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글렌 공작이 죽었다.
사서들의 인솔자는 엘더러를 만나러 갔을 때 얼굴을 보았던 사람이었다.
아예 낯선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그가 황궁 도서관 소속임을 알고 있다는 정도, 그것이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는 리네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은 황궁 도서관의 수석 사서였던 발드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리고 칼마르에서의 도서관 건립을 위해 자신이 파견되었음을 알려왔다.
“황궁 도서관이 칼마르 백작령으로 피난을 온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칼마르 백작 각하와 맺은 계약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칼마르 백작령에 도서관을 건립하고 출판 사업을 꾸리기 위해 온 것이지요. 약속하신 황금이 저희의 기대치를 넘었기 때문에 사업의 빠른 진행을 위해 별도로 보관하던 황궁 도서관의 자료를 가지고 오기는 했습니다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단순히 도서관의 건립을 위해 왔다고 주장을 하지만 누가 저 말을 믿겠나?
어떤 사람이라도 황궁 도서관과 칼마르 간에 모종의 밀약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황궁 도서관이 말이 황궁 도서관이지 실제로는 황제의 첩보 조직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것도 단순히 첩보 수집이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책 조언까지 하던 비중 있는 조직이었던 같다.
적어도 중요 귀족들은 황궁 도서관의 진실된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황궁 도서관은 어둠 속에 숨어있어야 할 첩보 조직의 원칙을 어기고 뭔가 일을 꾸미다가 실패해서 막대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명분이야 제국의 분열과 내전을 막기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첩보 기관이 이 정도로 돌출 행동을 하면 관심있게 주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황도가 불길에 휩싸이자마자 냉큼 칼마르로 도망을 쳐온다?
주목을 받지 않고 세력을 키우고 싶은 입장에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상황이다.
물론 제국을 통일한 생각이라면 두 손을 높게 쳐들고 만세를 불러도 된다.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니까.
그러나 칼마르는 외부의 누군가가 주목하는 것 자체가 싫다.
돈이 많은 상업도시이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세력에게 흡수당할 정도로 규모가 애매한 세력.
딱 그정도의 인식이면 만족이다.
그런데 황궁 도서관이라니!
이것은 대놓고 관심종자 등극이다.
내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자 사서들의 인솔자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추가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현 황궁 도서관장이신 엘더러 님께서 프리시오 공작에게 갔습니다. 프리시오 공작과는 이미 3년 전부터 황궁 도서관의 이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조만간 새로운 황궁 도서관의 이전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물론 새로운 황궁 도서관은 프리시오 공작령에 세워집니다.”
이거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리네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사서들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발드리 경. 황궁 도서관이 완전히 불에 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대들이 이렇게 미리 준비하는 것을 알았다면 아까운 자료들이 불에 타서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진정으로 아쉽게 생각한다. 늦었겠지만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서 혹시라도 화재를 피한 것이 있을지 확인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보존해야 할 자료는 모두 프리시오 공작령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황궁 도서관의 이전으로 관심을 받을 사람은 선제후였던 이스윈 프리시오 공작이 될 모양이다.
현 황궁 도서관장과 그를 따르는 사서들이 프리시오 공작에게 갔으니까 황궁 도서관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프리시오 공작에게 몰릴 것이다.
황궁 도서관의 입장에서 칼마르는 전임 도서관장의 선택 때문에 급조된 조커 카드 정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만약을 대비한 비장의 한 수, 그러나 프리시오 공작에게 건 자신들의 선택이 맞아떨어진다면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조커 카드인 것이다.
리네아는 자신의 생각대로 황궁 도서관의 선택은 원래 프리시오 공작이고, 사람들의 주목도 그 쪽으로 쏠릴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자 한결 밝아진 얼굴이 되었다.
나 역시 칼마르가 시간을 버는 동안 주목도가 올라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제국 동남부의 상황은 내 예상보다 더 빠르게 격변하기 시작했다.
시장인 멜러가 글렌 공작을 담당하던 관리를 갈아치우기도 전에 글렌 공작의 목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자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바르거 막시밀리안 공작.
궁정 쿠데타 끝에 새로 막시밀리안 공작이 된 자.
아르보그 공작의 손에 들어간 꼭두각시라는 인상이 무색하게 그는 황도에서 귀환하자마자 글렌 공작을 공격했고, 심지어 성공해 버렸다.
리네아와 내가 정보를 끌어모으고 분석하느라고 칼마르에 주저앉아 있는 동안 막시밀리안 공작이 선제적으로 움직여서 그의 가장 위협적인 적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글렌 공작이 아니라 칼마르를 노렸다면?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며칠 전의 내가 겉멋이 들었음을 인정했다.
어울리지 않게 예측을 하고, 전략을 짜려고 하다니!
그런 것은 평생 귀족으로, 목숨을 건 정쟁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칼을 들고 병사들을 통솔하러 가야 했었다.
같이 훈련을 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보급품을 점검하고, 적정을 살펴야 했다.
그래서 늦었지만 그렇게 했다.
글렌 공작의 소식을 듣자마자 용병군 일천과 함께 곧장 칼마르 시를 떠난 것이다.
목표는 외곽 지역의 안정, 그리고 생생한 정보의 수집이었다.
