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1화 (101/248)

101. 준비하는 시간

칼마르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황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당시 황도에는 8명의 선제후 이외에도 변경백을 제외한 제국의 중요 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하나하나가 특정 지역을 대표하거나 특정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보니 누가 죽어도, 또는 누가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황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탈출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가 어떻게 끝났는지 그 전말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 칼마르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칼마르 백작가는 황제가 선출되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하게 몸을 낮추고, 되도록 분쟁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어왔다.

그러나 이제 황제는 없다.

칼마르가 기대했던 미래는 오지 않는다.

대신 남아 있는 것은 왕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인지 모를 선제후들뿐이다.

왕이 되고 싶은 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하겠고, 황제가 되고 싶은 자는 다른 귀족들의 영역을 공격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전쟁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 행위.

바로 그 전쟁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고 가장 잔인하다는 내전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름은 근사하게 통일 전쟁이 되겠지만 본질은 내전이다.

당연하겠지만 지금까지 칼마르가 취해왔던 태도는 내전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

칼마르가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내전에서 되도록 피해를 덜 입기 위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모두가 동의하는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고민을 많이 해야 할 문제니까.

지금 당장은 황도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칼마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정도면 된다.

그리고 보니까 칼마르에게 가장 운이 좋은 경우는 칼마르 백작령과 인접하고 있는 선제후들이 죽는 것이지 않을까?

만약 글렌 공작과 막시밀리안 공작이 죽는다면 칼마르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니까.

그러나 그들이 건재하다면 조만간 전쟁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

너무도 당연해서 가끔 잊어버리기까지 하는 사실이지만 칼마르는 제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력한 상업 도시이자 물류 거점도시이고, 제국 남동부 해상 교역망의 중심이다.

돈과 상품, 인력이 칼마르를 거쳐서 흐른다.

당연하겠지만 정보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한 칼마르의 위상 덕분에 필요한 정보는 생각보다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다.

특히, 리네아가 가동한 첩보망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정보까지 긁어왔다.

마치 인싸 친구 하나를 사귀면 그 친구를 통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선제후 측근이 들여다보는 정보의 질은 칼마르보다 뛰어난 수준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황도에서 벌어진 일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죽은 선제후는 둘이군요. 지슬리, 그리고 리딕슨.”

“리딕슨은 원래 선제후들 중에서도 약한 축이었으니까 그럴만하다고 생각되지만 지슬리 공작은 의외입니다.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지슬리 공작이라면 해상 교역망의 복구를 위해 해적을 쓸어버리는 과정에서 만났던 선제후다.

게스티 백작이라는 전문 경영인을 내세워서 바다에 슬쩍 발끝을 담갔다가 반발이 만만치 않으니까 어멋 뜨거라는 식으로 손절을 치고 산으로 돌아간 자였다.

태도나 생각하는 것이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생긴 것과 달리 전혀 믿을 수 없는 자였는데 이렇게 가 버리다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뱅트손이 지슬리 공작을 노리고 공격했다는 첩보가 있어요. 윌리엄.”

“왜 하필 지슬리 공작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뱅트손은 감정적이라는 평판이 있기는 하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에요. 감정적인 성격만큼이나 집요함도 가진 사람이니까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거에요.”

설마?

나는 황궁 도서관에서 가져온 자료를 떠올렸다.

제국 전체에 걸친 다양한 인문지리적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귀중한 자료인 것은 틀림없다.

만약 제국을 통치하는 자가 이 자료를 본다면 귀족 작위는 몇 개라도 내려줄 정도다.

그러나 제국의 남동쪽에 치우쳐 있는 칼마르 백작령의 입장에서는 당장 큰 이익은 없다.

우리가 제국을 통일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필요를 느낄 때까지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전혀 뜬금없는 자료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제국의 각종 비밀 결사와 단체에 대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존재 - 기록에는 그분이라는 표현을 썼다 - 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 문서에는 그 존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 지슬리 공작령의 광산 마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설마겠지.

그리고 설마가 사람을 잡아서 뱅트손 공작 특유의 집요함이 발동된 것이라고 해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슬리 공작령은 제국의 북쪽에 치우쳐 있으니까.

적어도 지슬리 공작령을 소화하는 동안은 남쪽 끝에 있는 백작령 따위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도 좋지 않을까?

내가 그 북쪽까지 가서 뛰어다닐 일은 없을테니, 강력한 선제후들 중 하나인 뱅트손 공작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오히려 반길 일이다.

“그 이유가 우리와 관계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뱅트손 공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걱정하지 마요. 윌리엄. 만약 우리와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면 우리에게 왔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오지 않았잖아요.”

나는 리네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뱅트손의 병력이 우리를 노리고 왔으면 절대로 탈출하지 못했다.

