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7화 (107/248)

107. 아돈슨 그리고 베르그렌

기둥의 겉을 마감한 나무는 불에 타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때 기둥이었던 돌덩이는 불길의 흔적이 남은 속살을 드러낸 채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달라붙어서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큰 돌덩어리였다.

그런데 지금 그 돌덩이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무기를 들고 당장이라도 전투에 들어갈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

지하에서 살아남은 자가 지상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건물에 숨어있던 암살자들이 죽은 것은 불이 번지고 금방이었지만 지하에 있던 암살자들이 죽은 것은 화재로 지상이 전소되고 좀 더 지난 후였다.

질식으로 죽은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질식으로 죽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저렇게 커다란 돌덩어리를 움직일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저 커다란 돌덩이를 움직인다고?

남들 다 죽는 질식까지 버텨내고서?

저거 과연 정상적인 사람일까?

생각해보면 글렌 공작 역시 정상이 아닌 자들을 거느렸다.

지금 지하에서 올려오려는 자가 단순히 실력이 뛰어난 암살자일지 아니면 인간이라고 보기도 힘든 어떤 이상한 키메라일지는 두고 봐야겠다.

나는 단검을 꺼내서 양손에 쥐었다.

돌덩이는 규칙적으로, 그리고 점점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보태다가 결국 돌덩이를 옆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둥 조각을 밀어내고 지하에서 올라온 자는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근육이 두드러진 것도 아니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다.

생긴 것조차 튀는 부분이 없었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무난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금방 잊혀질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히 전소한 건물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기사들을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글렌 공작이 죽었고, 그의 멍청한 아들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베르그렌의 명령을 받고 온 자들이겠군. ······이거 반응이 이상한데? 너희들 베르그렌의 부하가 아니었나? 설마 아돈슨이 보낸 것인가!”

말을 나누지 않아도 몸짓이나 분위기만으로도 상대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지금 앞에 있는 자가 그런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을 포위한 우리들을 상대로 혼잣말도 하고, 몇 마디 질문도 던지더니 우리가 글렌 공작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가 풍기는 기세가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었는데 우리가 글렌 공작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그렌과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갑자기 살기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습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어디 암살자 주제에 고개를 뻣뻣하게 드나?

이것은 절대로 아크후에서 시도한 암살에서 내가 독을 먹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기 때문이 아니다.

독을 먹고 [스킬 : 독저항] 같은 근사한 스킬도 얻었는데 유감이 있을 리가.

단지 암살자 따위가 태연하게 공작의 핵심 심복의 이름을 불러댈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저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다.

진짜로.

조정관을 연발로 놓은 소총에서 발사되는 총알처럼 비도를 연달아 날렸다.

제법 분위기를 잡고 거물 시늉을 하려고 했던 암살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가는 10개의 비도를 쳐내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10번째의 비도를 따라 암살자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역수로 잡은 단검은 적을 찍기에 유리하다.

훨씬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검으로 적을 찍어대는 공격은 암살자의 방어를 뚫기에 충분하기 않았다.

내 단검을 막은 것은 암살자의 두 손이었다.

암살자는 주먹을 쥐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단검을 향해 맞받아치거나 밀어냈다.

그는 내가 던진 비도를 맨손으로 막아낸 것처럼 단검 역시 막아냈다.

이게 가능한가?

그의 주먹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 단검의 날은 암살자의 주먹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얇은 철판 정도는 단숨에 꿰뚫어 버릴 만한 공격이 허무할 정도로 무력화되었다.

실제로 암살자의 주먹을 찍을 때마다 느껴지는 반탄력이 금속 못지 않았다.

심지어 소리조차 철괴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몸 전체가 철판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단검을 정수로 잡고 베기 위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날카로운 단검의 날이 번득일 때마다 암살자의 팔에 핏빛 흔적이 남았다.

당장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 같은 상처였다.

확실히 반응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두꺼운 가죽을 긁는 것 같았다.

뭐 이런!

이것은 갑옷을 입은 적을 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철로 만든 방어구와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섞어서 입은 적을 말이다.

그렇다면 단검은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상대를 쓰러뜨린 후 약점에 칼을 박아 넣을 때나 의미가 있는 무기니까.

아무래도 단검 말고 다른 수를 써야겠다.

내가 암살자를 찌르거나 베려고 하는 동안 암살자는 내 팔을 잡으려고 계속 시도했다.

일단 팔을 잡기만 하면 관절을 꺾을 생각이겠지만 이게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우리측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설마 내 팔을 잡고 얽어매서 인질로 삼으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기에는 암살자의 힘이 약한데?

단검이 다시 암살자의 옆구리를 노리고 쓱 지나가는 순간 기회를 포착한 암살자가 내 팔을 잡고 늘어졌다.

