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24화 (124/248)

124. 지하의 발굴지

‘용의 거처’라고 생각되는 동굴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불과 10여 명의 거인족이 작업자로 들어갔기에 발굴지나 동굴 규모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가서 동굴 안을 이동하다 보니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동굴 입구는 그냥 무난한, 흔히 생각할 만한 동굴이었다.

거인족이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 유일한 특징일 정도라고나 할까?

약간 내리막이기는 했지만, 급경사는 아니어서 평지를 걷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동한 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동굴의 경사도가 갑자기 가팔라졌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구를 수도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그리고 조금 내려가다 보니 다시 약간 내리막인 길이 나왔다.

그렇게 급경사인 구간과 대체적으로 평탄한 구간이 번갈아 나오면서 동굴은 점점 지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어째 건물의 외곽을 빙빙 돌려가며 만들어놓은 계단을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동굴 내부를 이동해 보니까 동굴의 전체적인 모습이 머리에 들어왔다.

역시 수평적으로는 그다지 넓지 않다.

외곽으로는 다른 곳과 연결되는 동굴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작업자들이 이동한 동굴이 지나가는 넓이는 축구장의 절반 넓이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호모양으로 휘어지는 구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직적으로는 그 깊이가 어디까지 갈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나보다 1시간은 앞서서 출발했을 붉은 점의 위치는 계속 조금씩 변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동굴 안에서 계속 걷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설마 산 아래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니겠지?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동굴을 생각해 본다면 시간적으로 산 아래까지 이동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았다.

중간에 수직으로 내려가는 통로라도 있으면 또 모를 일이겠지만.

동굴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가진 도구는 미니맵뿐이다.

비록 사기적인 도구라고는 하지만 모든 정보가 내 위치를 기준으로 2차원으로 표시되는 것이 문제였다.

밖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동굴로 들어와서는 내 움직임 자체가 가로, 세로뿐 아니라 높이까지 있는 3차원이라서 미니맵에 표시되는 정보를 해석하는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투명한 지도를 여러 개 겹쳐서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지금까지 이동하면서 미니맵을 통해 파악한 정보로 억지로라도 그 구조를 유추해 본다면 동굴 지나가는 곳의 전체적인 모양새는 원통을 닮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 구조가 아닐까 싶었다.

동굴 자체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커지는 스프링을 세워놓은 형상이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동한 거리와 미니맵에 나타나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동굴의 전체적인 규모가 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날 것 같았다.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규모가 큰 동굴을 무턱대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자칫 길이라도 잃는다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나마 한가지 안심되는 점이 있다면 작업하는 자들이 미리 설치해놓은 표시줄이 있어서 작업현장까지 가는 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이 곳에서 작업하는 자들이 작업현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 밧줄을 바닥에 고정해서 표시를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밧줄에도 중간중간 빛을 내는 형광물질을 발라놓아서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게 해 놓았다.

조명을 잃더라도 밧줄만 발견할 수 있다면 어둠 속에서라도 더듬거리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밧줄만 발견할 수 있다면’ 이라는 조건조차 만만하지 않게 느껴졌다.

동굴의 복잡성 때문이었다.

형광 물질을 바른 밧줄을 바닥에 고정시켜 놓은 작업용 동굴만 일직선으로 쭉 있는 것이 아니다.

작업 통로로 쓰는 동굴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작업 통로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동굴들의 입구가 중간중간 계속 나타났다.

뭔가 착각해서 밧줄이 있는 통로를 벗어나서 다른 통로로 접어들기가 너무 쉬운 구조였다.

만약 그렇게 다른 통로 쪽에 일단 발을 들이면 그대로 죽음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밧줄이 있는 원래의 동굴로 돌아가지 못한다.

······만약 나라면?

글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미니맵이 3차원 입체지도로 업그레이드라도 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무리를 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굴은 걷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걷고 있었지만, 공기는 축축하기는 해도 신선한 편이었고, 불쾌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작업용 조명으로 동물이나 식물의 기름으로 만든 초를 이용하고 있을 텐데 환기가 이렇게 잘 되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출입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일지도 모르겠다.

동굴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없어서 다른 출입구를 찾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환기구 역할을 하는 통로는 있을 가능성이 컸다.

동굴의 상태를 살피고, 붉은 점도 살피고, 미니맵에 나타나는 투영되는 지도도 검토하면서 걷다보니 어느덧 1시간이 흘렀다.

이동만으로 벌써 1시간짜리 동굴이라니!

좁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가끔은 기어다니기도 해야하는 하는 일반적인 동굴이었다면 별것 아니었을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는 그냥 터널이라고 불러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작업용 동굴의 곳곳에는 손질을 한 흔적이 역력했고, 그 크기도 거인이 걸어다닐 정도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규모의 동굴에 손을 댄다면 적어도 남작령 하나 정도는 달라붙어서 몇 년을 작업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점점 놀라움에 눈을 치켜뜨는 나를 진정시키듯 붉은 점의 이동이 멈췄다.

