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9화 (109/248)

109. 베이크 글렌 사망

베이크 글렌이 죽을 때 충돌이 벌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친 글렌파에 속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두려움에 때문에 몸을 사리던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베이크 글렌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글렌 공작가를 정점으로 한 파벌은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글렌 공작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했고, 다른 한 쪽은 베이크 글렌과는 아직 봉신 계약도 맺지 않았는데 무슨 충성이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양쪽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은 글렌 공작이 두려웠었다.

그리고 그가 남겨놓은 유산도 두렵다.

만약 베이크 글렌이 깨어난다면 그 유산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암살단과 이름이 없는 자들.

그것이 글렌 공작의 유산이자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두려움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들 비슷하다.

맞서 대적하기보다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태도다.

하물며 가문에 딸린 식솔들의 목숨을 걸고 결정해야 하는 선택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친 글렌파의 규모가 훨씬 컸다.

일단은 늘 해오던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모가 크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다.

친 글렌파와 반 글렌파 사이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군사 충돌에서 양쪽은 비등비등한 결과를 얻었다.

베이크 글렌 공작의 독주를 거부하고 귀족의 권리를 찾겠다고 나선 자들이 훨씬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 글렌파의 구성원 중 대다수가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며 심각한 충돌은 자제하고 있을 때 두려움의 근원 중 하나가 없어진 것이다.

친 글렌파의 귀족들은 다시 한번 자신의 결정을 반추해야 했다.

암살단이 없는 베이크 글렌 공작?

베이크 글렌 공작은 새로이 글렌 공작으로 계승을 하자마자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두 명의 귀족을 죽여버렸다.

자신의 영지를 가진 계승 귀족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봉사해온 가신들이었다.

막시밀리안 공작과 다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공작령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상식적인 제안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며 억지를 부린 것이다 .

어떻게 봐도 일부로 한 짓이었다.

그것은 내가 한 말에 토 달지 말고 복종하라는 협박이었다.

그리고 베이크 글렌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전대 글렌 공작이 남긴 세력이 그대로 그에게 넘어왔으니까.

그런데 암살단이 없어졌다고?

원래 선제후인 공작을 필두로 하는 귀족들의 연합체는 단순한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하는 봉신계약을 바탕으로 각종 이권과 혼인을 매개로 한 복잡한 동맹 관계를 배경에 깔고 있는 이익공동체다.

파벌의 우두머리인 선제후가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들의 이익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데 선대 글렌 공작때부터 계약에 근거한 상하관계가 주변 왕국에서 흔히 보는 국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에 저항하는 자들은 암살을 당했고, 태업하는 자들은 모욕을 당했다.

그런데 선대 글렌 공작은 죽었고, 현 글렌 공작인 베이크 글렌은 혼수상태다.

그리고 글렌 공작이 가졌던 강력한 힘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글렌 공작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만약 베이크 글렌에게 남은 힘마저 없어진다면?

그것이 친 글렌파에 속한 귀족들의 시선이 이름 없는 자들에게 돌아간 이유였다.

*

“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심상치가 않아.”

“당연하겠지. 우리에게 쌓인 원한이 어디 한두해 사이에 쌓은 것이던가? 암살자는 귀족도 두렵겠지만 우리 같은 자에게 두려움을 갖는 귀족은 없어. 암흑가의 범죄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평민뿐이지.”

“결국 글렌 공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거로군. 이것은 그냥 해결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름 없는 자들의 수장은 따로 없지만 각 조의 조장이 돌아가며 대표 노릇을 했다.

전직 용병이 둘, 사기꾼이 하나, 신비에 접했다는 마법사가 하나였다.

“당연한 이야기를 뭘 그렇게 심각하게 하나? 해결사 맞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실력도 암흑가의 해결사들에 비해서 나을 것도 없지. 글렌 공작이 뒤에 없다면 우리는 그냥 깡패야. 나야 가끔 글렌 공작에게 조언이라도 했지만 자네들은 그냥 멋대로 깽판을 치고 다녔지 않은가? 상대가 귀족이라는 것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좋은 시절이었지.”

헐렁한 로브를 두르고 있는 자의 말을 점잖게 생긴 사람이 받았다.

“그랬지. 귀족 놈들 턱을 갈겨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었지. 크흐흐흐.”

기분 나쁘게 웃으며 술잔을 드는 전직 용병은 이미 취한 상태였다.

그는 단숨에 들이킨 술잔을 뒤로 집어 던지고 아예 술병째 들이키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았어. 대놓고 골동품을 집어들고 나오기도 하고, 시종장을 때려주기도 했지. 말 목을 잘라다가 영애의 침대에 던져놓은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 자기가 타고 다니던 애마의 머리통이 침대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을 아예 놨다던가? 그 애비는 그 이후로 글렌 공작이 하는 일에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지 아마.”

“사람 죽이는 거야 아크후가 했다지만 글렌 공작을 위해서 한 일을 따지자면 우리도 만만치 않지. 귀족들이 원한을 가질 만해. 그런데 아크후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건가?”

