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3화 (103/248)

103. 글렌 공작령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결론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물리 법칙이나 수학 쪽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업맨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일상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뜬금없이 벌어지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인과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건은 우연이라고 주장을 해도 부정하기 어렵다.

때문에 최대한 이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행운이 따라주기를 기대하면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일이다.

나는 칼마르 백작령 주변의 남작령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영지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지역과 일시적으로나마 칼마르의 세력권에 속하게 된 영지들이 뒤섞여 있다.

그런 곳들을 한데 묶어서 칼마르 백작령과 공작령들 사이의 완충 지대로 삼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구상이다.

리네아의 자문위원들은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다행히 당분간은 큰 방해없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제국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두 공작 가문 사이가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글렌 공작을 급습해서 죽여버린 이상, 두 세력의 화해나 공조를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둘 중 누구도, 특히 막시밀리안은 칼마르를 향해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막시밀리안 공작이 글렌 공작에 비해 세력이 약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글렌 공작을 기습으로 죽였다고 해도 근본적인 세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공작의 배후에는 아르보그 공작이 버티고 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 지원을 할지 의문이지만 아예 손을 놓고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을 글렌 공작쪽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지 가주가 전사하고 황도에서 귀환하던 병력이 몰살을 당했는데도 반격은 삼가고 있었다.

대신 죽어버린 글렌 공작의 지위를 이어받을 계승자를 선정하는 문제에 집중해서 글렌 공작의 전사한지 1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차기 글렌 공작이 정해졌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였다.

“조만간 복수를 명분으로 내건 글렌 공작군을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패트슨 남작도 알겠지만 글렌 공작군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올롭스 남작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윌리엄 공. 글렌 공작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병사들도 꽤나 정예라는 말을 하더군요.”

“글렌 공작이 자기 휘하의 귀족이나 가신들을 좀 심하게 대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덕분에 병사들의 질이 전체적으로 올라가기는 했지요.”

“아! 그런데 재미있는 소문이 있습니다. 새로 글렌 공작이 된 자 역시 그 성향이 전대 글렌 공작 못지 않다고 합니다. 가신들 중에서 벌써 2명이나 목이 잘렸고, 파벌의 귀족들에게도 거친 태도를 보여서 전전긍긍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별로 좋은 방식이 아닌데? 이제 막 공작위에 올라서 권위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없는 사람인데 무리한 짓을 하는군요. 공포로 권위를 세우는 것은 의외로 세심하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함부로 쓰면 위험해요. 이거 글렌 공작쪽이 먼저 무너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둘 다 오래 버텨주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패트슨 남작은 내 비위를 맞추느라고 열심이었다.

한 때 막시밀리안 공작 파벌에 속해 있었고, 지금은 칼마르 백작의 봉신으로 들어온 처지라서 나름대로 내게 신경쓰는 티가 역력했다.

내가 산적질할 때 칼마르를 그렇게 괴롭히던 자가 이제는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내가 바꿔놓은 역사가 얼마나 많은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래도 새로운 글렌 공작이라니!

이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휘하의 귀족들을 마치 병사처럼 굴리며 수틀리면 공개적인 채찍질도 서슴지 않던 글렌 공작의 소문이 산에 있던 내게도 들려 왔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말을 한 번 더 해야 했다.

글렌 공작령을 새롭게 담당하게 된 시청의 관리가 미친듯이 말을 달려와서 내게 놀라운 첩보를 전한 것이다.

글렌 공작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큰 부상을 입었고, 현재 의식불명이라는 첩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글렌 공작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둘로 쪼개져서 전투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째 휘하의 귀족들을 함부로 다룬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 쎄하다 싶더니만.

어쨌든 이것으로 막시밀리안 공작은 살아났다.

적어도 자신의 세력을 추스를 시간은 벌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멜러 시장이 백작부군 각하께 전달하는 서찰입니다.”

시청의 관리는 첩보를 전한 후 내게 새로운 봉투를 내밀었다.

멜러 시장이?

평소에 이런 것을 보내지 않던 사람이 보내는 편지라니 오히려 긴장이 된다.

재정관을 겸하는 사람이라서 군에서 쓰는 비용에 대해 잔소리가 심한 편이기는 해도 이렇게 따로 편지를 비밀스럽게 보내야 할 일은 없을텐데?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다.

편지는 암호문으로 되어 있었다.

“물증이 나왔군.”

나는 편지를 구겨버리며 중얼거렸다.

