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100화 (100/248)

100. 칼마르로 가는 길

우리는 황도를 떠난 후 반나절 만에 미리 준비한 농장에 도착했다.

황도 근교의 소도시에 준비해 놓은 중간 집결지에는 용병으로 구성된 백인대 하나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이곳을 담당하고 있던 선임 기사는 자신이 파악한 사실을 보고해 왔다.

“어제부터 이동하는 병력을 계속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확인한 숫자만 2천은 넘습니다. 깃발로 보면 뱅트손 공작의 병력으로 보입니다.”

“뱅트손 공작 말고 다른 선제후의 병력은 없었나?”

“아직 목격된 깃발은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머무르는 도시에 우리 말고도 몇 개의 용병대가 머무르고 있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20~30명 정도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용병대이고, 누구에게 고용된 병력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 고용된지도 모르는 병력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아마 귀족들 중 우리같이 준비성이 좋은 자들의 병력이겠지.

우리는 즉시 이곳을 떠나서 칼마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만약 늦는다면 황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대규모 전투라니!

변수가 너무 많아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 중에는 리네아가 있다.

리네아가 포로가 된다든가 부상을 입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만약 전사라도 한다면 끝장이다.

우리 사이에 후계자가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칼마르의 섭정으로 나선다고 해도 쉽게 안정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 와중에 다른 생각을 품는 자가 나오는 것도 불 보듯 뻔하고.

그러니까 절대로 지체해서는 안된다.

최대한 빨리 칼마르에 돌아가야 한다.

“리네아. 원래의 계획대로 3일 정도 강행군을 한 후에는 기사와 기마 용병만을 데리고 이동할 겁니다. 중간중간 미리 준비한 병력이 합류할 테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은 윌리엄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는 칼마르에 도착한 후에 할 일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병력을 휘몰아서 칼마르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사와 일부 용병은 말을 탔지만, 대부분의 용병은 도보로 이동했다.

대신 무기와 식량 등 각자 챙겨야 할 물품까지 모조리 마차와 말에 싣고 개개인은 자신의 무장만 챙긴 채 이동하도록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보다는 빠르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출발한 지 얼마 가지 않아서 별로 반갑지 않은 자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멈춰라! 너희는 어디서 오는 병력인가? 누구에게 봉사하는 자들인가?”

5백 명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들고 있는 깃발은 뱅트손 공작의 깃발.

무장은 충실히 하고 있지만 급하게 행군을 해서 그런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불안으로 눈알을 굴리는 것을 보니 대부분이 신병으로 보인다.

고참병 특유의 껄렁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어제도 2천 명이 지나갔다고 하던데, 뱅트손 공작은 황도의 거사에 판돈을 제법 올려 건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지만 최근에 뱅트손 공작뿐 아니라 선제후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고장나 있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 미래가 어떻게 굴러갈지는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할 듯 하다.

우리 쪽 선임 기사가 즉시 앞으로 튀어 나가서 대응했다.

“어떤 놈들이 건방지게 백작님 앞에서 길을 막는 거냐? 너희는 누구냐!”

잔뜩 화를 내며 고함을 치는 선임 기사의 박력에 부대를 이끌고 있던 뱅트손의 기사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결국 중간에 있던 기사 하나가 더 나오고서야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가 든 깃발을 보면 우리가 섬기는 분이 누군지 알만한 분이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요? 나는 뱅트손 공작님게 봉사하는 아링요라고 하오. 내 앞에 계시는 분은 누구시오?”

“나는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 공과 백작부군 윌리엄 공에게 봉사하는 기사 구티슨이리고 한다. 우리는 칼마르로 향하는 중이다. 가는 길이 급하니 어서 비켜라.”

고압적인 우리 쪽 선임 기사의 태도에 저쪽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칼마르의 백작이라는 말에 황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했다.

“황도에서 오시는 것 같은데 지금 황도 상황은 어떻소?”

