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용의 거처에 들어가다
산 중턱을 넘어서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인간이었다.
물론 평범한 병사들은 아니었다.
아르보그의 기사들.
병사가 아니라 기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숫자도 적지 않아서 기사를 마치 병사처럼 쓰고 있었다.
왜 아르보그 공작이 외부로 병력을 보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동시에 한 달이라는 기간도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 이내에는 이곳에 경계로 묶여 있는 기사들을 풀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용의 거처에 대한 발굴 작업 역시 한 달 이전에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너무 늦지 않게 온 모양이다.
나는 미니맵을 아예 활성화해서 내 눈앞에 띄워놓고, 미니맵의 안내에 따라 기사들을 피하면서 계속 산을 올랐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3~5명 단위로 조를 짠 기사들이 계속 순찰을 돌고 있었고, 중간중간 조용히 매복을 한 채 주변을 노려보는 기사들도 있었다.
순찰을 도는 기사들을 피해 움직이다보면 필연적으로 매복을 한 기사들에게 걸릴 수밖에 없게끔 동선을 잘 짠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미니맵의 안내와 밤의 어두움이 나를 보호해 준 덕분에 도중에 들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기사들 중 일부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주변을 좀 더 꼼꼼하게 수색하거나, 심지어 상부에 보고를 해야 겠다면서 자리를 뜨는 자도 있었다.
역시 기사가 일반 병사보다 여러 면에서 많이 뛰어나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계속 산을 오르자 기사들이 더 이상 순찰을 돌지 않는 지역이 나왔다.
산봉우리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는 기사라고 하더라도 접근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거인족이 등장했다.
거인혼혈이었던 아르보그 공작보다 훨씬 덩치가 큰 거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비밀 실험실에서 마주쳤던 거인 못지않은 덩치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거인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그들이 사는 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아서 구경하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과연 거인족 혼혈이 공작으로 있는 곳다웠다.
이곳에 거인족 말고 다른 종족은 없었다.
심지어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이 어느 쪽을 더 신뢰하는지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산중턱을 지나 산봉우리에 도달하자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사가 경계를 담당한 구역과 거인족이 담당한 구역이 한 눈에도 구분이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매복을 하던 곳은 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나무와 풀이 무성했는데, 거인족이 담당하는 구역은 황폐함 그 자체였다.
나무는커녕 작은 풀도 나지 않은 땅이었다.
아마 멀리서 에시스칼리 산을 본다면 마치 대머리를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으로 덮여있는 산의 꼭대기가 완전히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낮에 여기까지 왔다면 나무도 풀도 없는 곳이니 몸을 숨길 곳을 찾느라고 고생을 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밤이었다.
낮이 되기 전까지는 내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가 얻은 첩보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첩보에 의하면 아르보그 공작은 ‘용의 거처’를 발굴하는 중이라고 했다.
물론 첩보를 보낸 사람도 용의 거처가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단지, 우리는 아르보그 공작 같은 사람이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자산을 몽땅 포기하면서까지 용의 거처를 발굴하겠다고 달려들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이 적어도 막시밀리안 공작가 보다는 높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첩보를 보낸 사람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리고 만약 나의 은밀한 기대대로 ‘그 존재’와 관련이 있으면 대박인 것이고.
나는 발굴 작업을 하는 곳을 찾아 산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발굴이라고 했으니 어딘가에서 넓은 구덩이 같은 것을 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산의 일부를 깎아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밤이라서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땅을 파놓은 흔적은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사방이 다 트인 곳에서 작업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어디에서도 땅을 파헤쳐 놓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숲은커녕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이라서 사람의 시선을 피해 무엇인가를 숨기기에는 난이도가 아주 극악인 곳인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누렇고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산과 어디에 가든 눈에 띄는 커다란 거인들뿐이었다.
결국 밤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산중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산 중턱의 나무들 사이 몸을 숨긴 채 산봉우리쪽을 계속 살펴보았다.
땅을 파는 현장은 찾지 못했지만 의심이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었기 때문에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바로 거인족의 숙소였다.
거인족이 숙소에서 땅을 파는 현장으로 왕복을 한다고 생각하면 발굴현장과 숙소가 멀리 떨어져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인족의 이동을 기대하며 숙소를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숨어든 것이다.
과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날이 밝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간 후에 십여 명의 거인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든 채 순찰을 하던 거인들과는 달리 작업복에 도구를 든 모습이었다.
나는 바로 저들이 발굴 현장으로 가는 자들이고 확신했다.
그리고 내 확신은 보답을 받았다.
발굴현장으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한 것이다.
입구는 숙소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
숙소 근처에 산사태로 인해 산의 일부가 무너진 곳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거인의 몸을 다 가릴만한 크기의 바위가 산이 무너진 곳을 가린 채 서 있었다.
밤에 내가 탐색을 할 때 커다란 바위가 있구나하고 무심코 지나간 곳이었다.
