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20화 (120/248)

120. 용의 거처

전령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라 남작 부인.

리네아의 최측근이자 칼마르의 첩보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사라 남작 부인께서 직접 오시다니! 리네아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여백작께서는 무탈하게 계십니다. 백작부군께서 어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저도 얼른 이곳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행히 바르거가 도주를 선택한 덕분에 그나마 일이 쉬워졌습니다. 원래 계획보다는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저항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아직도 성문을 닫고 농성을 하는 귀족들이 있습니다만 조만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 달 정도? 그러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사라 남작부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얼굴을 보면 그 뜻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수고한 것은 알겠는데 아직 일이 안 끝났습니다.

물론 계속 수고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일이 안 끝났다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그녀가 직접 가지고 온 새로운 첩보가 좀 심각한 내용인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칼손 아르보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네 명의 가장 강력한 선제후들 중의 하나였던 아르보그 공작이다.

나는 그를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계승식을 치를 때 만나본 적이 있었다.

태연하게 우리를 향해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려고 했었다.

거인족 혼혈답게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자였고,

그 커다란 덩치 만큼이나 숨긴 것도 많은 자였다.

그는 수인족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거인족 역시 끌어들였다.

어쩌면 거인족은 거인족 혼혈인 그와 한 몸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박살을 낸 비밀스러운 실험을 주관하던 것이 거인족이었을 정도니까.

게다가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들을 향한 공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었다.

아르보그 공작는 결국 바르거 막시밀리안을 후원하여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고, 바르거를 새로운 막시밀리안 공작으로 세우는 것까지 성공했다.

게다가 바르거의 곁에는 아르보그 공작이 파견한 자들이 바르거의 손발 겸 감시역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막시밀리안 공작가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그런 그가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실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한 달 뒤에 병력을 보내겠다고 했다지만, 몰려 오는 적군을 바로 코앞에서 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 쓸데 없는 약속이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아르보그 공작을 향해 배신이라고 피를 토하며 외쳐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보그 입장에서도 그동안의 투자가 허공으로 떠 버리는 손해막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아르보그가 도저히 지원 병력을 파견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르거를 포기했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칼마르에서는 왜 아르보그 공작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냈다고 한다.

어째서 지원 병력을 보내지도 못할 처지에 몰렸었던 것인지 파악해낸 것이다.

과연 글렌 공작의 턱 바로 밑에까지 협조자를 박아두었던 칼마르 백작가답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디서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신뢰할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남작 부인께서 이렇게 직접 오신 거겠지요. 그래요. 아르보그 공작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합니까?”

“그는 지금 용의 거처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의 거처?

용은 그냥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신성 마르스홀롬 제국은 인간 위주의 국가라서 아인종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족이나 거인족은 드물게라도 제국 남부에서까지 볼 수 있을 정도다.

당장 아르보그 공작의 세력부터가 수인족이나 거인족의 지분이 상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제국 이외에서는 아인종을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주로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이나 제국 서부와 인접하는 왕국이 그들의 주요 거주지다.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지적 생명체의 주류라서 그렇지 다른 종족도 나름대로 그들의 세상을 건설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에서도 전설로 남아 있는 존재들이 몇 있다.

실제로 모습은 나타내지 않고 소문으로만 남아 있는 자들.

그들 중의 하나가 용족이다.

선출직 황제가 등장하기 전, 세습제 황제가 있던 시절의 제국 황제 중에는 자신이 용족 혼혈임을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신비하고 강력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용족의 모습은 전설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사람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라는 기록도 있고, 거대한 파충류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용족에 대한 전설의 끝은 언제나 동일하다.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용족은 자신의 힘을 노리고 접근한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를 입은 후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는 비극이다.

그래서 용족에 대한 전설은 인간의 배타성에 대한 경계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메타포적인 이야기라고 받아들여져 왔다.

실제로 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상식과 지식이 있는 성인이라면 ‘그것은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용의 거처를 발굴하고 있다고?

사라 남작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의 내가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다.

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하나.

그리고 용의 거처라는 것이 모든 것을 내팽개쳐두고 발굴을 위해 매달릴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또 하나.

“그 용이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용이 맞습니까? 제국의 황제와 사랑에 빠졌다는 전설이 있는 그 용족?”

“예. 그렇습니다. 윌리엄 공. 왕국 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바로 그 용이 맞습니다. 발굴하고 있는 용의 거처가 바로 그 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인 것은 틀림없답니다. 게다가 아르보그 공작은 용의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보았던 아르보그 공작은 냉철한 정치가였다.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병신짓을 하는 멍청이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설 속의 이야기를 믿고 발굴 작업을 하느라고 바르거까지 내팽개쳐 놓았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르보그 공작은 지슬리 공작의 땅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일까?

새로운 지슬리 공작이 된 아르누트 지슬리가 꽤나 제대로 반격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사라 남작 부인에게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

산에서는 숫자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실력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이고.

