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3화 (113/248)

113. 전쟁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싸울지는 지휘관이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인간이다.

기계적으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과 의견을 가진 인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병사들의 마을이 불타고, 가족과 친척들은 약탈당한 후 끌려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지휘관이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해도 화가 잔뜩 난 병사들이 날뛰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억지로 군심을 거스르다가는 누군가가 와서 칼로 찔러도 이상하지 않다.

함리 백작은 자신이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지난 3백년간 제국은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내전이라고 부를 만한 큰 전투도 백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변경백들이 주변 왕국과 자잘한 충돌을 겪기는 했지만 그 혼란이 제국 내부로 번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변경백 이외의 귀족들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위해 출정하는 경험을 겪은 일조차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그 정도로 제국이 안정되게 굴러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10여년 전부터 슬금슬금 영지전이 벌어지는 빈도가 높아지기는 했다.

함리 백작이 처음으로 야전에서 기사들끼리 부딪치는 것을 경험한 것도 그 당시였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 그가 경험했던 전쟁이라는 것은 진짜 전쟁이 아니었다.

영지군은 병풍으로 서서 고함이나 지르고, 기사들끼리 누가 더 실력이 뛰어난지 겨루는 시합에 가까웠다.

그것도 실제로 검을 맞댈 것도 없이 적당히 서로의 세를 견주다가 타협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그나마 산에 자리잡은 도적단이나 혹세무민하는 수상한 단체를 토벌하면서 병사들을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치안유지는 반드시 해야겠기에 영지군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제후도 아닌 귀족에게 무슨 영지군이 필요하냐며 예산이나 절감하자는 헛소리가 나와도 그럴 법하다면서 지지하는 관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백작이나 되는 고위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읽어보거나 소문으로 들은 것이 다였다.

그런 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선대의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을 대리해서 4명의 귀족간에 벌어진 영지전이었다.

이전과 달리 너무 과장이 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영지가 엉망이 되었다는 보고서를 읽으며 처음으로 세상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의 영지전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막상 그 영지전이 눈 앞에서 벌어지자 함리 백작은 현실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고 거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 기사들을 내보내서 일대일 대결을 벌일 때까지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양쪽의 군세가 모이면 기사를 내보내서 기세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다행히 기사들끼리의 결투는 승패가 엇비슷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로 농성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던 병사들도 그 결과를 보고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함리 백작은 이렇게 기사들을 내보내서 며칠이라도 시간을 끌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올린 후 성문을 닫을 계획이었다.

성을 지키는 것은 1년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윌리엄 백작이 이끌고 있는 군대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 차례 기사를 내보내서 일대일 대전을 하면서 시간을 끌더니 전격적으로 성하마을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운 후 영지민은 붙잡아서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성벽 위의 병사들이 보라는듯 대놓고 난폭하게 굴었다.

반항하는 영지민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함리 백작은 전쟁에는 상대방이 있음을 잊었다고 자책했다.

자신부터가 성에 틀어박혀서 나가지 않으려고 있는데 왜 상대방이 정정당당하게 전투를 하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불타는 성하마을의 보면서 영지민들을 진작에 피난을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가족과 친척들이 당하는 약탈을 본 병사들이 지나치게 호전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약탈이 있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외부에 영지민이 남아있을 때의 이점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성하마을을 그대로 방치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상대방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함리 백작측의 영지민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함리 백작성 주변에 남아 있는 영지민을 치우는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 된다.

당연한 일이기는 한대.

너무 빨리, 너무 대놓고, 그리고 너무 거칠게 해서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게 말이다.

함리 백작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병사들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의 기사들은 이런 상황을 오히려 반겼다.

“연합 자치령의 군세가 우리의 두 배라고는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렇게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한 번 들이치는 것도 괜찮아보입니다.”

“백작님.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충만합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이라도 성문을 열고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약탈을 하는 군대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저렇게 병사들이 흩어져서 약탈을 하고 있는데 명령을 한들 먹힐 수나 있겠습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자멸할 것입니다. 공격 명령을 내리시면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영지병을 지휘하는 기사들은 몸이 달아서 전투를 건의해 왔다.

그들은 기사로의 실력이 뒤처져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 노릇을 하게 된 자들이다.

영지병을 이끌고 다니다 보니까 아무래도 일반적인 기사들에 비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울 기회조차 잡기 힘든 입장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렇게 전투를 보채는 것은 방금 전까지도 기사들끼리 벌였던 일대일 대전을 보고 피가 끓어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

게다가 그들 밑에 있는 병사들은 당장 성벽을 뛰어내려서라도 저 때려죽일 놈들과 싸우겠다고 난리다.

이럴 때 병사들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으면 지휘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겁쟁이 지휘관을 따르는 병사는 없으니까.