거인들은 바로 그 바위를 잡더니 옆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거인 몇 명이 달라붙으니 금방이었다.
바위는 옆으로 밀려나고 바위 뒤에는 거인들이라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나타났다.
저러니 발굴현장을 찾을 수 없었지!
나는 발굴 통로를 보게되자 허무한 감정까지 들었다.
확실히 밤에 몰래 와서는 찾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잠시 후 거인들은 외부에 한 명만을 남겨놓은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교대라도 하듯 동굴 안에서도 일단의 거인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밤사이의 노동에 매우 지친 기색이었다.
힘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인을 지치게 만드는 노동이라니!
어떤 종류의 노동인지 궁금해지기는 한다.
나는 지금 당장 따라들어갈지 아니면 밤까지 기다릴지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동굴 안은 밤이든 낮이든 차이가 없다.
보통 사람에게 동굴은 낮에 들어가나 밤에 들어가나 똑같이 어두운 곳에 지나지 않는다.
불이 없다면 장님인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아침에 맞교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동굴 안에 있는 자들의 숫자가 밤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줄어들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낮에 저곳을 정탐한 후 밤에 산을 빠져나가는 것도 괜찮은 선택 같았다.
단 한 가지 망설이게 되는 것은 동굴의 위험성 뿐이었다.
잘 모르는 동굴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죽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안으로 곧장 들어간다는 결론 말고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곧장 저들을 따라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함부로 동굴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단 한 명이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말은 어딘가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자도 있다는 뜻이다.
나라면 그렇게 경계를 배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거인은 물론이고 멀리서 동굴 입구를 지켜보고 있을 다른 거인도 찾아서 제거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한 거인 뿐 아니라 대기 중인 거인들까지 몽땅 몰려와서 나를 찾으려 할 것이다.
저 거대한 덩치들과 동굴 안에서 싸운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동굴 입구를 관측할 만한 곳을 물색한 후 언제나 든든한 미니맵과 함께 거꾸로 적을 찾아 이동했다.
과연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아서 멀리서 동굴 입구를 관측하고 있던 거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떠들썩하게 싸워서 주변에 있는 거인이 몽땅 달려오게 만들 수는 없으니 선택의 여지없이 이번에도 밧줄을 이용해야 했다.
나는 동굴 입구를 살피며 앉아있던 거인의 뒤로 조용하게 접근하여 양손에 밧줄을 단단하게 잡은 후 그대로 목에 걸어서 당겼다.
앉아 있던 거인은 갑자기 목을 조르며 매달린 나를 떨구려고 했지만 나는 거인의 등에 붙어서 밧줄을 당기며 버텼다.
과연 거인다운 힘이었다.
인간이었으면 목에 밧줄이 걸린 순간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금방 기절하고 마는데 거인의 저항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격렬했다.
그러나 그 격렬한 저항도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점점 약해졌다.
신음도 내뱉지 못할 정도로 목에 걸린 밧줄을 강하게 당기니 거인의 정신이 점점 흐려져 가는 것이다.
결국 거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기절을 해 버렸다.
나는 거인을 옆에 뉘인 채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주물렀다.
갑자기 강한 힘을 쓴 덕분에 팔에 걸린 부하가 장난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열이 훅훅 오르는 것이 뜨거운 사우나에라도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기절한 거인의 목을 그어서 곧장 처리한 후 동굴 입구로 이동했다.
홀로 경계를 서고 있는 자는 생각보다 부주의하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 가까이 오는 자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설사 열심히 경계를 서고 있다고 해도 모든 곳을 한번에 볼 수 없고, 경계심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니 경계를 서는 자의 눈을 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그래서 경계를 설 때 최소한 두 명은 같이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거인족 경계병은 그러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 그들을 자만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 명은 내게 기습을 당해서 조용하게 죽었고, 다른 하나는 눈 뜬 장님이 되었다.
동굴 앞의 거인이 다른 곳을 보는 동안 조용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경계의 실패였다.
동굴 안쪽 입구에는 예상대로 따로 경계를 서는 거인은 없었다.
게다가 반가운 사실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동굴 안의 지형도 미니맵으로 표시가 되었다.
처음에는 2차원 미니맵이었지만 내가 이동함에 따라 미니맵이 3차원으로 확장이 되었다.
이러면 적어도 동굴에서 길을 잃고 죽을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동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은 거인도 편하게 다닐 정도로 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커졌다.
이 정도 크기라면 절대로 자연히 생성된 동굴이 아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일부러 만든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였다.
거인족보다도 훨씬 덩치가 큰 누군가가 말이다.
나는 동굴의 표면을 살펴보았다.
역시 자연동굴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래 있던 동굴에 누군가가 손을 대서 확장한 것이 틀림없다.
정말 ‘용의 거처’인 걸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저들은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미니맵에 모여있는 붉은 점을 향해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