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6화 (116/248)

116.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선택

포로로 잡은 함리 백작의 측근을 통해서 함리 백작의 원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함리 백작은 농성을 하면서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려고 했다고 한다.

예상했던 바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성하마을을 약탈하며 일부러 병사들을 도발했던 것이다.

다행히 도발한 것이 먹혀서 그렇지, 만약 함리 백작군이 처음부터 성에 콕 박혀서 수비만 하고 있었으면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곤란했을 것이다.

바르거에게 빨리 가야 하는데 함리 백작성에서 시간을 질질 끈다?

이러면 무엇보다 보급이 당해내지 못한다.

6천 명이 넘는 군대가 전쟁 중에 소모하는 물자는 어마어마하다.

이런 백작성 주변에서 징발을 한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중에는 백작성 주변을 돌면서 징발을 반복하다가 약탈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면 민심 이반이 너무 심각해져서 두고두고 골치를 썩일 것이 뻔했다.

영지전으로 황폐화 되었던 울보르그 지역은 지금도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다 못해 적대적이다.

칼마르에서 재건사업을 진행하는데도 그렇다.

우리가 그런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용병대의 하사관들은 함리 백작의 측근들을 열심히 털어댔다.

결국 우리는 한 달만 기다리면 지원을 가겠다는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전언이 있었다는 것까지 알아 낼 수 있었다.

이것은 꽤나 의미심장한 정보였다.

함리 백작성에서 바르거의 공작성까지는 5일 거리가 채 되지 않는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한달을 이야기 했다는 것은 바르거 자신도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르거가 직접 거느린 병력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첩보가 사실인 것 같았다.

“윌리엄 백작 각하. 아무래도 함리 백작을 추적하는 데에 백인대 하나로는 안 되겠습니다. 뒷정리를 맡을 병력만 남기도 곧장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엘리아슨은 한 달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게 전면적인 추적을 제안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낸 후 노렌에게 손짓을 해서 가까이 오도록 했다.

“노렌 경. 용병 부대는 얼마나 빨리 출발할 수 있겠나?”

“반나절만 주십시오. 부족한 잠은 행군하면서 졸면 됩니다.”

“그럼 부탁하지. 그리고 엘리아슨 경.”

“예. 백작님.”

“영지군의 절반을 남기도록 하십시오. 중간에 우리에게 합류한 막시밀리안측 귀족들의 병력도 절반은 여기에 남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막시밀리안 쪽에 서 있다가 갑자기 깃발을 바꿔든 사람들을 믿기에는 아직 우리 사이의 신뢰가 아직은 강하지 못하다.

그냥 무방비 영지를 선언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 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아직은 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숫자를 좀 줄여놓으면 낫겠지라는 생각에 절반만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함리 백작을 추적할 겸 아예 바르거의 공작성까지 이동할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부대는 각각 빠르게 집결해서 각자의 무장 상태를 다시 점검하는 한편으로 약탈물은 품목별로 구분한 후 종군 상인에게 넘겼다.

계산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물품부터 넘긴 것이다.

그러자 종군 상인의 대표가 대번에 나에게 달려왔다.

“윌리엄 백작 각하. 백시손이 인사드립니다.”

“며칠 만에 보는 군요. 무슨 일입니까? 백시손 의원.”

막시밀리안 공작을 토벌하는 전쟁은 상인 입장에서는 대형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는 쪽에 붙으면 돈을 자루로 퍼 담을 수도 있는 사업인 것이다.

지는 쪽에 속한다고 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간혹 패전의 와중에 목숨이 날아가서 그렇지.

돈냄새를 맡은 칼마르의 상인들이 종군 상인 자격을 따기 위해 달려들었고, 덕분에 현재 우리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종군 상인들의 대부분은 칼마르에 적을 두고 있는 상인들이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의 대표 역시 칼마르 출신.

자그마치 시의회 의원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이런 큰 사업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다.

일개 상인의 신분으로는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것이다.

게다가 백시손은 나이는 젊지만 경력은 오래된, 즉 대를 이어 의원을 하고 있는 나름 뼈대 있는 집안 사람이기도 하다.

“전리품을 한꺼번에 넘기고 곧장 출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러면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저희가 받은 전리품의 수량도 부족할 수가 있고, 무엇보다 전리품의 가격은 사고파는 사람 모두가 납득해야 말썽이 없습니다. 나중에 계산하자면서 이렇게 전리품을 두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게 지금 중요한가?

나는 그가 시의회 의원임을 존중하는 의미로 고함은 지르지 않았다.

단지 지금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해 주었다.

“백시손 의원. 수량이 부족하면 전리품을 지키는 자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고, 가격은 파는 사람이 납득할 정도면 됩니다. 야료를 부리는 자는 목을 치세요. 지금은 전시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도 말이 나오면 그냥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세요. 지금 우리는 도망친 함리 백작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에 방해되는 것은 다 버릴 겁니다.”

내 말에 백시손은 즉시 머리를 숙였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의 손해는 이해하겠다는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것이면 됐다.