로브를 두른 사람의 질문에 점잖게 생긴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도 연락 같은 것은 잘 안 하던 자들이었는데, 아예 연락이 끊겼어. 아돈슨의 발표대로 진짜 쓸려나갔을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암살단 마을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글렌 공작뿐이라고! 아니면 베르그렌 정도? 내가 장담하는데 아돈슨은 절대로 알 수가 없어. 글렌 공작이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허술하게 정보를 관리했을리가!”

“글쎄. 이런 상황에서는 베르그렌조차 믿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무슨 그런 말을! 베르그렌은 베이크 글렌의 충실한 보좌 아닌가? 지금도 베르그렌이 아니었다면 혼수상태에 있는 베이크 글렌은 누구 손에 죽었어도 진작에 죽었어.”

로브를 두른 자의 반박에 점잖게 생긴 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 확신하게 된 것이 있는데, 사람은 절대로 믿을 존재가 아니라는 거야. 사람 속은 누구도 몰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모를걸?”

“설마.”

그때였다.

느슨했던 공기가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

꽝!

“조장님! 글렌 공작이 죽었답니다! 헉헉.”

뛰어들어온 전령은 사기꾼의 조에 속한 자였다.

그는 급하게 뛰어온 듯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네 명의 조장들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베이크 글렌?”

“지금 헉! 글렌 공작이 베이크 글렌 말고 헉! 누가 있습니까? 방금 죽었다고 거기서 일하던 시녀가 헉! 알려줬습니다.”

네 명의 조장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직 용병들은 다급하게 무기를 챙기고 사기꾼과 마법사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밖을 살펴 보았다.

과연 그들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저택의 입구에 벌써 일단의 기사들이 몰려와서 정문을 봉쇄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젠장. 우리 운이 진짜 다한 모양이군.”

“이놈들 미리 준비했던 것이 틀림없어.”

“베르그렌도 이제는 믿을 수 없어. 글렌 공작가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 해. 믿을 수 있는 자는 그들 뿐이야.”

그러나 그들은 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그들이 있던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방 입구에 있던 전령은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가슴에 칼을 찔려 죽었다.

그 모습을 본 조장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기사들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자는 조장들을 보고 오히려 반색했다.

“개 같은 놈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 있었군. 지은 죄가 있어서 혼자서는 죽기가 무서웠던 모양이지? 이제 사이좋게 손잡고 저승으로 꺼지라고!”

“씨발!”

욕을 신호로 삼은 듯 격렬한 전투가 방에서 벌어졌다.

방이라기보다는 회의실이나 공개 알현실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지만 10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날뛰기에는 좁기만 했다.

그래도 평생 싸우는 것만 수련해온 기사들답게 세 명의 조장은 저항도 제대로 못 하고 순식간에 썰려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사기꾼은 동료들을 방패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도주는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창문에서 몇 걸음 벗어나지도 못한 사기꾼은 저택 외부에 진을 치기 시작한 병사들이 일제히 쏜 화살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절명해 버렸다.

그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베이크 글렌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 베이크 글렌의 죽음이 알려지자마자 귀족들은 일제히 기사와 병사들을 끌고 움직였다.

목표는 글렌 공작의 친족이었다.

베이크 글렌이 죽으면 그 대신 글렌 공작으로 옹립될만한 정통성을 가진 귀족들이 목표였다.

*

“베르그렌! 네 놈이 어떻게!”

고함을 지른 자는 베이크 글렌이 죽으면 새로운 글렌 공작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던 글렌 공작가의 일원이었다.

그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베르그렌을 보고 있었다.

그의 기사와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베르그렌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동안 신뢰를 많이 받으신 모양이군.”

“무슨 일에든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제 방침이라서.”

아돈슨의 말에 살짝 비아냥대는 기색이 있기는 했지만 감탄이 어려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친 글렌파를 이끌면서 어떻게 행동한 것인지 베르그렌이 반 글렌의 깃발을 올리자마자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 깃발 아래에 선 것이다.

심지어 방계이기는 하지만 글렌을 성으로 가진 귀족들조차 그럴 정도였다.

나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베르그렌을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베르그렌이 칼마르의 손이 닿아 있는 자라고 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왜 있잖은가 포섭된 스파이 특유의 부정적인 성향말이다.

외부의 세력에게 포섭된 스파이는 불행한 가정생활, 금전적인 어려움, 성격적인 결함, 성적인 문제 중 하나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아주 드물게 사상적인 충성이라는 이상한 이유도 존재하기는 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종교 대신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니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람은 정말 글렌 공작이 저지르는 폭주가 걱정이 되서 칼마르의 손을 잡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자기만의 뒤틀린 확신 같은 것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는 매우 건실하고 능력있는 귀족이다.

게다가 참모로는 특급이다.

까다롭고 변덕도 심했고 의심도 많았던 글렌 공작 아래에서 가장 오래 버틴 자 중 하나다.

솔직히 탐이 난다.

우리가 잡담을 나누고 있자, 자신의 분노를 무시하는 우리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버린 글렌 공작의 친족께서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대로 우리에게 돌격한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로 겹겹이 쌓인 우리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실력이었다.

그는 누구 칼에 찔려 죽은 지도 모를 정도로 여러 군데를 동시에 찔려서 즉사했다.

이것으로 글렌 공작위를 주장할만한 가까운 친족은 전멸이다.

‘느슨한 연대’를 위해 대화할 만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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