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6화 (106/248)
  • 106. 암살자 마을의 멸망

    철심을 박은 기다란 봉이 연달아 허공을 찌르며 윌리엄의 접근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점수를 주고, 점수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깔끔한 경기가 아니란 말이다.

    윌리엄은 현란하게 움직이는 봉을 무시하고 그대로 외다리에게 직진했다.

    정면으로 찍어오는 공격은 흘려내고, 후려치는 봉의 타격은 그대로 견뎠다.

    아르보그 공작의 부하였던 거인이 휘두르던 철봉은 차마 맞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외다리 암살자가 휘두르는 봉은 맞아줄 만했다.

    그것도 단 한 대뿐.

    더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했다.

    윌리엄과 외다리 암살자 사이는 이제 1미터도 되지 않았다.

    외다리 암살자는 윌리엄이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오자 봉을 버리고 대신 윌리엄의 팔을 잡았다.

    팔을 당기고 바싹 붙은 후 발을 걸어서 넘어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외다리 암살자의 생각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팔을 강하게 당겼다.

    외다리 암살자가 윌리엄에게 확 끌려오는 순간 윌리엄은 상대방의 팔꿈치를 잡고 그대로 눌러버렸다.

    그리고 몸을 빼지 못하게 다리를 적의 가랑이 사이에 잡아넣었다.

    몸싸움은 좀 더 빠르고, 좀 더 힘이 강한 자가 이긴다.

    외다리 암살자는 서로가 서로의 팔을 당기는 순간 패배를 직감했다.

    굳건하게 버티고 선 윌리엄에게 자신이 확 끌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앗 하는 사이에 팔꿈치를 잡히고,

    미처 발을 걸기도 전에 팔을 눌렸다.

    팔꿈치를 축 삼아 눌러내는 상대의 힘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팔꿈치가 부러졌다.

    팔꿈치가 부러진 후 느끼는 고통은 자신이 다리를 잃을 때 느꼈던 고통 못지않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삭아버린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불편함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날, 날아온 바위에 발목이 으깨지던 그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외다리 암살자는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윌리엄은 상대의 팔꿈치를 꺾어버린 후 깔끔하게 외다리 암살자의 어깨까지 탈골 시켰다.

    겸사겸사 의족도 박살 냈다.

    “심문할 가치가 있는 자로 보인다. 철수할 때까지 살아있다면 데려갈 테니까 잘 묶어서 구석에 숨겨두도록.”

    윌리엄의 명령에 두 명의 기사가 달라붙어서 팔과 다리를 등 뒤로 연결해서 묶어놓은 후 한쪽 구석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

    길을 막았던 암살단원들을 제거하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장 나중까지 저항했던 외다리 암살자 역시 내가 나서자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자들, 죽어가면서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다.

    가옥 하나하나를 처리할 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는데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음이 나지 않았다.

    기습을 경고했던 고함 소리가 유일한 사람소리였을 정도다.

    아크후의 암살자들 중 우리에게 생포된 자들이 정상적으로 말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신체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 자들을 지배하는 규율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의미니까.

    누를 수 있을 때 확실히 눌러놓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약간의 시간벌기가 그들에게 있어서 의미가 없는 희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을 중앙의 큰 집으로 이동한 암살자들은 큰 집 주변과 내부에 규칙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 외곽과 비밀 통로로 이동한 자들은 아직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대기 중이었다.

    주목을 끌지 않고 조용하게 있다가 싸움이 벌어지면 탈출할 모양이다.

    탈출하려는 자들은 원래대로 마을을 포위한 부하들에게 맡기고 나는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나를 선두로 일단의 기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에서 주변을 내리누르는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언제나 이기고 또 이기리라는 자신감이 기사들에게서 엿보였다.

    이동하면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 절반은 남자다.

    다시 절반의 남자를 1/3은 노인, 1/3은 아이, 1/3은 장정이라고 구분하자.

    만약 100명이 있는 마을이 있다면 실제로 싸울 수 있는 장정은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중 1/3은 우리가 가옥을 습격할 때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14명 정도?

    방금 우리가 처리하고 온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숫자다.

    그러니 시간을 벌기 위해 우리를 막은 자들 중 몸이 정상이 아닌 자까지 포함된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마을 중앙의 큰 집을 거점으로 모여 있는 자들 30여 명은 어떤 자들일까?

    이곳은 성인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마을이다.

    암살자 마을이기는 하지만 남녀노소가 섞여 있는 곳으로 일반 마을과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젊은 남성의 숫자가 적어 보인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결론이 나온다.

    제대로 싸울만한 자들은 이미 대부분 죽었고, 남아있는 자들은 노약자들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노인, 아이, 여자. 그리고 노년이라기에는 좀 이른 중년의 남자 정도?

    여자나 노인이라도 무기를 들고 싸울 수는 있다.

    머릿수를 채우는 것이라면 아이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젊은 남자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체력과 실력을 갖춘 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사를 상대로 싸운다?

