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탈출 성공
다가오는 기병을 보며 라그닐드는 바르거에게 경고했다.
“뚫고 지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바르거 공. 적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다가오는 자들을 죽이고 말을 빼앗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소?”
“마을 쪽에서 우리를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충돌이 벌어진다면 말을 가진 자들은 다 튀어나오겠지요. 저자들을 제압하기도 전에 다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상황이 더 안 좋아질 뿐입니다.”
라그닐드의 경고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했다.
지금 당장 도망을 가야 한다.
이미 한 번 도망친 그였다.
한 번 더 도망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맞는 선택일까?
바르거는 여기까지 자신과 함께 온 일행을 돌아보았다.
말을 끌고 있는 자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들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 채 며칠을 이동했기 때문에 전투는커녕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여기서 다같이 죽을 것이 아니라면 선택은 뻔했다.
바르거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도주합시다.”
“다들 들었지? 공작께서 도주를 명령하셨다. 다들 재주껏 도망가도록 한다.”
라그닐드에게 중요한 것은 바르거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따라오면 그만이다.
못 따라온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
라그닐드는 바르거와 함께 곧장 움직였다.
라그닐드와 그녀의 일행 그리고 바르거와 몇 명의 기사가 전부였다.
모두 말을 탄 자들이었다.
그러나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이리저리 흩어져서 도망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기병들이 속도를 올리며 호르라기를 불어댔다.
적을 추격하라는 신호였다.
잠시 후 멀리 보이던 작은 마을에서 일단의 기마대가 뛰쳐 나오기 시작했다.
중갑기병은 원래 보기 드문 병과다.
대규모 전쟁에서나 비장의 한 수로 등장하는 아주 비싼 병종이다.
그래서 지금 말을 타고 바르거의 일행을 추격하는 자들은 경기병이거나 아니면 아예 이동할 때만 말을 타고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기마보병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빠르고 지구력도 뛰어난 병종이다.
지칠대로 지친 바르거 일행이 간단하게 떼어내고 도망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따라잡힐 것 같은데!”
“조금 더 달려요! 우리 일행이 기다리기로 한 곳이 멀지 않으니까!”
아르보그 공작이 북쪽에서 발이 묶여서 바르거 막시밀리안에 대한 지원이 늦어졌다고 하지만 바르거 막시밀리안 같이 중요한 정치적 자산을 아예 방치할 수는 없었다.
혹시나 예상보다 빠르게 바르거가 무너진다고 해도 그가 난전 중에 죽는 일도 절대 피해야 했다.
그래서 아르보그 공작은 라그닐드에게 전권을 맡겨서 막시밀리안 공작령에 파견한 것이었다.
라그닐드는 아르보그 공작의 기대에 십분 부응하여 별다른 지지세력이 없었던 바르거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그녀가 데리고 온 기사들과 함께 바르거의 경호는 물론 귀족들의 숙청까지 관여하며 막후 실세로 활약을 해왔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만약 바르거가 탈출을 해야 한다면 도와줄 사람들도 몇 군데 배치해 두었을 정도였다.
과연 라그닐드의 준비성 덕분에 바르거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연합자치령의 기병들이 바르거의 일행의 뒷덜미를 잡아챌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무엇인가가 숲에서 튀어나왔다.
곰을 닮은 거대한 인간이었다.
그는 몸통박치기로 추격하던 기병의 말을 들이박았다.
말은 몇 군데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 중의 하나가 그 허약한 다리였다.
충격으로 스텝이 꼬여버린 말은 스스로 다리뼈가 꺾이며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쓰러진 말을 피하려다가 말들 사이에 연달아 충돌이 벌어졌다.
말들이 넘어지고 기사가 낙마했다.
30기에 가까웠던 기병들은 갑자기 닥친 혼란에 동료를 잃자 속도를 늦추며 한데 뭉쳤다.
급습에 대비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도망치던 자들도 반격을 위해 말을 멈추고 있었다.
그때 곰을 닮은 인간은 다시 사람 머리통만한 돌을 집어던졌다,
그 돌에 정통으로 맞은 기병 하나가 낙마하는 순간 뒤늦게 수인족 기병이 숲에서 쏟아져 나왔다.
10여 기가 넘는 기병들.
추격하던 연합자치령의 기병들에 비해 숫자는 적지만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방금 전투라도 치르고 온 것 같은 분위기의 기세였다.
실제로 수인족 기병들의 갑옷에는 아직도 흐르는 피가 보일 정도였다.
중갑기병은 날아오는 화살도, 내리치는 워해머도 막을 수 있는 두꺼운 갑옷을 입는다.
심지어 그런 갑옷을 말도 입는데, 말의 크기조차 일반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장하다.
중갑기병은 곰하고 충돌해도 멀쩡할 정도로 튼튼한 병종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기습을 당한 기병은 중갑기병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죽 갑옷을 기본으로 입고 철로 된 흉갑을 걸친 정도였다.
말은 날렵하지만 덩치도 작고, 마갑도 걸치지 않았다.
비록 상대방도 비슷한 무장이었지만 그들은 돌격하는 중이었다.
그 무게에 그 속도까지 결합한 충격을 견뎌내기에 경기병은 너무도 약한 존재였다.
순식간에 기병이 말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특히 말을 다루는 실력이 떨어지는 하마기병은 전원 낙마해 버렸다.