*
바르거 막시밀리안이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황도에 도착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 순간 자신이 생각해 왔던, 그리고 세워왔던 계획이 근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위를 두고 경쟁하는 선제후들 사이에서 몸값을 올리면서 아르보그 공작에게서 벗어나려는 계획은 즉시 쓰레통에 처박아 버렸다.
황제위를 두고 경쟁하는 선제후들은 없다.
그 존재가 사라졌다는 확신이 들면 선제후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선제후와 왕으로 만족하겠다는 선제후가 있을 뿐이다.
어떻게 보아도 막시밀리안 공작가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남작만도 못했고, 그렇다고 파벌의 귀족들에게 함부로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휘하의 귀족들이 내막을 아는 순간 계속 막시밀리안 공작가와 같은 배를 타 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것들은 미래의 문제였다.
내전이 벌어지고 야망을 품은 사람들이 날뛴다는 예상은 모두 미래의 문제였다.
지금 당장의 문제는 과연 내일 살아서 황도를 떠날 수 있을지의 여부였다.
대회의에서 미리 합의한대로 미성년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돌아왔지만 미리 합의했다고 해서 두 명의 선제후를 동시에 적대해 버렸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를 반대했으니 나는 너를 공격하겠다는 선언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전쟁의 명분이다.
저놈이 황제 선출을 거부해서 내전이 발발했으니 책임을 지라는 요구 역시 너무도 정당한 전쟁의 명분이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신이 먹기 좋게 손질되어 도마위에까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선제후라도 합당한 명분을 들고 자신을 공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제후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면 즉시 황도를 떠나서 공작령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선제후들은 황도에서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황도의 치안 유지군과 수비군은 몇 개로 나뉘어져서 제각기 자신이 섬기기로 한 선제후들을 위해 칼을 들었고, 선제후들의 성에서 몰려 나오는 병력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특히 탈출 과정에서 맞부딪쳤던 뱅트손 공작의 덩지 큰 기사들은 인간 같지도 않았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의 정예 기사들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사지가 찢겨 나갔기 때문이다.
사지가 찢겨나갔다.
글자 그대로 몸통에서 팔을 잡아서 뜯어내고, 다리를 비틀어서 찢어버렸단 말이다!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가는 자신의 기사들을 뒤로 하고 잔뜩 겁에 질린 채 허둥지둥 도망치던 막시밀리안 공작이 정신을 차린 것은 황도의 동문을 지난 후였다.
몇 명 남지 않은 수행인들이 막시밀리안 공작을 챙겼지만 그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이러려고 내가 친척들을 다 죽이고 공작이 되었나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솟아올랐다.
동시에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다른 선제후들의 군사력을 보고 몰려오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때 막시밀리안 공작이 본 것이 글렌 공작의 일행이었다.
동문을 빠져나오는 글렌 공작의 일행은 자신의 원래 데리고 왔던 수행원보다 세 배는 더 큰 규모였다.
전투가 한참인 황도를 빠져나오느라고 피해를 약간 입기는 했지만 별로 위협은 안 된 모양이었다.
대부분 보병이고 기병이 일부 섞인 글렌 공작의 일행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기마병이 글렌 공작의 일행을 휘몰아쳤다.
갑자기 나타난 기마병은 멀리서 왔는지 먼지투성이였지만 동문 앞에서 나오고 있던 글렌 공작의 군대를 보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들이박았다.
기병을 상대하는 전투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보병도 기병의 한끼식사에 지나지 않는다.
과연 글렌 공작의 병사들은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짓이겨졌다.
말 위의 병사들이 무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군마의 말발굽에 밟히고 채여서 산산이 부서지는 글렌 공작의 군대였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정체불명의 기병대가 들고 있던 깃발에 뒤늦게 시선이 갔다.
날개달린 용과 방패와 검.
프리시오 공작의 기병대였다.
그들은 글렌 공작의 병사들을 한차례 휘몰아친 후 그대로 동문을 통해 황도안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그제서야 막시밀리안 공작은 정신이 들었다.
한차례 꿈같이 흘러갔던 모든 장면은 그의 머리 속에서 다시 되새김질 되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공포를 벗겨내고 냉정하게 다시 보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글렌 공작이 만만하게 보였다.
글렌 공작이 병력을 소집하기 전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그래서 아직 글렌 공작의 일행이 패배 후의 수습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신의 수행원들을 향해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돌아가서 소집 명령을 내리면 하루 내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영지군과 용병 포함해서 5백명 정도는 대기하고 있습니다. 공작님.”
“대기하고 있는 병력 뿐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다. 경비병이든지 귀족가의 사병이든지 가리지 않겠다.”
“정확한 숫자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어림잡는다면 한 2천명 정도가 한계가 아닐까요?”
“2천명. 2천명이라.”
막시밀리안 공작은 양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서 공작령으로 귀환했다.
말이 지치면 다른 말을 구매하든지 빼앗든지 훔치든지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번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신의 영지로 귀환하는 글렌 공작을 기습해서 죽일 수 있었다.
칼마르 주변의 상황이 한치도 앞을 볼 수없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막시밀리안 공작과 글렌 공작 사이에서 주사위를 던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