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9화 (99/248)

99. 남문 돌파 3

파손된 도르래를 본 아까의 귀족은 같이 들어온 병사들을 향해 눈짓을 하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대답하는 병사는 없었다.

다들 머뭇머뭇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사실 병사들 수준에서 도르래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

당장 나조차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칼마르의 기사 몇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남문 주변의 적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백작님. 아바르 변경백의 병사들이 남문을 장악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있나?”

내 말에 기사들 중 한 명이 다가와서 도르래를 살펴보았다.

그는 바퀴와 쇠사슬을 당겨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냥 부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쇠사슬을 끊던가 아니면 축을 부순 후 성문을 밀면 됩니다. 다행히 망가진 도르래가 담당하는 성문이 밀어서 여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억지로라도 밀면 될 듯 합니다.”

나는 기사의 말에 바닥에 버려져 있던 대형 도끼를 집어들었다.

적이 쓰던 것이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쇠로 된 축을 향해 몇 번 도끼로 내려치자 축이 이탈하며 도르래에 걸려 있는 쇠사슬이 축 늘어졌다.

“또 부술 곳이 있나?”

“아닙니다. 됐습니다. 이제 성문을 밀면 될 것 같습니다.”

도르래가 설치된 방에서 같이 있었던 귀족은 나와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 눈치였지만 더 늦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부터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곧장 성벽을 내려와서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 앞에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부터 있었던 아바르 변경백의 병사들 이외에도,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몇 무리의 사람들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우리는 피에 젖은 갑옷과 무기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남문 앞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아바르 변경백의 병사들 중 몇 명이 받침대에 올라가서 성문에 가로 걸린 거대한 빗장을 치운답시고 낑낑 대고 있었다.

“비켜라!”

내 호통에 병사들이 황급하게 물러섰다.

한아름은 될 법한 나무를 통째로 다듬어서 올려 놓은 빗장은 사람 몇 명이 달라붙어서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을 들고 나르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빗장이 걸려 있는 둔테에서 내려놓는 것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성벽에 홈을 파서 만들어놓은 둔테에서 빗장을 들어올리기 위해 빗장의 아래쪽에 손을 댔다.

숨을 가다듬은 후 배에 힘을 주고 빗장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근육이 꿈틀거리고 관절에 뻐근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빗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둔테에서 빗장을 빼내는 것은 금방이었다.

둔테에서 빠진 빗장을 바닥에 던져 버리자, 이제 남은 것은 총안구가 나 있는 성문 뿐이었다.

자물쇠가 풀린 것이니까 이것은 그냥 밀면 된다.

“뭣들 하나! 백작님이 빗장을 재끼셨는데! 다들 성문에 붙어서 밀어!”

아까 도르래가 있던 방까지 따라왔던 귀족이 고함을 질렀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한 무리의 병사들이 일제히 성문에 달라붙어서 밀기 시작했다.

도개교는 앞으로 떨어뜨리는 식이고, 격자 방식의 성문은 위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총안구가 나 있는 성문은 밖으로 밀어서 여는 방식이다.

마지막 남은 성문을 열기 위해 수십 명의 병사들이 달라붙어서 밀기 시작하자 도르래가 없음에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리는 성문 사이로 밖을 보니 아직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도착해서 대기하는 군대도 없고 그렇다고 매복한 군대도 없는 것 같았다.

도개교 건너편에는 황도로 들어오기 위해 성문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대부분은 상인이었고 일부는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도 내부에서 올라가는 연기와 성문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심지어 성벽에서 떨어지는 황도 수비병의 모습까지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장난 아니었다.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꼴이 조금만 위협을 해도 당장에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직 성문이 열리기 이른 시간에 성문이 열리는 상황 역시 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까지 신경쓸 정도로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군대가 없는 것이 명백한 이상 더이상 황도 안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병사들이 성문을 완전히 열어 젖히자 남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성문 밖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열어 젖힌 병사들이 정렬하는 동안 그들을 통솔했던 귀족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아까 도르래가 있던 방까지 왔던 귀족이기도 했다.

“윌리엄 공. 인사드립니다. 아바르 변경백의 장남인 바르드레 남작입니다. 윌리엄 공 덕분에 무사히 황도를 떠날 수 있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오히려 훈련이 잘 된 경의 병사들 덕분에 큰 어려움없이 남문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성벽 너머로 밧줄을 내려서 나가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변경백은 글자 그대로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군사령관이다.

백작위는 명목상의 작위일 뿐 진실된 그들의 힘은 거느리고 있는 군대와 자급자족을 위해 할당된 영지에서 나온다.

평소에는 중앙 정계에서 볼 수 없고 이렇게 대회의때나 얼굴을 비추는 귀족들이라서 갖고 있는 힘에 비해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부친의 병사들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윌리엄 공께서도 듣던대로 용맹하신 분이셨습니다. 오히려 소문이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공. 공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과한 칭찬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질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의껏 대답해 보겠습니다.”

바르드레 남작은 앞장서서 병사들과 함께 뛰어다니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정한 용모를 한 귀족이었다.

