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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10화 (110/248)

110. 귀족 연합 자치령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여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결단만 내리면 곧 전쟁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렌 공작이 전사하고, 그의 후계자인 베이크 글렌은 암살 미수로 인해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가 사망했다.

베이크 글렌이 죽자마자 새로운 글렌 공작이 될 만한 글렌 공작가의 사람들 역시 같은 파벌의 귀족들에 의해 제거당했다.

제국 동남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선제후 글렌 공작의 세력이 자중지란에 빠져든 것이다.

평소라면 그런 혼란은 다른 세력에게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권을 야금야금 뜯어가고 파벌의 귀족을 포섭하면서 글렌 공작의 세력을 잡아먹을 궁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 당장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들 자신의 일이 바빠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글렌 공작령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막시밀리안 공작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채 대화를 시작했다.

다들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무리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권리와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는 태도였다.

장차 우리의 생존이 명확해진다면 다른 생각을 하는 자가 나오겠지만 지금은 다들 생존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합의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

선제후가 죽은 것도, 선제후의 죽음 이후에 귀족들끼리 다툼이 벌어진 것도 제국 동남부 지역만의 일이 아니었다.

황도가 불에 타고 선제후들간에 서로를 향한 노골적인 전투가 일어난 이후 세상이 변했다.

귀족들은 선제후가 투표로 황제를 뽑아서 제국의 통치자로 삼는 시스템이 붕괴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아직도 선출 황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귀족이 간혹 있기는 했다.

어째서 3백 년간 사소한 문제 외에는 별 탈 없이 이어지던 황제 선출의 전통이 갑자기 무너지고 선제후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내전에 들어갔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며 혼란스러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의문이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이 있는 자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진실을 모른 채 새로운 해답을 찾아 헤맸다.

선제후들의 배후에 숨어있는 진실을 몰라도 명색이 귀족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벌어진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인이 아니라 해법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론은 혼란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단은 자신이 속한 파벌의 선제후를 중심으로 강하게 뭉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선제후가 없다면?

파벌의 수장인 공작이 죽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각자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이를테면 제국 서남부에 위치한 알핀 리딕슨 공작의 경우는 혼란을 조금 겪기는 했지만 기사와 병사까지 동원하는 본격적인 충돌은 없었다.

알핀 리딕슨 공작이 황도에서 전사한 후 얼마 안 되어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윈 프리시오 공작이 리딕슨 파벌의 귀족들은 물론 공작령까지 모조리 흡수하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프리시오 공작이 선제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들어가는 자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흡수였다.

이것은 프리시오 공작과 리딕슨 공작 사이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로 인접해 있다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리딕슨 공작은 선제후 시절 언제나 프리시오 공작과 한 편이었다.

리딕슨 공작의 표는 무조건 프리시오 공작에게 투표했고 프리시오 공작은 막대한 식량과 현금으로 호의에 대한 대가를 치뤄왔다.

리딕슨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 역시 상업적인 교류를 매개로 프리시오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리시오 공작이 대놓고 압력을 가하자 리딕슨 파벌의 귀족들 대부분이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리딕슨 공작가는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리딕슨 공작을 옹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딕슨 공작의 아들들, 사촌들이 연달아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협박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인.

남아 있는 리딕슨 공작가의 힘으로는 암살에 암살로 맞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공작 후보자들이 연달아 죽어나가서 아예 리딕슨 공작가의 대가 끊어질지도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으로 제국 서부는 완전히 이스윈 프리시오 공작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제국 북부는 사정이 달랐다.

호크 지슬리 공작은 물론이고 그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 역시 영지의 대부분이 산이었다.

농사지을 만한 땅은 얼마 없고, 기후도 별로 좋지 않다.

심지어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몇 안 되는 항구 도시조차 배후지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농촌이 부족해서 식량을 수입해 오는 판이었다.

하지만 척박하고 빈곤한 산촌을 생각하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지슬리 공작령은 부유한 땅이다.

비록 인구는 적고 땅은 넓지만, 대신 산맥 곳곳에 광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대대로 쌓아놓은 부는 가장 강하다는 네 명의 선제후와 비교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규모라고들 했다.

철광, 구리광, 그리고 금광과 은광까지.

각종 희귀한 광물이 매광된 광산은 아예 계산에서 제외하더라도 지슬리 공작령에 위치한 광산의 규모는 어림잡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일부는 노천광이다.

지슬리 공작은 현금 위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환란의 원인이 되었다.

평화시라면 힘이 되어줄 거대한 부가 난세에는 빼앗아야 할 보물이 되어 버렸다.

힘이 약한 자가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죄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힘이 약한 자가 죽고, 아직 누가 상속받을지도 결정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을까?

