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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8화 (118/248)
  • 118.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 필요한 것

    뒤늦게 기습을 알게 된 공작성에서는 자신이 어디로, 왜 뛰어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일반인 뿐 아니라 병사조차 있을 정도로 혼란이었다.

    공작성 내부에 있는 병사들의 숫자 자체는 제법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휘 통제가 무너져서인지 우리를 만나면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것은 기사로 보이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르거가 머무르고 있을 내성으로 돌입하자 그제서야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저항하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하킨슨 남작령의 깃발.

    바르거의 유일할지도 모르는 지지자의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래보았자 일개 남작령의 영지병이고 기사 역시 시골 기사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명예스럽게 싸우고 있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쿨럭! 으···..”

    내성 겸 저택의 내부로 통하는 입구를 막고 있던 기사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전투망치의 자루를 내려다보며 무릎을 꿇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그때까지도 그의 손은 여전히 칼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기사와 함께 통로를 막고 있던 병사들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어디 소속인가? 바르거는 어디로 갔나? 너희가 전부는 아니잖아. 어디로 간다고 했지?”

    용병들이 달라붙어서 하킨슨 남작의 병사들을 강하게 다그쳤다.

    방금까지도 용명하게 저항하던 그들의 기세는 패배와 함께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들을 통솔하던 기사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주먹 몇 대에도 금방 원하는 답을 토해냈다.

    “바르거의 행방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습니다만 나머지 병력은 모두 알현실 쪽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병력이 예상보다 너무 적지 싶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상보다 절반 이하? 막시밀리안 공작측 귀족들의 깃발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남은 곳은 알현실 뿐이니 그곳에 가 보면 알겠지.”

    알현실이라고 부르는 곳은 공작의 저택에서 가장 큰 공간이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영지 관리들의 충성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지금에 와서야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지만.

    아무도 막지 않은 알현실의 입구를 지나니 수백 명은 충분히 수용할 정도로 너른 공간이 펼쳐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막시밀리안 공작가의 위세를 자랑하는 파티와 무도회가 계절마다 열리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과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 한 가운데에 하킨슨 남작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하킨슨 경. 좋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윌리엄 백작 각하. 저 역시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식은 아니었을텐데.”

    “하킨슨 경 혼자 여기에 있는 것을 보니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이곳을 떠난 모양이군요. 언제 떠났습니까?”

    “나에 대한 회유도 없이 바르거 공에 대해 묻는 것을 보니 이미 여러분들 사이의 합의가 끝난 모양이군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하킨슨은 바르거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개인적으로는 장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 이전부터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유력한 영주였다.

    만약 바르거가 도망을 친 후 재기를 꾀한다면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줄 자다.

    그래서 무방비 영지를 선언했던 영주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편을 갈아타고 내 휘하에서 종군을 하고 있는 귀족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킨슨의 제거가 필수라는 조언을 해왔다.

    나 역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잠시 멈칫 했지만 그래도 금방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죽은 자가 몇 명인데.

    귀족 하나가 더 죽는다고 해서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다.

    “바르거는 어디로 갔습니까?”

    반복되는 내 질문에 그는 엉뚱한 말을 했다.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그가 공작이 되기 전부터 그의 형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귀족들 사이에서 돌았지요. 그래서 그의 형이 유복자만 남기고 죽었을 때, 그가 공작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귀족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 역시 그가 뛰어난 막시밀리안 공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칼손 아르보그 공작에 의해 죽었을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 그는 우리의 예상대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제국 남서부의 강력한 맹주로 거듭 났습니다. 명목상의 종주권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공작가의 지배하에 들어온 귀족이 급증했지요. 당신들 칼마르 역시 우리의 압박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황제 공위 기간이 길어지자 이해할 수 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지요. 마치 나라를 하나 세우기라고 할 것처럼.”

    나름대로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충성심이 지나쳤던 것이 아닐까?

    “공작령 직속의 군대를 늘리고, 휘하 귀족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계속 시도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글렌 공작과 비교해서 정도는 덜 하지만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도 만만치 않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칼마르에서도 눈치챈 것이 있지요?”

    “달라벤 강과 관련된 음모는 다 막시밀리안 공작의 짓으로 보고 있습니다.”