해석된 암호문 편지를 읽고 나니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리네아의 전 약혼 후보자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나에 대한 암살 시도가 글렌 공작의 짓이라는 심증은 전부터 있었다.

리네아는 자신의 첩보망을 통해 전후사정을 파악한 후 아예 확신을 하고 있었고.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대놓고 글렌 공작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물증도, 제대로 된 증인도 없었으니까.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우리가 떠들어봐야 정치적인 공격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무런 실익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증거도 없이 무고로 공격했다면서 역으로 공격을 당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보다 공격의 명분이 더 확실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된 보복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손에 증거가 들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증인도 확보했다고 한다.

원하면 증인을 몇 명 더 넘겨줄 수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글렌 공작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돈슨의 선물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증거를 넘기면서 한가지만을 요구했다.

마을 하나를 몰살시켜 줄 것.

살아있는 것은 아이부터 노인, 여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몰살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 손을 빌려서 껄끄러운 자들을 제거하려는 속셈이 너무 훤하게 보였다.

평범한 마을일 리는 없다.

상황을 보아하니 십중팔구 암살단 마을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이에 여자까지 죽이라고 요구할리가 없다.

그러나 이런 제의를 거부하기에는 칼마르 백작령이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너무 컸다.

멜러는 약혼자에 대한 암살 사건 이외에도 이들이 칼마르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 사고에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특히, 전대 칼마르 백작의 사고사에 대한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암살자 마을에 대한 토벌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곧장 칼마르 시로 귀환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리네아의 동의를 받는 것은 힘들었다.

“왜 당신이 가야 하죠? 왜 위험한 곳에만 돌아다니는 건가요?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리네아. 불안해 할 것 없어요. 나는 강합니다. 인간 중에서 나를 이길 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리네아의 선친께서 키운 강력한 기사들과 함께 합니다. 나는 선제후의 기사들보다 우리 칼마르의 기사가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적들은 별것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합니까? 윌리엄. 대낮에 눈앞에서 휘두르는 칼은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밤의 어둠 속에서 몰래 뒤를 찌르려고 다가오는 단검은 무섭습니다. 더구나 당신은 독에도 당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대가 전투에 나가는 것은 각오했지만, 암살자 마을이라니요? 왜 그런 위험한 일을······우리는 결혼식도 아직 올리지 않았어요.”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들었던 비난, 불평, 마지막 결별 선언.

그런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일에 미쳐서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참.

사람 성격 어디 안 간다고.

죽고 난 후에도 다시 바보짓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나는 리네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리네아. 맹세코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대로 간소하게라도 결혼식을 올립시다.”

그제서야 리네아는 내가 기사들과 함께 암살자 마을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

나는 영지군에 소속되어 있는 30명의 기사를 소집했다.

모두가 마스터 요한에게 훈련받은 정예 기사들이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신비를 깨달아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기사도 있다.

대부분은 좀 더 힘이 세거나, 좀 더 몸이 빠르거나 하는 정도지만, 몇 명은 불을 다루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낮처럼 보기도 하는 등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이들 정예기사는 모두 마스터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입장에서는 사형제인 셈이다.

실제로도 이들은 오르벤 강체술을 익힌 나를 사형으로 대했다.

마스터 요한이 그의 진실된 무공인 오르벤 강체술을 전부 가르친 자는 셋 밖에 없고, 그 중에서 칼마르에 남아 있는 자는 내가 유일하니 사문의 장제자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적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설명했다.

특히, 암살자 마을에서는 아이까지 죽여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명예에 민감한 기사들 중에는 여자나 아이를 죽이는 것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란의 여지를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우려가 무색하게 30명의 기사 전원이 글렌 공작령에서 벌어지는 작전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곧장 글렌 공작령으로 잠입했다.

암살자 마을은 글렌 공작의 직할령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 가기까지 여러 남작령과 백작령을 지나야 했지만 글렌 공작가에서 벌어진 내전 덕분에 우리의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영지민들은 혹시나 시비에 얽힐까 두려워 무기를 가진 사람을 보면 못 본 척 피해가기에 바빴고, 병사들 역시 고용된 용병 행세를 하며 그냥 지나가는 우리에게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렇게 불과 며칠 만에 글렌 공작의 세력권을 가로질러서 직할령에 도착했다.

암살자 마을은 평범한 마을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과연 이곳이 그 악명높은 아크후의 근거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이 아크후의 근거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에할름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상자에서 나온 문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바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무기를 꺼내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