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4화 (104/248)

104. 암살자들의 마을

나는 따로 정해놓은 무기 없이 그때그때 편한 대로 무기를 사용하는 편이다.

때로는 무기 없이 맨손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낄 때조차 있다.

한때는 맨손으로는 파괴력이나 살상력이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오르벤 강체술을 익힌 이후로는 그런 우려조차 쓸데없는 걱정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기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 셈이다.

그래서 익숙한 무기가 아니라 싸울 장소에 걸맞은 무기로 무장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가져온 무기들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칼의 상태를 확인한 후 등에 고정한 칼집에 집어넣었다.

오늘의 나는 실내에서 싸울 것을 상정하고 길이 60cm 정도 되는 칼 두 자루와 24개의 비도, 그리고 6개의 단도를 몸 곳곳에 착용한 상태였다.

그것은 나와 함께 온 칼마르의 기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몇 명은 나보다 더 많은 무기를 준비했고, 마을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은 방패까지 챙겼다.

무장의 점검을 마친 우리는 목적지에 대한 정찰에 들어갔다.

특히 나는 미니맵에 나타난 마을의 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마을 가까이 접근하기까지 했다.

정철을 마친 후 우리는 암살자 마을 외곽에서 최종적인 점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칼마르의 기사들에게 내 능력의 일부를 공개했다.

“눈치를 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사람의 인기척이나 존재감 같은 것에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멀리 숨어있는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채는 편이지. 적의를 가진 사람은 더욱 쉽게 느낀다. 이를테면 나는 저쪽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 위에 사람이 하나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신비가 존재하는 세상이라서 대놓고 미니맵을 그대로 설명해도 별문제 없이 받아들여지기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밖으로 과시하고 알려야 할 능력이 있는가 하면 되도록 숨겨야 할 능력도 있는 법이다.

평범을 벗어나는 내 전투 능력이 전자라면 미니맵은 분명히 후자다.

언제나 선봉에 서서 적을 무찌르는 강한 지도자는 열렬한 추종자를 낳는 법이니까 내가 강하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널리 알리고 광고해도 괜찮다고 본다.

그러나 미니맵은 전략무기에 속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시기에 적에게 한 방 먹이려면 우리 편도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니맵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부하들이 좀 더 강하게 내 명령을 따르게 하고 싶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더라도 일단은 명령에 따랐으면 했다.

그래서 미니맵의 아주 작은 부분만 공개한 것이다.

내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사도 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도 있었다.

어쨌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사람들도 지금까지의 내 행동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던 것 같다.

미니맵에는 사람 이외에도 다른 정보가 표시된다.

특히 지형 정보는 내가 가보지 않은 지역이라도 미니맵에 표시된다.

내가 미니맵을 전략무기라고 생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적을 구분하고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기사 윌리엄의 입장에서나 중요한 것이다.

사령관 윌리엄의 입장에서는 편하다고 느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닿는 거리의 모든 지형지물을 나타낸다는 것은 실시간 정찰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 미군이 그 비싼 인공위성이나 각종 정찰기와 드론까지 동원해서 얻는 정보를 중세 문명의 세상에서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미니맵을 보면 마을의 건물뿐 아니라 건물 사이를 잇는 비밀통로까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소규모 전장에서는 맵핵을 켜놓고 전투를 하는 것과 같다.

지려고 해도 지기가 쉽지 않다.

전근대의 전장이라는 것이 누가 바보짓을 덜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미니맵은 사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령관 윌리엄의 입장에서 보면 미니맵은 승리를 위한 필승 카드인 셈이다.

1만 명의 용병군단과도 바뀌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알아낸 정보에 따라 암살자 마을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 결과 나는 30명의 기사들을 3명씩 묶어서 10개 조를 만든 후 4개 조는 나와 함께 마을을 공격하고 6개 조는 마을의 외곽에서 탈출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마을 외곽으로 빠지는 비밀 지하도의 입구 2곳, 마을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길 2곳에 1개 조씩 매복시키고 남은 2개 조는 다른 곳을 통해 마을을 벗어나는 자들을 맡겼다.

우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새벽 미명, 해가 뜨기 직전 어두움이 막 가시려는 그 순간에 암살자 마을로 진입했다.

암살자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특히, 암살자의 강함에 대해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경호하는 기사들을 죽이고, 목표물을 제거하는 암살자?

어둠 속에서 몰래 다가와 목표물을 제거하고 다시 조용히 사라지는 그런 암살자?

물론 존재할 수는 있다.

심지어 황제가 암살된 전례도 있다고 하니 없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암살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히 암살자로 키워진 자들이 아니라 빈민가에서 은화 몇 개에 팔려 온 자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 바른 단검 하나 받고 목표물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드는 것이다.

암살의 목표물도 귀족같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상점 주인이라든가 경쟁 조직의 간부라든가 하는 식으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러나 인력사무소나 다름없는 암살업계에서도 특별한 자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암살자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만든 자들.

제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며, 황제도 죽인 적이 있다는 아크후.