“사실 저는 선제후들이 제국을 갈라 먹기로 합의라도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미명이 지나자마자 선제후 지슬리 공작이 선제후 뱅트손 공작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선제후들간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즉시 황도를 탈출하기 위해 남문으로 온 것입니다. 윌리엄 공께서도 몸을 피하시는 것을 보니 저와 생각이 비슷하신 것 같은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으로의 일?

글쎄.

생각보다 일이 커졌고,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더구나 신비까지 있는 세상이니 어떤 변수가 출몰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변수가 아주 크다면 선제후도 단숨에 씹어버릴 정도니 계획이 의미가 있기나 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리네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칼마르의 기사들을 보았다.

“바르드레 경. 전쟁은 피하지 못할 겁니다. 평화의 시대 역시 멀리 있을 겁니다.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겁니다.”

*

황궁 도서관은 불타고 있었다.

다섯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황궁 도서관의 가장 외곽, 매년 새로 나오는 책을 모아두는 건물이 불에 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엘더러의 얼굴은 바로 옆에서 솟아오른 불의 기운에 닿은 것처럼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아무리 다른 건물에 있는 자료에 비해 가치가 떨어져서 사서들끼리 농담으로 비싼 쓰레기라고 불리는 책이라고 해도, 세월이 쌓이면 또 나름의 가치를 가지게 될 자료들이다.

다른 건물에 있는 자료들은 더더욱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들이다.

사본을 미리 옮겨 놓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국이 입을 손해는 막대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서들은 몸을 피한지 오래 되었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서들도 두 명의 칼마르 백작이 방문한 후 모두 피신시켰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황궁 도서관장인 자신과 황궁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람 몇 명, 그리고 비밀 호위들 뿐이었다.

죽어가는 황도와 함께 죽어줄 만한 의리는 없지만 황궁 도서관의 마지막은 봐두어야 겠다는 마음과 과연 누가 황궁 도서관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겠다고 찾아올까 하는 궁금증이 그를 남게 했다.

그리고 엘더러는 에할름의 친우로, 그리고 자신의 친우이기도 했던 대표 행정관이 찾아온 것을 보고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대표 행정관은 선제후 뱅트손의 일족.

에할름과 함께 미래를 대비하겠다고 나섰던 베일에 싸인 존재는 뱅트손이었던 것이다.

“뱅트손이었군. 우리의 뒤통수를 친 자가.”

“이 봐. 엘더러. 아무 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양심이 없는 일이지. 자네도 대충은 알고 있었잖은가. 아무려면 내가 다른 가문의 손을 들어줬을까. 황궁 도서관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던 것처럼 굴지는 말게.”

“우리의 목적은 제국의 안정이었을 뿐. 또다른 폭군의 탄생을 바란 것은 아니었네.”

엘더러의 말에 대표 행정관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단언했다.

“그분이 안 계신 이상 선제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어. 그분이 안 계신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제도가 유지 되겠나? 이제 제국은 어쩔 수 없이 3백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해. 억눌러 놓았던 혼란이 다시 분출되겠지만 혼란은 짧을 걸세. 주군께서 준비를 해 놓으셨으니까.”

그러나 엘더러는 대표 행정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준비? 그런 것을 뱅트손만 했다고 생각하나? 다른 선제후들, 변경백들, 고위 귀족들은 눈뜬 장님이라고 생각하나? 30년에 걸친 우리의 우정을 걸고 예언 하나 하지. 제국의 황위는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돌아갈 걸세. 그러나 뱅트손은 절대로 아니야.”

“자네가 예언까지 할 수 있는 줄은 몰랐군. 미리 알았으면 내 운명도 예언해 달라고 했을텐데. 아니지. 엉터리 예언자의 말에 신경을 쓸 것은 없지. 자기 스승의 운명조차 알지 못한 자인데. 그래도 에할름 덕분에 황궁 도서관의 자료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제자에게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하지. 그리고 하나 더. 잘 가게. 자네가 가는 곳에 에할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보게 되면 내가 안부 전한다고 해주고.”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표 행정관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보았다.

그제서야 기사는 칼을 뽑아서 대표 행정관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것이 그가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반쯤 쪼개진 머리에서는 의외로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투명한 액체와 피 약간, 그리고 하얀 두부덩어리 같은 뇌의 일부가 바닥에 흘러 나왔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보던 엘더러는 냉정한 얼굴로 밖을 살펴 보았다.

화재는 점점 번져서 황궁 도서관의 두 번째 건물에 옮겨 붙은 상태였다.

각 영지에서 올라오는 세금과 물품에 대한 자료가 쌓여 있는 건물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오늘 오후가 되기 전까지 다섯 개의 건물 모두가 불에 휩싸일 판이다.

“가자. 황도는 이제 끝이야.”

황궁 도서관을 나서는 엘더러의 뒤에 아직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붙었다.

그러나 대표 행정관과 함께 왔던 병사들은 황궁 도서관에 남았다.

쓰러진 그들을 불길이 휩쓸었다.

나무 타는 냄새, 사람 타는 냄새가 뒤섞인 채 불타는 황궁 도서관의 모습은 지금 황도에서 그리 낯선 장면이 아니었다.

엘더러의 일행은 황도를 벗어난 후에도 한참동안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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