순간적으로 팔을 당기면서 양손으로 팔을 잡고 내리누르려고 한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되면 팔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 때문이라도 몸을 수그릴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무방비해진 등 뒤에 칼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나 팔을 당길 때 아예 끌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꼼짝도 않는 나로부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게 된 암살자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다. 압도적인 힘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강점이다.

돌기둥을 밀어 내고 지하에서 올라온 사람조차 힘에서는 눌리는 그런 압도적인 강함이 내가 가진 기본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오르벤 강체술.

맨손이 가지는 파괴력을 보충해 주는 강력한 한 방.

이것에 맞은 적은 살아나지 못한다.

아무리 피부가 갑옷 같더라도 이것을 맞고 살아날 수 있을까?

눈앞의 암살자는 화재 속에서도, 질식 속에서도 살아나왔다.

그러니까 그 암살자의 실력이 뛰어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실력이 뛰어나기는 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악조건에서 살아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 자의 진정한 실력은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숨고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료 암살자들이 질식으로 다 죽어나가는 고립된 곳에서도 호흡을 참고 버티는 것으로 살아나왔으니까.

결정적인 순간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

바로 암살에 특화된 강함인 것이다.

내 왼팔을 두 손으로 잡고 당황한 얼굴을 한 암살자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랫배에 한 방.

다시.

가슴에 한 방.

창자가 끊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 부상이었다.

내 팔을 잡은 암살자의 손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억지로 내 팔을 잡고 버티려고 했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겠지만 아무 의미없는 짓이었다.

마지막 남은 암살자는 내 팔을 끌어안은 채 무너졌다.

그것으로 마을 중앙에서 벌어진 전투는 끝났다.

우리가 전투를 끝냈을 때에 마을 외곽에서 암살자 마을의 구성원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고 있던 칼마르의 기사들쪽도 성공적으로 전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서 몇 명 놓치기는 했지만 탈출을 기도했던 대부분의 암살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마을을 샅샅이 뒤졌지만 살아있는 암살자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아돈슨의 의뢰를 완료한 것이다.

그래서 전투의 대가를 받기 위해 아돈슨에게 갔다.

*

나는 칼마르의 기사들과 함께 글렌 공작령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암살자들의 마을을 성공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불에 탄 건물의 지하에서 의미심장한 문서를 몇 종 건져내기도 했다.

칼마르의 상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멀쩡한 상단을 약탈하거나 상단주를 암살하도록 글렌 공작측에서 의뢰한 문서라든가,

리네아 여백작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은퇴한 시종을 납치해서 고문 후 사고사로 위장해 버렸다고 글렌 공작측에 보고하는 문서라든가 하는 것들을 몇 종류 찾아낼 수 있었다.

모두 글렌 공작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내용이고 칼마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꼼짝없이 배상을 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글렌 공작이 죽고 그의 후계자까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문서가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과연 아돈슨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자들이 칼마르 백작령까지 가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전대 글렌 공작의 소행이지 우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돈슨은 죽은 글렌 공작이 신뢰하는 핵심 측근이면서 동시에 글렌 공작령에서 몇 대째 자리잡고 지내온 귀족이기도 하다.

글렌 공작이 파벌의 귀족들에게 군림하기 위해 온갖 미친 짓을 벌였을 때도 그 옆에서 한 손 거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웃기게도 지금 그는 반 글렌 파벌을 대표하고 있다.

친 글렌 파벌은 죽은 글렌 공작의 핵심 참모였던 베르그렌이 글렌 공작의 친인척들과 우호적인 귀족들을 모아서 구성했다고 한다.

규모는 친 글렌 파벌이 더 크지만 새로이 글렌 공작이 된 베이크 글렌이 생사를 오가는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였기에 몇 차례의 충돌 후 양측 다 추가적인 전투는 자제하는 중이었다.

“암살단과 이름이 없는 자들은 글렌 공작이 권력을 유지하는 두 축이었습니다. 위험한 자는 암살단으로 죽이고 저항하는 자는 이름이 없는 자들로 위협을 했지요. 글렌 공작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돈슨의 주장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친 글렌 공작쪽의 세력이 만만치가 않다.

명분이 친 글렌 공작쪽에 있다는 이야기다.

생사가 오락가락하고 있다지만 베이크 글렌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 몫을 할테고.

그리고 설사 죽는다고 해도 글렌 공작의 친인척 중에 하나를 새로운 글렌 공작으로 내세우면 그만이다.

이대로 가면 세력에 밀린 아돈슨은 반역자로 죽을 확률이 높다.

더구나 공작들간의 내전이 코앞이다.

막시밀리안 공작도 문제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아르보그 공작이 본격적으로 나서면 반으로 쪼개진 글렌 공작쪽 세력은 금방 흡수당할 것이다.

친 글렌이든 반 글렌이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나와 베르그렌은 현 상태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뭐라고?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이 사람들 짜고 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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