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곰수인족 알프다르
곰수인족을 본 소렌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인족은 아르보그 공작의 동맹군이기 때문이다.
곰수인족 뿐 아니라 늑대수인족, 호랑이수인족 등이 지슬리 공작령의 산맥을 누비고 있었다.
만약 수인족이 없었다면 아르보그 공작의 군대가 산맥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찰병이로군. 이쪽으로는 더 이상 접근하면 안 된다.”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곰수인족이 경고했다.
다시 보니 눈이 붉은 것이 흥분한 상태였다.
그제서야 곰수인족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소렌슨은 흥분한 수인족을 더 흥분하게 했다가 찢겨진 동료들을 기억했다.
“알고 있소. 외곽 순찰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지슬리 공작의 레인저병이 점점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 순찰을 제대로 해라.”
소렌슨의 말에 곰수인족은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흔들어 보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다시 숲 안으로 사라졌다.
어쩌면 그는 살아남은 지슬리 공작의 병사를 발견하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슬리 공작의 병사들은 모두가 레인저라고 할 정도로 산에 익숙한 병사들이다.
그들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산에서라면 기사도 두렵지 않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소렌슨도 6개월간 그들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기에 그런 평판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항구에서 싸웠을 때의 그들은 숫자로 밀어붙이면 제압할 수 있는 정예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산맥으로 들어가서 다시 만난 그들은 정예병이라는 틀에서조차 벗어난 두려운 적이 되었다.
산에서의 이동은 평지보다도 빠르고, 일단 은신하면 찾을 수가 없었다.
매복과 기습 공격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정이 문제였다.
구덩이를 파고 날카로운 목창을 박아넣은 함정은 기본이고 지나가다가 트리거를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목창이 날아오고 바위가 떨어졌다.
게다가 정말 악랄한 것이 죽이기 보다는 부상자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함정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부상을 입은 병사를 호송하다가 그 한 명 때문에 두세명이 더 부상을 입고 낙오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겨두고 갈 수도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고, 탈영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상자를 포기하지 않고 날라야 하는 소렌슨의 입장에서는 함정에 걸린 병사가 즉사해 주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6개월간 그의 지휘를 거쳐간 병사는 3백명이 조금 안되는 숫자였다.
한 달이면 그에게 속한 병력이 싹 바뀌고, 그중에서도 절반 정도가 또 죽어 나갈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래서 소렌슨은 부하 병사들의 이름조차 외우지 않았다.
적어도 한 달은 살아남은 병사라야 비로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만약 수인족이 지슬리 공작의 레인저병들을 사냥하며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이렇게 막대한 희생을 치렀더라도 산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으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최소한 두 배에서 세 배는 더 죽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아르보그 공작의 군대가 강력하다고 해도 그 정도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희생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었다.
두 달 전부터 더 이상 이동을 하지 않고 산 하나를 둘러싸는 경계선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지형에 익숙해지고, 보급도 제대로 받게 되자 부하들의 사기도 올라갔다.
그리고 그동안 함정에 당한 경험을 활용하여 오히려 역으로 함정을 설치하면서 전보다 훨씬 안전해지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희생자가 하루에 한 명도 나오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나올 정도였다.
소렌슨은 이렇게 이곳에서 좀 더 버티다가 교체되기를 기도했다.
지슬리 공작군을 쫓아서 산맥 안으로 좀 더 진격해 들어간 병사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자신의 진짜 행운은 추격 부대에서 차출되어 이곳 산의 경계선을 지키는 임무를 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절대로 저 녹색의 지옥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
곰수인족 알프다르는 방금 지나간 순찰병들의 뒤를 살펴 보았다.
가끔 지슬리 공작의 레인저병이 따라 붙어서 기습을 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3명이 한 조로 돌아다니는 레인저병을 처리한 후라서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듣기로는 지슬리 공작의 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상황이니 이 산에 레인저병 1개 조가 이미 있었는데 또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곰수인족 알프다르는 다시 냄새를 맡으러 허공으로 코를 치켜올렸다.
방금 바람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냄새는 의외로 독하다.
며칠씩 씻지도 않고 숲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의 냄새는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다.
갑옷이나 신발의 냄새 역시 만만하지 않다.
잘 손질되어 있을 수록 더욱 그렇다.
예외라면 무기냄새인데, 대신 이것은 적이 가까이 있을 때 어디에 적이 있는지 파악하는데에 유용했다.
철 냄새는 숲에서 있을 수 없는 종류의 냄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수인족 알프다르는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이건 뭔가?
철 냄새 그리고 정향 냄새?
곰수인족 알프다르는 낯선 냄새에 당황해서 코를 공중으로 한껏 치켜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 기억이 떠올랐다.
무기를 손질하고 바르는 기름 중에서 아주 비싼 기름에는 정향이 들어간다는 것을.