“크아앙!”
곰을 닮은 인간이 아직 살아남은 기병을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그 위협적인 소리와 기세에 말이 겁을 먹고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손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머리를 후려쳤다.
말은 혀를 내빼물며 쓰러졌다.
즉사였다.
그러나 연합자치령의 기사는 자신의 말이 쓰러지는 순간 어떻게든 뛰어내릴 수 있었다.
이미 주변의 동료들은 낙마하거나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는 중이었다.
아직 말을 타고 있는 동료들은 난전으로 돌입해 버렸다.
지금까지 추격을 당하던 적들조차 전투에 끼어들어서 수적인 우위도 없어져 버렸다.
도망칠 수 없다면 이제 곧 올 지원을 기다리며 시간을 끄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다.
기사는 지체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보다 절반은 더 커보이는 곰수인족이었다.
자신의 애마를 일격에 참살해 버린 곰수인족은 희번득 거리는 눈빛으로 다음 희생자를 찾고 있었다.
기사는 과감하게 곰수인족의 등판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곰수인족의 피부는 마치 갑옷과도 같았다.
피부에 흠집이나 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곰수인족의 시선이 기사를 향해 돌려졌다.
본능적인 살의에 불타는 야성이 그 안에 있었다.
기사는 다시 한 번 칼을 꽉 잡고 강하게 찔러들어갔다.
이번에는 배를 노린 공격이었다.
그러나 곰수인족의 반응 속도는 기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칼은 곰수인족의 배에 닿기도 전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가벼운 후려치기 한 방으로 기사의 팔까지 병신으로 만들어 버린 곰수인족은 단검을 방불케 하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전투 도끼를 잡아드는 기사를 향해 다시 앞발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투구도 소용이 없었다.
목이 꺾여버린 기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기사 하나를 죽여버린 곰수인족은 근처에 있는 기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인족 기병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접전을 벌이고 있던 적기병을 말과 함께 들어서 집어 던졌다.
사람과 말을 합친 무게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어서 그다지 멀리 던지지는 못했지만 말에 깔린 적기병이 부상을 입고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그때 곰수인족을 향해 창을 겨누고 달려든 기사가 있었다.
곰수인족은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온 창에 배를 슬쩍 스치며 핏줄기를 보였다.
순간 곰수인족의 눈빛이 시뻘겋게 변하며 창으로 찔러온 기사를 잡아갔다.
기사는 예상보다 빠른 곰수인족의 움직임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잡혀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곰수인족은 기사의 팔을 뜯어낸 후 아직 하마하지 않는 적 기사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다시 적을 향해 돌진했다.
난전은 길게 끌지 않았다.
개개인의 기량 차이가 심한 데다가 기습까지 당한 연합자치령의 추격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야 했다.
부상자들도 살아나지 못했다.
수인족 기사들이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적의 시체까지 훼손하는 와중에 부상자들이라고 해서 멀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드바이손!”
라그닐드가 곰수인족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곰수인족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크게 울부짖었다.
“정신차려! 수드바이손!”
라그닐드가 곰수인족의 뺨을 후려치며 다시 고함을 지르자 그제서야 곰수인족의 눈빛이 맑아졌다.
“그만 때려도 돼요. 라그닐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왜 이렇게 정신을 놨어? 무슨 일이 있었나?”
“전투 중이었습니다. 용병 백인대 하나가 나타나서 거의 다 죽였을 때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투 직후에 정신없이 오다보니까 흥분이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하여간 그 놈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래도 이런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잖습니까? 조금 정신이 나갈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앞에는 전멸해버린 연합자치령 추격대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어딘가 부서지거나 부러진 모습이었다.
살아남은 몇 마리의 말을 제외하면 말도 죽어버린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 이럴 때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어쨌든 우리는 이겼고 살아남았으니까. 수드바이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이게 전부인가?”
“예.”
아직도 붉은 눈으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수인족 기병들이었지만 라그닐드가 고함을 질렀을 때부터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라그닐드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수인족인 그들은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복종한다는 것이 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적이 있으면 죽여. 소문이 도는 것은 되도록 막아야지. 그리고 살아남은 말은 끌고 오도록. 여기를 빨리 떠야 해.”
라그닐드의 명령에 수인족 기병이 아직 숨을 붙이고 있던 부상병들을 찾아서 죽여버렸다.
아무리 죽은 척을 하고 있어도 심장소리까지 듣는다는 그들의 예민한 감각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 후 모든 뒷처리를 마친 그들은 다시 아르보그 공작령을 향해 출발했다.
*
나는 바르거가 공작성에 도망친 것을 알게 되자마자 추격대를 파견하는 한편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공작령을 버리고 아르보그 공작을 향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열심히 선전했다.
성문을 잠그고 성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하는 자들에게도 전령을 보내서 한 달 후의 지원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렸다.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자들의 귀에도 바르거의 도주에 대한 소문이 들어갈 수 있도록 영지마다 알림판을 세우기도 했다.
덕분에 막시밀리안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졌다.
연달아 무방비 영지를 선언하고, 연합자치령 군대에 종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귀족이 늘어났다.
그것은 아르보그 공작에게 포섭된 것으로 보이던 귀족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아르보그 공작은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것일까?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손에 넣기 직전까지 갔던 막시밀리안 파벌을 내버려두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내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칼마르에서 전령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