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산 중턱 위로
“일단 한 가지는 명확하게 하고 싶다. 나는 수인족이 아니라 인간이고, 당신들과 싸울지의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진짜로 인간이라고?”
곰수인족의 남자는 믿기 어렵다는 티를 팍팍 풍기며 나를 꼬나보았다.
그러나 나는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며 밧줄로 그를 좀 더 꼼꼼하게 묶었다.
“믿기 어렵군. 인간이 나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다니. 더구나 이렇게 어린 인간이? 정말 믿기 어려워.”
다분히 종족차별적인 발언이었지만 곰수인족의 덩치를 보면 그런 편견을 가질 만했기에 따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칼을 꺼낸 후 그의 눈앞에서 땅에 박아놓았다.
그리고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일부로 살기를 흘리며 을렀지만 곰수인족은 방금 내게 사로잡혔을 때보다 여유를 보였다.
오히려 그는 내가 그와 싸울 필요가 없음을 설득하려고까지 했다.
“우리와 싸울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면서? 그렇다면 내게 협박할 것도 없다. 나를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지슬리와는 관련이 없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아르보그와의 계약에도 걸릴 것이 없다.”
곰수인족의 남자는 지슬리 뿐 아니라 아르보그에게도 존칭은 커녕 공작이라고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지슬리 공작과 관련이 없는 것은 맞지만 당신과 싸우지 않겠다고 결정을 한 것은 아니다.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묻는 말에 제대로 답변을 한다면 설사 싸워야 한다고 해도 명예롭게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렇다면 별문제가 없겠군. 뭘 알고 싶은가?”
묶인 채 무력하게 학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다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자 곰수인족 알프다르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역시 수인족의 문화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해 주었다.
“용의 거처? 그게 뭔데? 용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고? 그거 전설 아니었던가?”
그는 용의 거처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에시스칼리 산을 지키고 있는 것도 계약에 따른 임무라고 했다.
산 중턱까지만 정찰을 하고 있을 뿐 그 이상으로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산 중턱까지만 갈 수 있어. 그 이상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네. 자네가 가고 싶은 곳이 그곳인가 보지? 목표로 삼은 곳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아쉽군.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다른 것도 뭐든지 물어보게. 알고 있는대로 답해주지. 그런데 용의 거처같은 소문을 사실로 믿다니 자네가 확실히 어린 전사이기는 하군그래.”
그는 내 나이를 묻지도 않고 나를 어린 아이로 취급을 했다.
수인족과 인간족의 한계 수명이 거의 차이가 안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수염이라도 길러야 하나?
그러나 내 상념은 옆으로 밀어두고 지금은 내 궁금증을 충족할 때였다. 수인족에 대한 내 질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수인족들이 왜 아르보그 공작을 따르냐고? 그거야 간단하지. 그가 대가로 돈과 식량을 주거든.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매년 새로운 계약을 맺고 부족의 장로가 젊은 전사들 몇을 데리고 아르보그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아르보그 공작은 수인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용병을 쓰는 것처럼 계약을 통해 수인족의 조력을 받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라그닐드 같은 수인족 귀족도 있고, 아르보그 공작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도 확고해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내 의심에 알프다르는 모든 수인족이 같은 입장은 아니라고 했다.
“수인족 부족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가 똑같이 행동을 하겠나? 그리고 사실 우리 부족과 달리 아르보그와의 계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부족이 더 많아. 차라리 약한 부족을 약탈해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낫지 인간들의 땅에까지 와서 재주를 파는 것은 싫다는 자들도 한가득이라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그리고 마치 부족의 어린 전사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 보게. 어린 친구. 우리의 선택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면 반대로 좀 더 인간들과 밀착하는 부족도 있는 것이 세상의 균형에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소문에 듣기로는 아예 아르보그 공작령으로 부족의 터전을 옮긴 부족도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런 부족은 몇 개 되지 않아. 대대로 내려온 조상들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수인족에게는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거든.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을거야. 이유? 그거야 모르지. 예의가 있는 수인족은 다른 부족의 어려움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네.”
인간은 수인형으로 변신한 수인족의 나이를 추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수인족 알프다르가 적은 나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피상적인 내용은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막상 깊숙한 속사정을 파악하려고 하면 능숙하게 답변을 피해갔다.
아마도 그는 젊은 전사들을 인솔하고 온 부족의 장로쯤 되는 위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지위에 어울리게 다른 수인족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답을 거부했다.
“여기에 몇이나 있냐고?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네. 동료들을 위험하게 할 수 있거든.”
적이 어디에, 몇 명이나 있는가 하는 정보는 보통의 정찰 공작을 하는 인원이라면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정보다.
