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8화 (108/248)

108. 느슨한 연대에 관하여

친 글렌파의 수장 노릇을 글렌 공작 집안사람이 하지 않고 있다는 것부터가 뭔가 이상하기는 했다.

베르그렌이 핵심 참모였다고는 하지만 글렌 공작과는 핏방울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내부의 반발을 진압하고 현재 친 글렌파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명분이야 있다.

지금 베이크 글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명분이 된다.

다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혹시 베이크 글렌이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실각하는 일을 우려하는 것이다.

듣기로는 누가 베이크 글렌에게 암살을 시도했던 것인지 그 배후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 그 배후로 글렌 공작 집안의 다른 친척들이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이런 상황이니 글렌 공작의 가까운 친척 중의 하나가 친 글렌파의 수장을 맡게되면 다른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아무리 머리가 꽃밭인 사람이라도 할 법한 생각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불만이라면 모를까 노골적인 반대는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지금까지 의식을 잃고 있는 베이크 글렌을 대신해서 친 글렌파를 잘 이끌어 왔다는 점도 고려해 줄 만하다.

반 글렌파와의 몇 차례 군사 충돌도 큰 피해없이 무마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아돈슨은 베르그렌이 실제로는 자신과 함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친 글렌과 반 글렌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실제로는 같은 편이라고 내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 하나?

“우리 둘은 전대 글렌 공작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습니다. 나는 행정 쪽이었습니다만, 베르그렌은 글렌 공작의 거의 모든 결정에 관여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글렌 공작령의 문제점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글렌 공작, 그 자체가 문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윌리엄 공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돈슨의 눈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자는 설득할 수 없다.

이미 결정을 내렸고, 세상 모두가 반대해도 밀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결정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니까.

게다가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 편을 들어야 뭐가 되었든 떨어지는 이익이 있는 법이다.

“선대 글렌 공작이 일반적인 귀족은 아니었지요.”

“그렇습니다. 선대 글렌 공작은 모든 면에서 파격적인 분이었습니다.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그분 앞에서는 귀족이라는 신분이 존중받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평민과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요. 그것은 가까이에서 그분의 일을 보좌하던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는 자는 가차없이 내쳐졌습니다. 나와 베르그렌이 그분의 핵심 측근으로 마지막까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능력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보다 선임이었던 측근 중 남아있던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의 사소한 실수에 대한 책임을 치고 작위를 잃거나 생명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그분은 귀족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억울함과 원한이 흘러넘쳤다.

신분제가 사회의 기본 인프라를 깔아주는 세상에서 신분이 무시당했으니 현대 지구에서 인권이 무시당한 것보다 더 심한 반발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선대 글렌 공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예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 자체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직접 손에 쥐고 부릴 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명예나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이익에 따라 명령에 복종할 사람 말입니다. 귀족 중에는 그럴 만한 자들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크후나 이름 없는 자들이 그들이었겠군요. 돈만 쥐여주면 시키는대로 뭐든지 하는 자들.”

“그렇습니다. 윌리엄 공. 그렇기 때문에 선대 글렌 공작이 전사했을 때부터 저는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새로운 글렌 공작에게 붙어서 다시 터무니없는 권력을 누리는 일을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아돈슨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베이크 글렌이 공작이 되자마자 벌였다는 숙청 작업이 아돈슨의 역린을 건드렸던 것이 틀림없다.

“아크후가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던 모양이군요. 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제서야 아돈슨은 외부에서 온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너무 드러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는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크후도 이름 없는 자들도 모두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설령 글렌 공작의 친인척이라고 해도 동의할 것입니다. 다행히 아크후는 사라진 모양이군요. 이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이름 없는 자들이 내쳐지는 것도 금방일 것입니다.”

“탈출한 자가 몇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활동하다가 이번 토벌을 피해 간 자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몇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리짓고 조직화 된 암살단이 없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암살을 통치 수단으로 쓸 수 없으니까요.”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토해낸 아돈슨은 탁자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서 내게 건넸다.

“약속한 대가입니다. 윌리엄 공께서 칼마르 백작령 내부의 청소를 하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쓰레기가 없다고는 하기 힘들 겁니다. 이를테면 글렌 공작이 남겨둔 것이라든가.”

이 상자에는 선대 글렌 공작이 칼마르에 심어놓은 간첩망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

아무리 약속한 대가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들의 눈을 넘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감사한 일이기는 했다.