힘이 강한 자들이 마치 원래 자신들의 소유인 것처럼 태연하게 또는 화까지 내면서 가져가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아무리 힘이 약하다고 해도 그런 상황을 두 눈 뜨고 멍하게 바라보는 자는 거의 없다.

하물며 산에서 나고 자란 산사나이가?

어쩌면 지슬리 공작이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

분명히 복장이 터져 죽었을테니까.

사실 황도에서 선제후들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슬리 공작의 안전에 대해 걱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슬리 공작 자신도 만만하지 않은 실력자고 그가 거느리고 간 군대 역시 정예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황도에서 일이 터져도 탈출 정도는 무난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번 황제를 배출했고 황도에도 강력한 근거지를 두고 있는 뱅트손 공작의 기습은 아무리 지슬리 공작이라도 해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기에 피해가 더 컸던 면도 있었다.

지슬리 공작은 뱅트손 공작이 전력을 기울여서 스케티 공작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여유있게 움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뱅트손은 스케티 공작에게는 기사들만 보낸 반면 지슬리 공작에게는 직접 자신의 기사들을 이끌고 공격하러 왔다.

그것은 지슬리 공작의 예상과 달리 지슬리 공작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결국 지슬리 공작은 그의 정예병과 함께 황도에서 죽었다.

잘 싸웠지만 졌던 것이다.

지슬리 공작의 가까운 친척들도 그때 같이 몰살당했다.

남은 것은 지슬리 공작의 후계자와 몇 안 되는 친척이 다였다.

파벌에는 지슬리라는 가족성을 가지지 않은 귀족도 있었지만 새로운 지슬리 공작은 자신과 같은 가족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아예 신뢰를 하지 않았다.

아르보그 공작과 뱅트손 공작.

두 명의 강력한 전직 선제후들의 공격과 회유를 견뎌낼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쪽에서 들어 오는 뱅트손,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아르보그의 병력을 맞이한 파벌의 귀족 중 상당수는 싸우지도 않고 백기를 들었다.

새로운 지슬리 공작의 예견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지슬리 공작이 된 아르누트 지슬리는 분노를 삭이며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산을 의지해서 버틸 계획이었다.

절대로 말살할 수 없는 레인저 부대가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때부터 제국 북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

한 철이 지나고 나서야 막시밀리안 공작은 단독으로라도 연합 자치령을 공격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바르거 막시밀리안의 결정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우리의 준비가 다 끝난 지금에서야 결단을 내렸으니까.

듣자하니 아르보그 공작이 지슬리 공작을 공격하다가 발목이 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던데 그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궁정 쿠데타로 집권한 바르거에게는 직속 부하라고 할 만한 세력이 거의 없다.

친인척과 공작령에서 징병한 병력 정도?

파벌의 귀족들도 바르거에 대한 존중은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바르거도 파벌의 귀족들도 바라보는 방향은 동일하다.

아르보그 공작.

그가 바르거를 지원하면 아직은 바르거가 막시밀리안 공작인 것이고,

그가 바르거를 내치면 막시밀리안 공작은 그때부터 없는 것이다 .

다들 듣는 귀가 있으니 프리시오 공작이 리딕슨을 어떻게 다뤘는지 들었을 것이고, 막시밀리안의 운명 또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은 결정된 운명에 저항할 모양이다.

그가 도박수로 글렌 공작을 죽여서 예정된 운명을 피해갔듯,

이번에는 연합 자치령을 상대로 뭔가 하려는 것 같다.

아! 이제는 글렌 공작령이 아니다.

연합 자치령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귀족 연합 자치령’.

글렌 공작령과 파벌 귀족들의 영지를 한데 어우르는 영역이다.

제국은 생긴 모습이 구멍이 작은 도넛을 반으로 가른 후 윗부분만 그대로 놓은 것과 비슷하다.

연합 자치령은 반으로 자른 도넛의 오른쪽 부분에서도 또 오른쪽, 즉 동쪽에 치우쳐 있다.

현재의 우리는 제국 동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세력인 셈이다.

우리라고 했던가?

그렇다.

우리다.

칼마르는 귀족 연합 자치령의 동맹이 되기로 했다.

정식으로 가입하는 것은 내부에서 거부감을 보이는 자들이 좀 있어서 일단 유보하기는 했지만 동맹은 동맹이다.

칼마르의 입장에서는 운송 중의 약탈을 걱정할 필요없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한 것이고, 연합 자치령의 입장에서는 수출입을 할 수 있는 막대한 물동량의 항구를 확보한 셈이다.

양 쪽 다 이익이 되는 이야기라서 우리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자들도 금방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자들은 칼마르 백작령의 규모와 세력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다.

기껏 글렌 공작을 몰아냈더니 새로운 글렌 공작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아니다.

내가 세운 장기적인 목표가 그거니까.

그러나 내 속내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충실한 동맹으로 행동할 생각이다.

일단은 막시밀리안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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