잡고 있는 큰 칼의 손잡이를 같이 잡았다.
나는 당혹감으로 굳어지는 적기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대로 적기사를 동굴의 한쪽 벽으로 밀면서 달려갔다.
달린 시간은 정말 잠깐이었다.
적기사가 어떻게 반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몸에 숨겨두고 있는 무기가 많겠지만 그는 자신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는 적기사가 동굴의 벽에 충돌하기 전에 손으로 쥐고 있는 부분을 멱살이 아니라 목으로 옮겼다.
그래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적기사가 동굴의 벽에 충돌했을 때 목뼈에 충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피부가 어두운 적기사는 온몸이 마비된 채 어두운 동굴 한쪽 구석에 버려졌다.
그러나 내 마음은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급했다.
방금 동굴에서 발굴지가 있는 광장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지키는 기사 둘을 해치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 광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굴지가 있는 광장이 축구장 2개 정도의 넓이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하의 공동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소음도 멀리 퍼지는 구조다.
분명 광장 안에 있는 자들은 내가 적기사 2명과 싸우는 동안 낸 소음을 다 듣고 있었을 것이다.
경고하는 소리. 금속무기가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 신음까지.
지원이 안 오면 이상한 상황이다.
나는 광장 안에 있는 자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미니맵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5개의 붉은 점이 동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울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저들과 싸워서 이긴들 광장 안으로 들어가서 용의 거처를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쉽지만 지금 당장 들어가서 살펴보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예상 밖의 환경 때문에 탐색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일단은 동굴 안쪽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다가오는 자들과 쓸데없는 충돌을 할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지하 공동 전체가 흔들렸다.
동시에 뭔가 뜨거운 감각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진!!?
지하 공동뿐 아니라 동굴도 같이 흔들린 것 같았다.
동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져서 나를 때렸다
그렇다면 에시스칼리 산 전체가 흔들린 것일까?
동굴 안에서 지진이라니!
동굴 밖에서 홍수가 난 것 못지않게 위험한 상황이다.
잘못하면 생매장 당한다.
나는 공포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토벌당한 산적두목으로 참수당한 것이 지난 번 내 인생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전에는 별 것 없는 월급장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의 나는 백작령의 실세이자 백작부군이다.
그 모든 것을 놓고 땅속에서 산채로 파묻혀 죽는다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설사 죽음이 3회차 인생의 시작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곧장 동굴을 탈출하려고 했다.
형광 물질이 중간중간 칠해져 있는 밧줄을 따라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나는 지하 공동의 광장 중앙에서 나를 부르는 느낌적인 느낌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 내 영혼을 끌어당겼다.
나는 형광물질이 발라져 있는 밧줄을 보았다.
멀리 동굴 출구 밖에 광장도 보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내가 미쳤나 보다.”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