“모른다.”

“그러지 마시고 대략적인 상황이라도 알려주시오. 경의 호의는 내가 잊지 않겠소.”

“정말 아는 바가 없다. 어서 길을 비켜라.”

그런데 내가 가만히 보아하니 앞에 나와서 떠드는 놈 말고 다른 기사가 손짓을 하며 주변의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하는 손짓에는 우리를 포위해서 생포해보겠다는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정보를 얻기 위해? 아니면 고위 귀족의 확보를 위해?

우리가 숫자가 적다고 얕보인 모양이다.

지시를 받은 기사들이 흩어져서 자신이 통솔하는 백인대로 돌아가자 미니맵 상에서 뱅트손의 병사들을 의미하는 작은 점들이 일제히 붉은 점으로 변해 버렸다.

방금까지 붉은 점과 흰 점이 섞여 있었는데 말이다.

이거 한 판 하자는 거 맞지?

“저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한다. 말을 탄 자는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방진을 짜고 버틴다. 리네아. 말에서 내려 방진에 남아주시오.”

도보로 이동하던 용병들이 즉시 방진을 짜고 전투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리네아는 두 명의 호위 기사와 함께 방진 안으로 들어갔다.

황도의 남문 앞에서 내 명령에 따라 주저 없이 돌격했던 기사들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기마 용병은 우리의 뒤에 붙어서 명령을 기다렸다.

모두 실력을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전투의 전문가들이다.

우리의 움직임에 전면에 있던 뱅트손의 병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우리의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얼마 안되는 숙련병들은 고함을 치고 손찌검까지 하면서 병사들을 일렬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뱅트손의 병사들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물론 적이 최대한 준비하도록 하고 짓밟아 버리면 나에 대해 멋진 소문이 퍼지기는 하겠지.

그런데 그런 짓은 내가 압도적으로 강할 때나 과시용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30명의 기마병력으로 오백 명의 보병을 향해 돌격할 때는 운이 좋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적의 약점을 찔러야 한다.

지금처럼.

“가자.”

*

짧게 내뱉은 말은 명령이라기에는 너무 평범했다.

그러나 실전을 겪어본 칼마르 기사들에게 윌리엄의 권위는 어쩌면 마스터 요한보다 더 윗길에 있을지도 몰랐다.

권유와도 같은 한마디의 말에 칼마르의 기사와 기마용병은 일제히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뱅트손의 기사를 상대하던 선임 기사 역시 눈치껏 돌격 대형에 합류했다.

그러나 뱅트손의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 대응하려고는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병사들이 너무 적어서 우와좌왕 하다가 때를 놓쳤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이 새끼들아! 창을 들어! 창을 들라고!”

“창 어디 갔어! 창!”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는 참한다!”

“궁병! 화살을 쏘아라! 뭐하나! 화살을 쏘라고!”

50미터 정도?

돌격해오는 보병을 상대하기에도 짧은 거리다.

하물며 기병이 달려온다면 활 한 방 쏘기도 버겁다.

더구나 활이라는 것은 전투가 없을 때면 활줄을 풀어서 별도로 보관하는 무기다.

바로 코앞에서 적이 달려오는데 화살을 쏘라고 하면 일단 활줄부터 걸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한 강심장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병사들 중에?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부무장으로 가지고 있던 칼에 손이 가는 것이 정상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몇 병의 병사들은 창을 바닥에 박고 앞으로 내밀었다.

병사들 사이에 있었던 숙련병들이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장벽이었다.

그러나 몇 개의 창을 내민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창을 피해 방진에 뛰어들면 그만이다.

기병을 상대하는 보병의 방진은 병사 몇 명이 노력한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윌리엄과 칼마르의 기사들이 첫 번째 방진에 뛰어들자 가장 앞에 있는 병사들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맹수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기 멀리 보이던 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와서 부딪치자 병사는 무기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그렇게 날아간 병사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다.