그의 명령에 따랐던 황도의 치안 유지군 뿐 아니라 전통과 관례에 따라 미리 정해진 숫자조차 무시하고 잔뜩 데려온 기사들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덩치가 유달리 컸던 기사들까지 고려하면 나 하나라면 모를까 리네아까지 데리고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봐야 했다.

사실 아무리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다고 해도 명색이 선제후인 지슬리 공작이 죽은 것을 보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은 황도에서 뱅트손이 지휘하던 군대와 우리가 소도시에서 만났던 급조된 군대의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는 정도?

결국 뱅트손 공작이라고 해도 정예로 분류할 만한 병력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예 병력은 이번 황도의 전투 중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의외로 죽은 귀족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 호위기사와 함께 탈출을 했네요. 죽은 귀족은 정말 운이 없었던 몇 명을 제외한다면 선제후들간의 전투에 휘말려 버린 자들인데, 그들은 사실상 선제후의 파벌에 들어갔던 귀족들이에요. 선제후들의 난에 무관한 자들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번 황도에서 벌어진 전투를 ‘선제후들의 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 선제후라는 직위 자체가 없어질 판이지만 그래도 익숙한 단어를 안 쓸 수는 없다.

“결국 선제후들은 자신의 병력을 추슬러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는 중이군요. 선제후 리딕슨은 죽었지만 그의 파벌 귀족들은 건재한 모양이에요. 그러나 선제후 지슬리 쪽은 심각한 피해를 본 모양입니다. 사실상 전멸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귀족은 거의 다 죽은 모양이네요.”

“그 쪽은 친척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서 잘못하면 지슬리 가문이 멸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맙소사. 리네아. 황궁 도서관이 전소됐답니다.”

나는 아직 첩보 수준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황궁 도서관이 완전히 불에 타서 남은 것이 없다는 내용에 마음 어딘가가 덜컥하는 기분이었다.

설마 우리가 마지막 방문객은 아니었겠지?

리네아와 나, 그리고 칼마르의 첩보망을 담당하는 사라 남작부인은 지금까지 들어온 첩보를 정리하고, 가공했다.

칼마르의 이너서클 멤버와 공유할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함께 칼마르를 이끌어가는 이너서클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칼마르의 이너서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수의 유력자와 가신들을 소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공해서 제공한 첩보를 검토하고 평가했다.

칼마르 같은 상업 도시의 유력자들은 뜬소문과 애매한 첩보만으로도 상단의 흥망성쇠가 달린 선택을 매번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지는 선택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종종 시대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마치 DNA에 직관력이라는 유전자가 박혀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황도는 반쯤 파괴되었고, 수비군과 치안 유지군은 와해 되었군요.”

“이러면 황도는 유지하지 못합니다. 원래 계획도시였고, 황제의 권위로 인해 번성하던 도시였습니다. 황제가 없다면 황도도 없습니다.”

“대대로 황도의 관리로 봉사하던 집안들은 새로운 주군을 찾아 떠나야 할 겁니다. 아마 가문의 뿌리를 찾아갈 테니 대부분 선제후들에게 가지 않을까요?”

이너 서클의 멤버들은 몇 명 되지 않지만 하나같이 비범한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황도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황도는 끝났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같이 갔던 기사들을 대부분 잃고 간신히 귀환한 모양이군요. 리딕슨 공작은 전사했다는데 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가주로서의 권위에는 계속 타격을 입고 있으니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막시밀리안 공작이 움직이지 못하면 우리는 좋지요. 글렌 공작만 상대하면 되니까요.”

이 사람들, 벌써부터 전투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로는 글렌 공작으로 상정한 듯했다.

다들 비슷한 의견인지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글렌 공작에 대한 분석이 계속되었다.

“이거 반성해야겠군요. 글렌 공작의 손이 변경백에게까지 뻗어 있었다니! 그래도 그동안 살핀다고 살폈는데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돈이 부족해서 쩔쩔매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변경백에게까지 돈을 뿌리려면 상업 도시 하나 잡아먹은 걸로는 안되지요. 칼마르까지 욕심을 내고 내전을 벌이던 그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멜러는 잔뜩 인상을 썼다.

그는 글렌 공작을 담당했던 작자를 당장에 잘라버리고 다른 사람을 담당으로 해야겠다며 리네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시청 관리 하나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소문에는 글렌 공작도 황도에서 꽤나 병력 손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제후 프리시오에게 당한 모양인데 너무 일방적이라서 데리고 갔던 기사를 모조리 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옌센이 처음 듣는 첩보를 전달해 왔다.

아마 글렌 공작령을 들락거리던 상단 중 누군가가 소문을 듣고 알려온 모양이다.

정보 회의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예상밖의 사람들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령이 영주성에 도착해 있었다.

불에 다 타 버렸다던 황궁 도서관의 사서들이 배 한 척을 몰고 항구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싣고 온 책과 문서는 배를 만재흘수선까지 잠기게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사실상 황궁 도서관이 칼마르 백작령으로 피난을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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