그러나 내게는 미니맵이 있다.
적의 위치와 숫자, 주변의 지형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치트키.
이것이 있는 이상 침투와 도주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를 능가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수인족과 아르보그 공작과의 관계에 대한 수인족 고위 관계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은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듣고 싶은 것은 다 들었나?”
“그렇소. 협조에 감사드리오. 알프다르 경.”
“그렇다면 줄을 풀어주게. 나는 싸우다 죽겠어.”
“그것은 곤란하오.”
“아니! 약속을 어길 셈인가?”
“맹세하건데 약속은 지켜질 것이오.
그리고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온몸이 묶인 채 이자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이지 라는 의문으로 가득찬 눈을 하고 있던 곰수인족의 눈이 경악으로 확장됐다.
말도 못 하고 윽윽거리며 저항을 하던 곰수인족은 놀라움과 분노, 체념을 거치며 정신을 잃었다.
나는 그의 목을 조르던 팔을 풀고 그를 바닥에 뉘어주었다.
인간에게 잘 통하는 경동맥 조르기가 수인족에게도 잘 통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목을 졸라서 기절시킨 곰인간 알프다르를 숲의 그늘에 끌고가서 나무 위로 끌어올려서 고정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야생동물에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정도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죽는다면 그의 운이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 후에 나는 그의 설명에 따라 숲의 그늘에 몸을 숨기며 정상을 향해 등산을 시작했다.
나는 백작이다.
리네아 백작의 남편이고, 리네아의 신분에 근거하여 나 역시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백작이라는 고위 귀족이 이렇게 홀로 잠재적인 적진 깊숙이 들어와서 정찰을 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아르보그 공작과 지슬리 공작의 상황에 대해 파악을 할 필요가 있으니 직접 그들의 영지를 둘러보겠다는 내 의견은 주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만약 내 주변의 조언자들이 나의 정찰의 실제 이유가 단순히 공작령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용의 거처’라는 특별한 곳을 살펴보겠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나를 보내지 않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렬한 반대였다.
그러나 나는 내 능력 덕분에 내가 직접 정찰을 한다는 것을 관철해 낼 수 있었다.
내 능력?
그렇다. 미니맵을 의미한다.
지형과 적을 파악하고 움직이는데에 미니맵보다 더 사기적인 보조 수단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지금까지 아주 잘 써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조심성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발각이 되어서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다.
물론 미니맵의 정체를 주변에 알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주변의 기사들에게는 멀리 있는 적도 느낄 수 있다는 정도로는 설명을 이미 해 두었다.
그들은 내 능력을 일종의 신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홀로 공작령들에 대해 정찰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억지로나마 납득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과연 미니맵의 도움은 예상대로라서 이렇게 ‘용의 거처’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중간에 곰수인족 하나와 대화도 나누고 말이다.
나는 수백에 달하는 순찰병과 수십 명의 수인족들을 피해서 산을 오른 끝에 결국 에시스칼리 산의 중턱을 지나게 되었다.
이제 목표에 거의 다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곳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했다.
뭐가 있는지 제대로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 위에 올라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지만 용의 거처를 발굴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의 거처’에 대한 첩보는 다른 사람과 함부로 공유할 수 없는 종류의 첩보였다.
그것은 ‘그 존재’와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용일까?
자신이 용족 혼혈임을 주장했던 제국 황제는 진실을 말했던 것일까?
그래서 용이 제국의 내전에 끼어든 것이었을까?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다.
나는 그 존재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지슬리 공작령의 작은 마을이라는 기록을 주목했다.
그리고 용의 거처를 발굴하느라고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내팽겨 쳐 놓은 듯한 아르보그 공작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용의 거처를 발굴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산 위에 있는 ‘용의 거처’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밤이 되었다.
아직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곰수인족이 깨어나서 나에 대해 신고를 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는데 의외였다.
적이 숨어들어왔다고 떠들썩하고, 새로운 병력도 투입되어서 경계를 한답시고 돌아다니고 하면, 내가 슬쩍 숨어들어가기에도 좋을텐데.
실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층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산 중턱 이후로는 누가 경계를 서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거인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발굴 작업을 한다고 했으니 그들의 힘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아르보그 공작이 절반이나마 그들의 일족이다.
그러니 비밀을 지키기에도 좋다.
수인족은 아닐 것 같았다.
곰수인족 알프다르를 보건데 인간과는 상식이 다른 부분이 많다.
비밀을 지키는 것에 예상하지 않는 구멍이 뚫릴 수 있다.
그러나 산중턱을 넘어서 발견한 자들은 거인족도 수인족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