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7화 (117/248)

117. 바르거, 깨닫다.

“공작성을 버리라니. 감히 제국의 공작에게 그런 체면상할만한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같이 아르보그 공작님을 맞이하러 가자는 것 뿐입니다.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요.”

“말장난하지 마시오! 라그닐드 경.”

공작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일개 수인족 귀족에게조차 존대를 하며 지원을 요청하던 바르거였다.

그러나 아예 공작성을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라그닐드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라그닐드의 제안은 용납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용납해서는 안 되는 제안이었다.

지금 자신은 권위도 없고, 권력도 없고, 귀족은 물론 평민들의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정식으로 막시밀리안 공작을 계승했다는 이름값 뿐.

그런데 공작성을 버리고 도망을 친다고?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하다.

무방비 영지를 선언했던 귀족들은 더 이상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속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들이 공격을 당할 때 지원을 하지 못했으니 봉신계약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고, 자신 역시 봉신 계약을 강제할 만한 힘은 없다.

그렇다면 귀족들의 일부는 연합자치령쪽으로, 다른 일부는 아르보그 공작쪽으로 깃발을 바꿔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르보그 공작이 그나마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남은 귀족들을 끌어모으는 토템으로 사용하다가 쓸모가 다하면 조용하게 제거할 것이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라그닐드는 달래듯 말했다.

“말장난이라. 그렇다면 바르거 공께서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공작령이라는 방대한 지역을 불과 이천의 병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금 면제를 내걸고 영지병을 재소집해보겠소. 설사 영지병이 아니더라도 무기를 들 수 있으면 누구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오. 야전에서 싸울 정도는 못되겠지만, 성을 지키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라그닐드는 바르거의 말을 듣자 이래서 영주는 기사 출신이거나 적어도 군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통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사는 그냥 끌어모은다고 전력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조직을 장악할 지휘관과 허리가 되어주는 하사관이 없으면 그냥 징집해서 창을 들려준 농민은 아무런 전력이 되지 못한다.

우와좌왕하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지금 막시밀리안 공작은 바르거다.

결국 라그닐드는 바르거를 달래기로 했다.

어쨌든 이 자는 살아서 버텨야 했다.

바르거가 귀족 연합 자치령의 군대에게 너무 빨리 무너지면 북부에서 호크 지슬리에게 발목을 잡혀서 고생하고 있을 아르보그 공작이 그동안 이곳에 들인 공이 허공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바르거의 선택이 농성이라면 일단은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영지병의 재소집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빨리 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 같아서는 언제 적이 이곳에 밀어닥칠지 모르니까요.”

“하킨슨 남작에게 지금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그리고 설사 제대로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지금 있는 이천 명이면 공작성을 지키는 것은 가능할 거요. 공격받고 있을 휘하의 귀족들에게 지원을 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말이오.”

그러나 바르거의 결정은 너무 늦었다.

애초에 함리 백작성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그가 장인인 하킨슨 남작을 부르려고 시종을 호출했을 때 시종 대신 새로운 전령이 뛰어들었다.

“성 밖에 정체불명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숫자가 많은지 성문 앞을 까맣게 메웠습니다!”

“뭐라고! 성문을 지키던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전령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성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밖에서 엄청난 함성과 함께 온갖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없이 뛰어가서 창문을 열어 젖혔다.

낯선 병사들이었다.

아직은 저 멀리 있어서 어디 소속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의 병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돈으로 잡아두었던 공작성의 병사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나마 저항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자들은 하킨슨 남작의 영지병 뿐이었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바깥의 혼란에 두 눈을 고정한 채 이를 악물었다.

역시 글렌 공작을 기습해서 죽인 것이 악수였던걸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황도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의 결단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약간 미친 것 같은 결정이기는 했다.

실패했다면 뒤가 없는 짓이었으니까.

그래도 기습은 성공했고, 새로운 글렌 공작이 계승할 때까지 시간도 벌 수 있었다.

문제는 벌어놓은 시간을 너무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글렌 공작을 죽인 것에 대해 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비난하는 귀족들이 꽤나 나왔을 정도였다.

그래서 제대로 전쟁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준 귀족은 장인인 하킨슨 남작을 중심으로 하는 몇 안되는 귀족이 다였다.

바르거는 이제서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정통성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외부의, 그것도 경쟁 상대였던 자의 손을 빌려서 공작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곱게 보아줄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들이 얼마나 있었을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고립은 자신이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남기 위해 철이 없었을 때 때부터 마음을 숨기고 몸을 숙여야 했다.

두려움과 억울함에, 그리고 나중에는 복수심에 사무쳐서 자신의 시야가 너무 좁아졌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다른 이에게 좋은 이용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 좋은 이용거리가 되어 주겠다고 결심했다.

20년을 기다려서 목적을 이뤘었다면 다시 20년을 못 기다릴 것도 없겠지.