말 위의 기사는 주변의 적들을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 편곤을 든 기사들은 도리깨질하듯 주변의 머리통을 향해 편곤을 내리쳤다.

머리통이 깨지고,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어졌다.

4열로 달려든 칼마르의 기병은 순식간에 방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칼마르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버겁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섰던 뱅트손의 기사들은 백인대 하나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차례는 자신들의 순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앞에서 죽어 나가는 동료 병사들을 본 뱅트손의 병사들은 기사들과 생각이 달랐다.

꼭 싸워야 하나?

왜 멀쩡하게 길 가다가 갑자기 급발진해서 공격을 자초하나?

저 사람들 그냥 보내주면 안 되나?

방금까지도 빨리 가야 한다고 길을 비켜달라고 하던 칼마르의 기사를 생각해보면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짓이겨진 동료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간절했다.

그나마 방진을 유지하고 있던 병사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

제대로 된 병사들은 아니었다.

급조한 티가 역력했다.

첫 번째 방진을 구성하고 있던 백여 명의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다가 무너졌다.

뱅크손의 기사들이 재빠르게 두 번째 방진으로 물러난 것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원체 병사의 질이 안 좋았다.

첫 번째 방진을 무너뜨린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절반 조금 넘는 숫자를 죽이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흩어버렸지만 눈 앞에는 아직도 대열을 이루고 있는 적이 두 무리나 있었다.

첫 충돌의 충격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기 전에 몰아쳐야 했다.

“내가 선두에 선다. 따라라!”

내 명령과 함께 칼마르의 기사들은 일제히 전면의 대열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군마가 달리는 속도를 돌격 속도까지 올리기에는 20미터의 거리가 너무 짧았지만 싸울 의지가 없는 적에게는 돌격까지도 필요없었다.

속보로 달려서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대열을 이루고 있던 병사들이 스스로 무너졌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병사들은 우리가 가까이 갈수록 서로 경쟁하듯 뒤로 물러서다가 내 편곤이 병사 하나의 머리를 가격하는 순간 일제히 무너져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칼마르의 기사들과 기마용병들은 따로 명령할 것도 없이 도주하는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무기를 버리고 머리를 감싼 채 도망치는 병사들은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우리는 어디 한 군데씩은 부러지고 깨어진 채 줄줄이 낙오하는 병사들을 뒤에 남기며 달려갔다.

느슨하게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세 번째 방진이 도주하는 병사들에게 휩쓸려 버리면서 뱅트손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뱅트손의 기사들은 흩어져 도망치는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고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10명도 안 되는 숫자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일단 공포가 지배하자 그나마 얼마 없었던 숙련병조차 분위기에 휩쓸려서 신병과 다를 바 없는 추대를 보여준 것이다.

기사들을 도와 부대를 추슬려야 할 숙련병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뱅트손의 기사들이 병사들의 통솔을 포기하고 나를 향해 덤벼든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옆으로 다가오는 적 기사를 향해 편곤을 휘둘렀다.

적 기사는 다급하게 작은 방패를 들어서 편곤을 막았지만 편곤의 끝에 쇠사슬로 연결된 자편이 회전하면서 적 기사의 뒤통수를 때려 버렸다.

제법 튼튼한 투구를 썼는지 충격으로 낙마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내가 잡아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사이에 반대 방향에서도 적 기사가 창을 겨누고 내게 돌격해왔다.

편곤이 닿기에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대신 편곤을 크게 휘둘러서 적 기사가 탄 말의 머리를 깨버렸다.

말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적 기사 역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위로 넘어진 말이 한바퀴 구르며 덮쳤다.

운이 좋아야 중상이겠다.

내가 적 기사를 두 명 처리하는 동안 칼마르의 기사들 역시 나머지 기사들을 정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다음부터 칼마르로 향하는 우리를 막는 자들은 없었다.

우리는 낙오 없이 무사히 칼마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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