    “패트슨 남작이 다 불어버린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달라벤 강 뿐 아니라 플렌스 백작가를 통해 어떻게 해보려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잘 안되기는 했지만.”

    나는 내 주변의 병력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곧 죽을 귀족을 넋두리를 계속 듣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킨슨 남작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조만간 늦어도 몇 년 이내에는 황제가 선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황제 선출을 늦추면 제국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선제후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선출되면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의 지나친 행위는 분명히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불만을 가진 귀족도, 고발할 귀족도 많았으니까. 반역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바르거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그런데 내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 진짜 선제후들이 내전을 벌이다니. 처음에 그 사실을 들었을 때는 다들 미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르거는 어쩔 줄 모르던 나를 무시하고 곧장 글렌 공작을 공격하더군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선대 막시밀리안 공작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는 나와 달리 제국이 붕괴하고 선제후들끼리 내전을 벌이는 미래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의 등을 찌른 것이었지요.”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다 쓸데없는 평판이었습니다. 나보다는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낫습니다. 적어도 그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가장 유리한 길을 찾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으니까요. 나라면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곳에 있는 겁니다. 막시밀리안이라는 이름을 위해서는 내가 여기에 남고 그가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도망친 바르거를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는 말을 참 길게 한다.

    나름대로 지금까지의 회한이 있어서 자신의 내린 결정에 대한 설명도 내게 남기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킨슨 경. 경은 그분 또는 그 존재, 아니면 그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내 질문에 하킨슨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선제후들이 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10년 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은 대회의가 시작되었을 때일 겁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선제후들간의 전투가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가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해주었다.

    제국의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서 가장 대전제가 되는 정보를 알려 준 것이다.

    그제서야 하킨슨은 자신이 들은 말이 가지는 함의를 깨닫고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더듬대며 내게 질문을 했다.

    “그, 그렇다면 그 분 아니 그 괴물? 어쨌든 그 존재는 뭐지? 뭡니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는 손짓을 했다.

    미리 약속된 공격신호였다.

    높은 분들끼리의 대화를 들으며 언제 전투가 시작되려나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양쪽의 병사들은 내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난전에 돌입했다.

    하킨슨의 병사들도, 우리쪽 병사들도 이 전투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미 제거 대상으로 찍힌 귀족과 함께 있으니 그 귀족이 죽기 전까지는 싸워야 하기에 하킨슨의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했다.

    그러나 하킨슨의 생각은 전투에 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한 말에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의 사건을 복기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는 잘 모르겠다.

    동작이 빠른 용병 하나가 그를 향해 도끼를 던졌고, 그 도끼는 한참 생각에 잠겨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던 그의 두 눈 사이에 박혔다.

    곧장 전투 종료가 선언되었다.

    *

    바르거는 아르보그에게로 탈출할 것을 결정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작성을 떠났다.

    그의 가족도, 가까운 측근도 챙기지 않았다.

    성에서 나가는 길에 만난 그의 장인, 하킨슨 남작에게 자신은 아르보그 공작에게 갈 것이라고 통고한 것이 다였다.

    그를 따르는 것은 몇 명의 기사와 십인대의 병사 뿐이었다.

    물론 라그닐드와 그녀의 일행도 함께였다.

    암도를 거친 후 숨겨진 쪽문을 열고 공작성을 나온 그들은 곧장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 추적은 없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막시밀리안 공작성을 향한 공격은 다섯 갈래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항을 명령했지만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그의 명령을 따랐을지는 그도 몰랐다.

    더구나 저항을 했다고 한들 제대로 버틸 수는 있을까라는 질문에도 부정적이었다.

    한달 이상도 충분히 버텨줄 것이라고 믿었던 함리 백작조차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보면 다른 곳도 크게 기대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큰 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되자 작은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합자치령의 군대와 맞부딪치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들이 농촌의 작은 마을을 지날때 적어도 천인대는 됨직한 병력과 정면으로 부딪쳐 버린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일부는 반대편의 숲에 야영중이라서 제대로 파악을 못했다.

    게다기 수인족들조차 바람의 방향 때문에 인간의 냄새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컸다.

    지금까지 별 일 없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멀리서 바르거의 일행을 본 기병 몇 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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