원을 그리듯 빙빙 돌며 이동하던 그들이 미니맵의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발굴 장소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붉은 점의 숫자가 좀 다르네!

깜짝 놀라서 다시 확인했더니 내가 주시하고 있던 10여 개의 붉은 점 이외에도 30여 개의 붉은 점이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미니맵에 등장한 붉은 점의 숫자가 40개가 넘은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좀, 아주, 많이 많은데?

이러면 곤란한데······

거인족 한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세넷 정도가 되면 뭐 어쨌든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대여섯까지 가면 나도 애매해진다.

그런데 40개라고?

인간을 적으로 한다면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딱 보면 대충 견적이 나온다는 말이다.

여유있게 쓸어버릴 수 있겠구나.

또는

조금 빡셀지도?

지금까지 그 예측에서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인족은 조금 달랐다.

인간을 상대할 때와 달리 어림잡기가 힘들었다.

확신을 갖기에는 애매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개체 간의 차이도 심했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내게 당한 거인족은 인간과 비교하자면 실력 좋은 기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힘이 매우 강해서 나도 어느 정도 무리를 해야 했지만 그래도 막상 상대해보니 할만했다.

그러나 비밀 실험실에서 내가 상대했던 거인족은 자칫했으면 내가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위험을 느낄 정도였다.

만약 내가 신비에 기대지 않았다면 죽는 쪽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저 아래에 40개가 넘는 붉은 점이 있는 것이다.

이러면 지금까지 내가 해온 고민이 무색할 정도다.

나는 작업자로 들어간 10여 명의 거인을 두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40명이 넘는다니······

추가된 자들이 거인족이 아니더라도 심각한 사태다.

저들이 단순한 작업 인부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면 기본 전제를 다르게 잡아야 한다.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쪽으로 해야 겠다.

어둠이 내 보호막이 되어 주겠지.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동굴 속에서의 소음은 아주 멀리 가니까.

한 시간 가까이 더 걸어가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의 출구가 보였다.

조금 더 출구쪽으로 접근하자 출구 밖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출구 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빛이 있었다.

이런 규모의 조명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녁 무렵의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어스름한 느낌의 밝기였지만 사물을 분별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정도면 별도로 작업용 조명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래서 공기가 신선한 편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놀라움과 함께 낭패한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어둠을 도우미 삼아 조심스럽게 정탐을 하겠다는 원래의 계획을 폐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목을 길게 빼고 밖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동굴의 끝, 동굴의 출구 밖에는 거대한 광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축구장 2개는 됨직한 크기의 반구형 광장이었다.

마치 돔구장이라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광장으로 출구 나 있는 동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있는 동굴 이외에도 눈에 띄는 것만 5개가 되었다.

모두 비슷한 크기로 거인족도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출입구였다.

그러나 내 시선이 향한 곳은 광장의 중앙이었다.

그곳이 바로 내가 목표로 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용의 거처’를 발굴하는 곳.

몇 개의 천막이 보이고, 드나드는 사람도 보인다.

거인들은 안 보이고.

음? 거인들이 안 보인다고?

그때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의아함과 조급함이 뒤섞여서 경계를 게을리한 것이다.

에시스칼리 산을 지킨답시고 정예병과 수인족, 기사와 거인까지 동원해 버려서 막상 다른 지역에 지원을 갈 병력도 유지하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용의 거처에 경계를 서는 자가 없다고?

그럴리가!

“누구냐!”

내가 낸 인기척을 듣고 반응을 한 자들은 광장으로 나가는 출구를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출구 밖에 있던 그들은 내 부주의한 소음을 듣자마자 동굴로 뛰어들어왔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검을 들었고, 다른 하나는 창을 들었다.

그리고 묘하게 반짝이는 눈을 가진 자들이었다.

몇 번 저런 종류의 눈을 본 사람으로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저 눈은 절대로 평범한 눈이 아니다.

나처럼 밤을 낮처럼 보는 자도 있었고,

신비의 흔적을 보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만난 자들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바위 뒤에 숨은 나를 향해 정확하게 다가왔다.

마치 바위 뒤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말로만 들었던 투시라도 할 수 있는 자인나?

아니면 뭐 적외선 시야 같은 것?

“바위 뒤에 숨은 너! 다리가 보인다.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바위 뒤에서 나와라.”

그냥 밤에도 잘 보는 쪽인가 보다.

나는 다시 몸을 숨기기에는 늦었음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동굴을 따라 거꾸로 달려서 탈출하는 것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그 고생을 하고 왔는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저 안에 있는 ‘용의 거처’를 꼭 봐야겠다!

나는 바위를 잡고 몸을 위로 띄웠다.

바위에 있는 흠집에 발을 대고 뛰어서 단숨에 바위 위로 올라갔다.

예상 밖의 움직임에 당황해 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뛰어내리며 최대한 빨리 비도를 던져댔다.

제압사격의 효과를 바란 것이다.

비도는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일제히 날아갔다.

첫 번째 비도와 두 번째 비도 사이의 간격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쏟아지는 비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몇 걸음 뒤로 피하는 것만으로 내 공격을 피해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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