그는 거칠게 창문을 닫고 라그닐드에게 외쳤다.

“아르보그 공작에게 갑시다. 라그닐드 경.”

*

3일 동안 규칙적으로 걷고, 쉬고, 걷고, 쉬고를 반복했다.

마시는 것도, 먹는 것도 걸으면서 다 해치웠다.

잠도 걸으면서 잤다.

걸으면서 잠을 잘 수 있는 자들은 걸으면서 자고, 걷다가 잠에 취해 쓰러지는 자들은 수레에 실었다.

물론 정신을 차리면 수레에서 내려서 계속 걸어야 했다.

그렇게 5일 거리를 3일 만에 주파했다.

숙련된 용병들조차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영지병이 주축을 이루는 부대는 1/3에 가까운 병력이 낙오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우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막시밀리안 공작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한 방 먹여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큰 행운까지 따랐다.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런 미친. 지금 당장 말을 탈 수 있는 자들은 다 말에 타라. 수레에 묶인 짐말도 다 동원해. 지금 당장!”

정찰을 다녀온 기마용병들이 성문이 아직 열려있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온통 난리가 나 버렸다.

기사들은 곧장 말에 올라탔고, 용병들은 짐말까지 기마용으로 동원하기 위해 마차에서 분리하면 서둘렀다.

행운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억지로 이해하려면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니 평소에 성문을 열어놓듯 열어놓은 것 뿐이다.

그러나 지금이 평시이던가?

막시밀리안 공작성을 공격하겠다고 오는 적군이 자그만치 5갈래로 나뉘어져 접근하고 있는데 이런 태평한 경계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바르거가 공작위를 계승한 후 내부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이 있다던데 이런 곳에서 그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버린다.

제대로 된 군지휘관이 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와 기마용병이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병사들이 뒤따랐다.

보급품이고뭐고 다 내버려둔 채 하루동안 전투를 치를 무기와 식량만 챙긴 채 모두가 막시밀리안 공작성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 중 가장 앞에 있었다.

공작성은 금방이었다.

“저거 뭐야? 전령이 또 오나?”

“먼지 구름이 만만하지 않은데? 전령이라기에는 숫자가 좀······”

“깃발도 없잖아? 누가 지원이라도 오나?”

“어! 어! 저거 뭔가 이상한데? 우리 편 맞나?”

“무기를 들었어! 적이다! 적이야! 성문을 닫아!”

뒤늦게 우리를 알아본 공작성의 병사들이 난리가 났다.

성문을 닫으려고 달려나오는 병사들도 있었고, 우리를 보자마자 그대로 도망가 버리는 병사들도 있었다.

제대로 병사들을 장악하고 지휘하는 자가 있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해자에 놓인 다리를 치우기 전에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곧장 말에서 내려서 성문을 장악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성문이 우리에게 장악된 것을 뒤늦게 알고 경악해서 달려오는 적들과 대치하며 시간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성문에서 저 놈들을 밀어내!”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물러서지 말아라!”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 뿐 우리에게 달려드는 적은 없었다.

대신 화살이 날아왔다.

성벽 위에서도, 우리 앞쪽에서 중구난방으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 위협은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성문을 통과한 자들은 거의 다 기사였다.

30명도 되지 않은 숫자지만 전원 철판 갑옷을 입고 있었고, 화살 따위에 뚫리기에는 기사들의 갑옷이 너무 단단했다.

성문 주변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적병사들은 날아가는 화살이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것을 보며 점점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날아오는 화살의 수는 금방 줄어버렸다.

기사들의 뒤를 이어서 기마 용병이 도착해서 하마를 시작했을 때 비로소 창을 들고 대열을 갖춘 공작군의 병사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싸울 생각이 있는 적의 등장이었다.

들고 있는 깃발을 보니 하킨슨 남작의 영지군이었다.

내 기억에 그는 제법 괜찮은 귀족이었다.

그의 영지병들 역시 나쁘지 않은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영지병 정도로는 전투 기계인 기사를 상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곧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창을 일제히 길게 내뻗은 채 나를 향해 찔러오는 창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전투 망치로 내리쳤다.

어깨와 머리.

내 앞에 있는 창병에게 전투 망치로 내리친 부위다.

내 앞의 창병 두 명이 동시에 창을 놓치고 쓰러졌다.

내 앞 뿐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창으로 쌓은 벽을 향해 돌격한 기사들에 의해 창벽은 금방 듬성듬성 구멍을 내며 무너졌다.

화살이 통하지 않는 기사에게 창이 통할 리가.

적당히 시간을 끌며 하킨슨 남작군을 상대하고 있을 때 드디어 우리쪽 병사들이 성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3일간의 강행군으로 남은 것은 악 밖에 없는 병사들이었다.

어딘지 얼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공작군이 상대하기에는 무리인 자들이다.

나는 창병 하나를 더 쓰러뜨린 후 공작성의 내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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