약한 자의 검을 자처하며 억울한 원한을 풀어준다는 아쉬리프.

걸맞은 돈을 준다면 신이라도 죽여준다는 무카실라.

에할름이 남겨준 문서에 나오는 암살자들의 단체다.

아쉬리프와 무카실라는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아크후는 이렇게 정착한 마을까지 노출되었다.

아마 글렌 공작과 손을 잡고 그의 칼 노릇을 한 것이 독이 된 듯하다.

아크후는 일반인을 돈으로 사서 일회용 화살로 써먹는 일반적인 경우의 암살자가 아니라 제대로 무술 교육을 받는 암살자 집단이다.

물론 무술 교육을 받았다고 암살자가 기사보다 강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사람따라 다르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강한 사람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강한 자가 얼마나 있을지는 이제 곧 칼마르의 기사들이 테스트해 줄 예정이다.

기사는 전투의 베테랑

어려서부터 전투를 위해 키워진 인간병기이고, 그에 걸맞은 명예와 대우를 받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강하다.

그런 전투기계가 암살자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저기에 있는 나무 위에 사람 하나가 숨어서 경계를 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을 입구를 봉쇄하고 탈출하는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기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쇠뇌로 경계병을 저격했다.

감시하던 눈이 제거당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4개 조의 기사들과 함께 마을로 진입했다.

평범한 여행자가 이 마을을 방문한다면 일반적인 농촌 마을과 다른 것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젊은 사람의 숫자가 좀 적다는 느낌을 받기는 할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젊은 사람은 암살단의 일원으로 외부에 나가서 활동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 손에 잡혀 죽은 자들처럼 된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늙은 암살자들과 아직은 미약한 암살 꿈나무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겠다.

미니맵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붉은 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모두가 죽여야 할 대상이다.

경계하던 암살자가 죽었으니 몸을 숨기면서 조심스럽게 마을에 접근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당당하게 걸어서 마을로 접근했다.

그리고 나는 마을 안으로 연결되는 길 입구에서 잠깐 멈췄다.

미니맵 상의 붉은 점이 하나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다!

구덩이를 파고 안에 숨어서 외부를 감시하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칼로 길옆에 풀이 나 있는 곳을 찔렀다.

칼끝에 확실히 느낌이 왔다.

칼을 뽑아보니 피가 묻어 있었다.

다시 한번 칼을 땅에 깊숙이 찔렀다.

칼을 통해 느껴지던 심장의 진동이 멈췄다.

미니맵에 보이던 붉은 점도 사라졌다.

과연 암살단이 똬리 틀고 있는 마을이라고 할까?

죽을 때까지 나지막한 신음 소리 한 번으로 끝이었다.

우리는 조별로 나뉘어서 가옥 하나하나를 정리해 갔다.

아직 자고 있던 아이.

막 일어나서 부뚜막에 나오던 여자.

낯선 자들을 보고 달려들려던 남자.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갔다.

가옥 하나를 피바다로 만들고 다음 가옥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우리는 아직 마을에 사신이 임했음을 눈치채지 못한 자들에게 같은 일을 반복했다.

준비하지 않은 자는 손쉽게 죽어갔다.

무기를 꺼내들고 저항한 자는 아예 없었다.

대개는 도망치려고 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갔고, 일부는 맨손으로 달려들다가 죽었다.

기계적으로 암살자들을 죽였지만 어린아이를 안고 도망가려는 여자를 죽였을 때 내 눈빛이 흔들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칼끝의 망설임이 느껴졌던가.

나와 함께 움직이던 기사가 눈치빠르게 끼어들어서 아이를 처리했다.

이자들이 진짜 암살자인가?

이 마을이 진짜 아크후가 자리잡은 마을일까?

의문이 의혹이 되고 그것이 족쇄가 되어 내 칼이 느려질 때 밖에서 고함이 들렸다.

일방적인 학살이 끝난 것이다 .

아직 우리가 방문하지 못한 가옥에서 무기를 든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어차피 조용하게 마무리가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밥상을 내 던지며 저항하는 남자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이마에 비도를 박은 자는 그대로 앞으로 무너졌다.

가옥 안의 사람을 모두 처리하고 밖으로 나오니 벌써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칼마르의 기사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모두 중년 이상의 나이 든 사람들 뿐이었다.

칼부터 도끼, 곤봉, 도리깨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설프지가 않았다.

칼밥을 오랫동안 먹었고 실전도 제법 뛰어봤다는 태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헛짚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를 견제하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덤벼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시간을 벌기 위해 남았다는 이야기겠다.

내 시선은 반투명한 미니맵으로 돌려졌다.

미니맵에서는 수십 개의 붉은 점들이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절반은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집으로, 나머지 절반은 산산이 흩어져서 마을을 벗어나려고 하거나 아니면 몸을 숨기는 모양인지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1/3에 가까운 붉은 점을 지운 후였다.

남은 자들은 대략 70명 정도.

이 정도면 별것 아니다.

정체를 드러낸 암살자 따위는 햇빛아래 나온 지렁이와 다를 바가 없다.

아크후는 이제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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