“리네아 여백작이 좋아하겠군요. 그녀는 선친의 복수를 맹세했으니까요. 선대 백작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자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리네아 여백작의 복수에 일조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베르그렌과 리네아 여백작이 좋은 친구 사이임을 알고 있습니다. 가끔은 베르그렌이 작성한 서신에 제가 필요한 내용을 덧붙이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리네아 여백작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 이제 숨길 생각도 없다는 식이다.

첩보망을 매개로 동맹이라도 맺자는 것인지.

선대 글렌 공작이 살아있었다면 단 한 번의 고민도 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지만 지금 내놓는 이들의 제안은 그 울림이 미묘했다.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주변의 적대 세력에 대한 정리를 하는 느낌?

“칼마르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리네아 여백작의 결정에 따릅니다.”

나는 내게 발언권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아돈슨은 내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알려왔다.

듣고 가서 전해달라는 의도인듯 했다.

“베르그렌과 나는 이미 글렌 공작령의 나아갈 바에 대해 합의한 바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황제가 없는 시대에 살게 될 모양입니다. 베르그렌은 제국에 더 이상 황제는 없다고 확신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글렌 공작가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글렌 공작이라는 구심점없이는 결국 하나하나 각개격파 당해서 다른 공작에게 흡수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렌과 나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칼마르에게 암살단 마을의 처리를 의뢰하고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제공한 것은 단순히 내부의 적을 숙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친구를 만들기 위한 명분과 사귐을 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베르그렌은 새로운 체계를 ‘느슨한 연대’라고 명명했습니다.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모든 귀족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합의에 의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파벌의 수장이 독단적으로 모든 결정을 하고, 모두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느슨한 연대에 칼마르 역시 참가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조만간 합의체가 결성되면 정식으로 제안을 드릴 것입니다.”

말이 길고, 느슨한 연대 같은 멋진 단어도 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독재자를 제거하고 귀족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자치를 한다.

하지만 외부의 위협에는 공동으로 대응하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부족국가연합도 아니고.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서 귀족들 위에 권력이 약한 왕을 하나 선출해서 앉혀 놓으면 폴란드의 세임의회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망하기 딱 좋은 시스템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가 흘러넘치는 시대라면 저들의 의도대로 체계를 세울 수 있다.

글렌 공작에게 하도 당해서 웬만한 고난은 참아낼 수 있는 의지가 있다면 전쟁 몇 번 정도는 견딜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을 완전히 파괴할만한 내전이 휩쓰는 시대에 저런 순진한 발상으로 글렌 공작령의 이익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며 자신들의 몫을 움켜쥐고 내놓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굴겠지만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참상을 보게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이를테면 칼마르 국왕 전하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여 생존하자라는 식의 구호가 먹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런 시대가 올 때까지 인심을 사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칼마르는 상업 도시를 기반으로 한 백작령이고 우리에게 고객은 언제나 필요하니까.

“느슨한 연대라니! 담겨 있는 뜻을 금방 이해하기에는 너무 축약적인 것 같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돈슨 경?”

나는 아돈슨을 향해 우호적인 표정을 지었다.

*

베이크 글렌이 암살 미수로 인해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후로 친 글렌 파벌의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은 베르그렌이었다.

선대 글렌 공작이 휘하의 귀족들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암살을 공공연히 사용했기 때문에 암살 자체는 낯설지 않은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암살이 새로운 글렌 공작을 향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제서야 다들 베이크 글렌은 선대 글렌 공작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베이크 글렌이 새로운 글렌 공작이고 그의 능력이나 치세는 죽은 글렌 공작과 다를 것이라는 점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몸으로 체감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도 베이크 글렌이 공공연히 귀족들의 목을 자르고 협박한 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베르그렌은 사람들이 갑자기 깨달은 진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소문을 하나 더 퍼뜨렸다.

암살단이 말살당했다.

아돈슨이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선수를 쳐서 암살단을 모조리 죽였다.

근거도 없는 소문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소문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아돈슨이 암살단을 모두 처형했음을 밝히며 암살자가 횡행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자살할 생각이 아니고서야 완전히 말살시키지도 못한 암살단을 자신이 쓸어버렸다고 선언할 리가 없으니 아돈슨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암살단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귀족들은 글렌 공작의 또 다른 통치 수단이었던 이름 없는 자들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은 숨어있던 암살단과 달리 멀쩡하게 드러나 있는 자들이었다.

베이크 글렌이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친 글렌 파벌 내부의 긴장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리고 그 긴장은 베이크 글렌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 순간 터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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