철로 된 무기를 가진 자가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비싼 무기 관리용 기름을 사용할 정도인 자가.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싸구려 기름을 사용하는 일반 병사는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비싼 기름이었다.
그래서 알프다르도 뒤늦게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기사인가?
설마 귀족?
그러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휙하고 날아왔다.
올가미였다.
그가 볼 수 있는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온 올가미를 알아차린 것은 올가미가 그의 머리를 통과한 후였다.
다급하게 올가미를 잡아갔지만 누군가가 올가미를 당기면서 목을 죄고 말았다.
간신히 손을 집어넣어서 질식을 하는 것은 면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다였다.
알프다르는 올가미를 당기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채 질질 끌려갔다.
곰수인족은 수인족 중에서도 힘이 강한 축에 드는 편이다.
물론 거인족에게는 비길 바가 아니지만 인간보다는 월등하게 뛰어나다.
두세 명의 인간이 매달려 봐야 그에게는 인간의 어린아이가 매달리는 것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 자신의 목을 죈 후 당기는 누군가가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자신을 견제하려는 다른 부족의 수인족이 와서 협박을 하려는 것인가하고 의문이 그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그러나 알프다르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면서 10미터를 넘게 끌려간 후 목도한 것은 젊다 못해 어리게 보이는 인간이었다.
인간?
그럴 리가 없다.
곰수인족인 자신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인간형으로 있을 때 종족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녀석이다.
어느 수인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어린 놈이 자신의 힘을 이길 정도라니!
올가미로 다른 부족의 상대로 사냥을 흉내내며 노는 것도 그럴 만했다.
부족의 장로들이 오냐오냐 하면서 키웠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곰수인족 알프다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
운이 좋았다.
곰수인족 하나를 사로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는 그의 목을 쥔 올가미를 끌어 당겨서 내게로 가까이 잡아왔다.
곰수인족은 목에 걸린 올가미를 벗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직도 저항의지가 충만한 곰수인족이었다.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게 만들려면 교육이 좀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그를 향해 주먹을 한 방 먹였다.
오르벤 강체술의 힘이 담겨 있는 주먹질이었다.
그것으로 곰수인족은 기절을 하고 말았다.
용의 거처가 있다는 에시스칼리 산의 주변은 최소한 10개 조는 되어보이는 순찰 부대가 정기적으로 순찰을 하고 있었다.
1개 조가 30명으로 구성된 순찰 부대에는 놀랍게도 기사를 조장으로 하고 있었고, 30명 중 산에 익숙한 정예병이 절반은 넘었다.
이 정도의 정예 부대라면 지슬리 공작의 레인저병과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다.
그러나 이 산을 지키는 진정한 경계병은 수인족이었다.
순찰병들이 일정 시간에 일정 코스로 에시스칼리 산 주변을 돌아다닌 것과 달리 이 산을 지키는 수인족들은 산 곳곳을 두서없이 돌아다녔다.
특히, 인간형이 아니라 수인형으로 몸을 바꾼 채 있는 자들은 찾기도 힘들었다.
미니맵이 아니었다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눈치도 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미니맵을 참조하여 에시스칼리 산의 지형을 살피며 돌아다니던 나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끼고 급하게 맞바람이 부는 쪽으로 움직였다.
모든 수인족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수인족은 개 못지 않게 냄새를 잘 맡는다고 들었다.
바람을 잘 못타면 자칫 나 여기 있습니다하고 고함을 지르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람을 피해 움직이다가 곰수인족 하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되도록이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산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는 듯한 저 곰수인족의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입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올가미를 이용해 잡아 끈 것이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보라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내 주먹에 맞고 기절했던 곰수인족은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꽁꽁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를 보더니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봐도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어느 부족이냐? 아직 종족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은 어린 놈이 감히 켈리비르의 알프다르에게 주먹질을 하다니! 너희 부족의 장로들은 어린 너에게 예절도 안 가르쳤다는 말이냐!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그렇지 올가미질도 아니고 그렇게 함부로 주먹질까지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해! 성격 나쁜 놈에게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나, 수인족으로 오인당한 모양인데?
“칼마르의 윌리엄이다. 그리고 나는 어리지 않은데?”
“어리지 않다니! 어린 놈들은 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너와 함께 온 장로는 어느 분이시냐? 그리고 칼마르? 그건 어느 부족이지?”
칼마르를 모른다고?
제국 남동부 물류망의 중심 도시를?
바르거의 계승식 때부터 느낀 것이기는 하지만 수인족은 묘할 정도 외부에 대해 지식이 부족했다.
아르보그 공작의 주요 동맹 세력 중의 하나가 수인족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아예 따로 논다거나, 제국일에는 관심이 없다거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정보를 뽑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대화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