아르보그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 소레슨이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르누트 지슬리를 쫓아 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인간인지 뼈에 새길 정도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순찰 중에 그는 자신의 감을 믿고 고함을 질렀다.

“정지. 이런! 몸을 숨겨라!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의 경고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무 사이로 화살이 날아왔다.

미처 몸을 숨기지 못했던 병사들이 몇 명 화살에 맞아서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소렌슨은 자신을 노린 화살을 쳐낸 후 고함을 질렀다.

“쫓아가지 마!”

“기사님! 하지만 적이 저기에 있습니다!”

“명령했다! 쫓아가지 말라고!”

지나치게 열정적인 신병 하나가 멀리서 화살을 쏜 후 곧장 도망쳐서 숲속의 그림자 사이로 사라지는 적들을 보며 항의했다.

그러나 소렌슨은 신병을 윽박지르며 자제시켰다.

“조장! 왜 쫓아가면 안 되는지 저 애송이에게 설명해 줘라. 부상자는 움직일 수 있으면 같이 가고 정 힘들겠으면 여기서 대기해라.”

곧이어 조장이 신병에게 주먹질과 함께 왜 함부로 적을 쫓아 숲으로 가면 안 되는지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조장은 아직도 뚱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부하 병사를 선발대로 지정하고 적의 도주 방향을 따라 10여 미터 정도를 이동했다.

조장은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목 정도 높이로 산길을 가로지르는 나뭇가지였다.

그는 신병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을 가리킨 후 나뭇가지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순간 나뭇가지가 거세게 튕기면서 나무창이 그 자리를 지나갔다.

숲에 버려진 나무를 대충 다듬고 끝을 뽀족하게 만든 나무창이었다.

그 장면을 본 열정적이었던 부하 병사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만약 그가 적을 쫓아갔다면 분명히 몸통에 창을 꿰였을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왜 자신과 함께 있는 병사들의 눈이 죽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한걸음한걸음마다 함정과 기습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곳이었다.

그제서야 부상을 입고 남겨진 병사들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돌아올때까지 살아남아 있을까.

그들의 죽어 있는 눈을 보니 그 답을 자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렌슨은 이제 30명이 채 안 되는 부하 병사들을 이끌고 숲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의 지휘관.

그것이 기사인 그의 직책이었다.

실력 좋고 연줄 좋은 기사들이야 기사단에 속해서 종자와 시중을 들어줄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지만 그와 같은 기사들은 병사들의 지휘관이 되어서 바닥부터 박박 기어야 했다.

그와 같은 기사들?

그렇다.

실력이 좀 떨어지거나 아니면 연줄이 좀 약한 기사들이다.

소렌슨의 경우는 연줄이 약한 경우였다.

실력은 또래의 누구 못지 않다고 자부했지만 몇 대씩 대를 이어가며 아르보그 공작에게 봉사해온 기사 가문과 달리 그는 인맥이랄 것이 없었다.

영지전에 참전했던 부친이 모셨던 기사의 시종로 들어갔다가 실력을 인정받아서 종자가 되고 결국은 정식으로 기사까지 된 경우였다.

기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자격을 갖췄을 뿐, 누가 선물로 현금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그가 걸치고 있는 갑옷과 들고 있는 칼까지 모두 빚이 아닌 것이 없었다.

부친의 동료들과 모시던 기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렌슨에게 이번 전쟁은 무척 중요했다.

전공과 상금, 그리고 약탈물까지 알뜰하게 챙겨야 했다.

한 몫은 잡지 못하더라도 빚은 갚아야 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이번 전쟁의 목표였다.

전쟁이 벌어진 초기에는 목표가 금방 달성될 것 같았다.

지슬리 공작의 항구를 들이쳤을 때는 한 번 전투로 흉갑과 완갑까지 살 수 있을 정도의 배당금을 분배받았다.

그 이후에도 지슬리 공작군의 잔당을 추격해서 산으로 들러가기 전까지 소소하게 이것저것 챙길 수가 있어서 갑옷 뿐 아니라 어쩌면 전투마까지 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장미빛 기대는 산맥에 들어가자마자 박살이 나 버렸다.

평지에서의 지슬리 공작군과 산 속에서의 지슬리 공작군은 전혀 다른 군대였기 때문이다.

산 속에서의 첫 날에 그는 부하의 2/3를 잃었다.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은 전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부에서는 그의 운을 높이 평가하고 계속 부하를 붙여 주었다.

그렇게 6개월을 넘게 숲에서 지낸 것이다.

물론 점점 산맥 안 쪽으로 이동하기는 했다.

초기에는 가끔 항구도시로 나와서 한숨 돌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몇 개의 산을 넘어야 멀리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과연 자신의 운이 언제까지 괜찮을지 걱정스러웠다.

그 때였다. 숲속이 유난히 조용하다고 느낀 것이.

이런! 하루에 두 번이나!

“습격을 조심!”

그가 명령을 마치기도 전에 숲에서 불쑥 곰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아니 곰이 아니라 곰인간, 수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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