그러나 함리 백작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질서 있게 약탈을 하고 영지민을 끌고 가는 용병들과는 별개로 성을 포위하고 있는 병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특히, 윌리엄 백작이 지휘하는 정면의 병력은 분위기 자체가 살벌했다. 딱 봐도 전투 꽤나 겪어봤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자들에게 정면으로 들이박는다고?

함리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성벽을 의지해서 싸운다면 3배의 적도 무난하게 막아낼 수 있다.

상황만 따라준다면 10배의 적을 막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준비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몇 년이고 농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성은 원래 그러려고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몇 대에 걸쳐서 그 막대한 자금을 들이면서 성을 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성을 두고 지금 나가서 성 밖에서 적과 싸운다고?

우리 두 배는 되는 적과?

아무리 실전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지만 한 가지는 머리에 확실히 박아두고 있는 것이 있다.

숫자가 많아야 이긴다.

이것은 전쟁의 모든 격언 가장 위에 있는 진리라고 배웠다.

함리 백작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지금 경들의 눈앞에 있는 저 군대가 약탈을 하느라고 흩어진 군대로 보이나? 성문 앞에 자리잡고 있는 저 병사들은 어떻게 보이지? 그 옆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은? 저 숫자가 만만해 보여? 경들은 눈이 안 좋아서 멀리 보지도 못하는 거였나?”

신랄한 함리 백작의 말에 지금까지 출전을 종용하던 기사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대가 센 기사가 있어서 함리 백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출전을 건의했다.

“하지만 백작님. 약탈을 하고 있는 자들을 보십시오. 연합 자치령군의 절반 정도가 약탈에 매달려 있습니다. 약탈에 미쳐 날뛰는 병력은 제대로 통제가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제 경험에도 그렇습니다. 공격을 당하면 도망치기 바쁘지 반격은 생각도 못 합니다. 게다가 병사들의 분노가 심상치 않습니다.”

기사의 마지막 말은 함리 백작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반드시 패한다.

그래서 더 세게 윽박질렀다.

“경. 약탈 경험을 이야기 했나? 저곳을 다시 보게. 어떤가? 약탈에 미쳐 날뛰는 용병이 보이나? 내 눈에는 지금 약탈을 하고 있는 저 용병놈들조차 기강이 제대로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보라고! 약탈을 하는데 강간을 하는 놈이 없어! 살인도 저항이 심한 자에게나 하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아냐. 저게 어디 봐서 약탈에 미쳐 날뛰는 용병인가?”

함리 백작의 고함소리에 기사들은 출전을 권하던 기사마저 입을 봉했다.

그리고 함리 백작의 경호 기사들은 함리 백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병사들의 분노를 풀어주지 않으면 엉뚱한 짓을 하는 놈이 나올 수도 있겠지. 무식한 놈들이 어디로 튈지는 예상하기 어려우니까.”

“예. 맞습니다. 병사들의 통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억누르기만 해서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적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니 전투의지는 충만하겠군. 겁쟁이 열 명보다는 용맹한 하나가 더 나은 법이지. 그렇다면 오늘 밤은 어떨까?”

“야습을 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래. 오늘 연합자치령인가 하는 놈들 많이 바쁘지 않았겠나? 숙영지도 만들고, 전투도 했고, 약탈도 했지. 하루 종일 난리를 쳐 놨으니 밤에는 쉬고 싶을 것 같은데?”

함리 백작의 제안에 주변의 기사들은 모두 서둘러서 동의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비록 함리 백작에게 한바탕 욕설을 얻어 먹기는 했지만 기사들이 원하는 것에서 크게 변한 부분은 없었다.

시간이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밤에 하는 공격.

야습이다.

물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2개 백인대 정도로 급습을 하고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적진에 혼란을 일으켜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운이 좋으면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무너지는 것도 기대했다.

그리고 10명 정도는 따로 빼내서 끌려간 영지민들의 행방을 파악하기로 했다.

함리 백작의 기사들은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야습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다른 경쟁자들의 부하보다 자신의 부하가 더 열심히 싸울 것을 기대하며, 그들의 복수심을 충족할 기회가 왔고 오늘이 아니더라도 야습은 계속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

나는 미니맵을 보며 함리 백작성의 평면도를 그리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그리는 도면으로 한 눈에 함리 백작성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도면이었다.

“어떻게······”

“본 적이 있습니다. 외부에는 비밀입니다. 베르그렌 경.”

베르그렌 남작은 쓸만한 지휘관이었다.

그의 병사들도 쓸만했다.

나는 베르그렌 남작과 비밀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그를 내게 좀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는 내가 칼마르에서 함리 백작성의 도면을 본 적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야습을 나온다면 여기에 있는 비밀문이 통로가 되겠군요.”

“그렇지요. 전면적인 야습이라면 모를까 치고 빠지는 것이라면 비밀문 중의 하나를 이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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