    아무리 암살자 출신이라고 해도 버티는 것도 불가능하다.

    현역 암살자라고 해도 기사에게는 상대가 안 되는데?

    단숨에 쓸려나갈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매복을 해서 기습하고, 멀리서 쇠뇌가 되었든 활이 되었든 뭐든지 쏘는 것뿐이다.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마을의 중심으로 쏠리게 하고 마을의 미래는 몰래 탈출시키는 것이 이자들의 계획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화살을 쏘는 여자도 있는 거겠지.

    이동하는 우리를 향해 중년의 여자 둘이 나타나서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누가 맞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마을 중앙 방향으로 뛰어갔다.

    대놓고 유인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유인책을 그대로 두고 볼 칼마르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두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이미 활을 겨눈 기사가 있을 정도였다.

    도망치는 두 여자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화살에 맞아서 쓰러졌다.

    쓰러진 여자들 너머로 마을 회관으로 쓰였음직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목조로 만든 것이지만 이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감시탑까지 높게 자리한 건물이었다.

    미니맵으로 보니 주변의 집과 연결된 지하터널도 몇 개 있었고, 창고로 보이는 공간도 보인다.

    물론 30여 개에 달하는 붉은 점도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마을 회관 안, 그리고 나머지는 지하인 것 같았다.

    들어오기만 하면 발목을 제대로 잡아주겠다는 배치였다.

    아무리 노약자들로 구성된 매복이라고 해도 나라면 모를까 기사들은 분명히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좁은 공간에서의 저격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말이지 저 건물 안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필요한 증거는 글렌 공작의 참모였다는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중요한 서류가 있다면 탈출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뻔히 보이는 위험한 덫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 불을 지르겠다.”

    내 명령은 간단했고, 기사들은 원래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건물의 네 방향으로 흩어진 기사들은 건물 안으로 불붙인 천과 나무를 던져 넣었다.

    뒤늦게 칼마르의 기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암살자 마을의 사람들이 방해하려고 했다.

    건물 내부에서 기척도 없이 숨어 있던 자들이 튀어나와서 화살을 날리고 쇠뇌를 쏘았다.

    심지어 밖으로 나와서 저지하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무장한 기사를 상대로 하기에는 모두 쓸모없는 저항에 지나지 않았다.

    화살 같은 것은 갑옷에 막혀서 별 위협도 되지 않았고, 밖으로 나온 암살자는 간단하게 제압당했다.

    단지 쇠뇌는 효과 좀 있어서 부상을 입은 기사가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마을 회관의 여러 곳에 붙은 불은 더 이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건물 안에서 불을 끄려는 암살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불은 이제 스스로 몸집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세찬 바람이 마을 회관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탄 불기둥은 단숨에 목조 건물을 집어삼킬 것처럼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불타는 마을 회관과 거리를 두며 물러섰다.

    가까이 있다가는 우리까지 불에 탈 판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혹시 탈출하는 자가 있다면 잡으려고 긴장을 한 채 불타는 건물을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몇 명은 쇠뇌살을 걸은 쇠뇌를 들고 동료들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건물에 불이 붙은 시점부터 미니맵을 띄워놓고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불길이 불기둥이 되어 건물을 집어삼킬 때부터 건물 내의 붉은 점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화염을 피해 건물에서 떨어졌을 때는 지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점 몇 개 이외에는 이 주변에서 더 이상 붉은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에 남은 적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나를 도와줄 1개 조만 남기고 모두 마을 외곽에 매복한 동료들을 지원하러 간다.”

    “사각없이 감시하려면 좀 더 인원을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다. 남은 자는 이제 하나뿐인 것 같으니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붉은 점은 계속 사라졌다.

    결국 지금은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이런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다니 어떤 자인지 궁금했다.

    나무로 된 건물에 화재가 나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격렬하고 빠르게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격렬하고 빠르게 일어난 만큼이나 극적으로 불길이 잦아든다.

    태울 것을 순식간에 다 태우고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앞의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안의 암살자들이 탈출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졌던 불이 어느 순간 확 가라앉았다.

    우리는 다시 건물로 접근했다.

    군데군데 잔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건물의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게 태워버린 곳이었다.

    재만 남았으니 잔불도 조만간 스스로 꺼지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덕분에 불이 꺼져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까이 가지도 못할 정도로 강렬했던 열기가 확 수그러들었다.

    나는 아직 열기가 훅훅 느껴지는 건물 잔해의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건물의 타지 않는 잔해와 재뿐이었다.

    붉은 점이 있었던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 역시 나무처럼 재만 남겼다.

    미리 알고 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구분할 수 없는 그런 흔적만 남은 것이다.

    나는 비를 맞으며 재와 열기 사이를 가로질렀다.

    목표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붉은 점이 있는 곳은 무너진 기둥 아래였다.

    기둥 아래에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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