못 알아듣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자들은 자기 목을 댓가로 치르면 그만이니까.

함리 백작의 추적이라고 했지만 결국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공작성으로 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 5일치의 식량을 가지고 일제히 출발했다.

보급 부대가 늦어지면 굶을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있지만 5일 거리를 3일 내에 주파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보급 부대가 너무 늦지 않게 따라오도록 강하게 지시할 수 밖에.

용병 대장들 중에는 지나치게 서두르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 가도 결국은 성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부류였다.

차라리 공성병기를 만들 재료와 기술자들을 챙겨서 가는 편이 낫다는 의견도 뒤늦게 나왔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달이라는 시간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바르거는 왜 하필 한달이라는 시간을 이야기 했을까?

그리고 함리 백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전언에 따라 시간을 끌려고 했을까?

함리 백작이 바르거 막시밀리안에게 충성을 다하는 귀족이라는 가정은 이제 집어치워도 된다.

그는 전세가 기울자마자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심지어 가족까지 버려두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 충성에 가치를 두는 귀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깃발을 세운다면 얼마나 많은 귀족이 그 깃발 아래에 모여들까?

그리고 과연 함리 백작이 명목상이나마 그 깃발 아래에 있을까?

나는 막시밀리안 파벌에 속해 있는 귀족들에게 이미 아르보그 공작의 손이 닿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 공을 들여 진행한 공작이라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함리 백작 같은 자를 아르보그 공작이 방치하듯 내버려 두었을리는 없다.

분명히 따로 연락을 해서 자신을 믿고 기다리라는 말쯤은 전해 두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 달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임에 틀림없다.

아르보그 공작은 자신이 포섭한 귀족들에게도, 바르거에게도 한 달을 약속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오겠다는 약속 말이다.

진짜는 아르보그 공작이다.

바르거는 공작성에 고립된 채 외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에 지나지 않는다.

믿을 만한 병력은 처가의 병력뿐이고, 공작성의 병사들조차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믿기에는 불안한, 그런 상황일 것이다.

그는 휘하의 귀족들에게 한 달 후에 지원을 가겠다는 희망을 날리며 자신 역시 간절히 아르보그 공작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가야 했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병력을 밀어 넣어서 전쟁을 빨리 끝내 버려야 했다.

*

“라그닐드 경. 지원이 늦으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바르거 공. 나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내 주군께서도 허언은 하지 않으시는 분이지요. 약속은 한달이었고,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글렌 공작의 잔당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방의 영지를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내 파벌의 귀족들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내게 충성하는 자는 남지 않을 겁니다.”

“정 급하시면 하킨슨 남작의 병사들을 보내시죠.”

수인족 여귀족인 라그닐드의 어투는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나른하게 늘어져서 귀찮은 말은 더 이상 하기 싫다는 감정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그런 것을 느끼고 반응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방금 함리 백작성에 불길이 솟았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함리 백작성은 이곳에서 불과 5일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전령이 보고하러 오느라고 걸린 시간과 기병이 달리는 속도를 감안해 본다면 내일 당장 적이 들이닥쳐도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판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병력은 그의 장인이 거느리고 온 천 명 남짓한 영지병과 원래 공작성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 천 명, 그렇게 모두 해서 이천 명이 다였다.

기사 역시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공작성은 커녕 백작성에도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다.

원래는 최근까지도 이천 명이 넘는 병사가 공작성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글렌 공작을 급습해서 죽이는 것을 성공한 순간 절반에 달하는 숫자의 병사들이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소유가 아닌 무기까지 들고 말이다.

불과 얼마 전 있었던 궁정 쿠데타를 겪은 병사들이 이번에는 이웃 공작령과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친 것이다

그나마 그의 장인이 급하게 조달해온 돈을 뿌리고, 상인들에게 가문의 예술품을 담보로 어음을 떠안기며 만든 돈으로 병사들의 충성심을 사서 간신히 현재의 병력은 유지할 수 있었다.

바르거는 자신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병력을 외부로 내보내라는 말에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라그닐드 경!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지금 이곳에는 이천 명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중에서 실전을 거친 쓸만한 정예병은 반의 반도 안 돼요. 지금 당장 아르보그 공작님이 지원을 안 해주시면 나는 끝장입니다.”

그의 말에 라그닐드는 의미심장은 표정을 지었다.

“끝장이 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에요. 바르거 공. 끝장이 나는 것은 이곳 막시밀리안 공작성이지요. 그리고 반항적인 영주 몇 명 정도? 나머지는 멀쩡할 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생각보다 빨리 귀족들이 손을 들고 있어요. 무방비 영지라니! 그런 사문화된 법을 어디서 꺼내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지만 현실은 냉혹한 겁니다. 연합자치령의 군대가 박살나면 무방비 영지를 선언한 곳은 다시 막시밀리안 파벌의 귀족으로 돌아올 겁니다.”

“나보고 공작성을 버리라는 겁니까?”

바르거의 질문에 라그닐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