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남문 돌파 2
구호와 같은 고함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은 칼마르의 기사들이었다.
리네아 옆에 언제나 남아 있어야 할 2명의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가 일제히 돌격해 들어갔다.
대치하고 있던 20여 명의 황도 수비군은 순식간에 짓밟혀 버렸다.
가장 앞에서 대거리를 하던 기사 역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휩쓸렸다.
제법 간 크게 입을 놀리던 것치고 실력은 별것 없었다.
그는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군마에 밟혀서 죽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성벽 위에 있던 황도 수비군과 지금까지 대치하고 있던 귀족군 모두 버퍼링에라도 걸린 것처럼 굳었다.
그러나 내가 성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하자 시간이 멈췄다가 원래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두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여는 도르래는 어디에 있는 건가?”
“저쪽입니다. 계단을 올라가서 성문 위에 도르래가 설치된 방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와!”
귀족군 가운데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황도 수비군과 대치하고 있던 귀족들은 미리 탈출을 준비하고 왔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성벽의 구조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단지 판단력과 임기응변이 뛰어나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성문으로 달려온 것뿐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황도 수비군이 성문을 여는 도르래를 파손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판사판식으로 도르래를 부수어 버리면 성문을 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진다.
탈출로를 점검할 때 보니 남문은 3중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 바깥쪽에 철판으로 덧대어 놓은 도개교가 있다.
그 안쪽에 총안을 여러 개 만들어 놓은 두꺼운 나무문이 있다.
마지막으로 통나무를 격자 모양으로 만들고 철봉으로 보강한 문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연다고?
그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격자 모양 문은 들어올려야 하는데 도르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황도 수비군이 여럿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창으로 견제하며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비도를 내던지면 뛰었다.
군대에서 떠들다가 얻어 들은 말중에 참호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누가 이길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답은 총알이 남아 있는 사람.
지금 내게 비도는 총알이었다.
비대칭 무기를 들고 날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무리 위에서 창으로 나를 견제한다고 해도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부위를 향해 비도를 던지는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앞에서 계단을 막고 있던 자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자, 성벽 위에 있던 수비군들은 뒤로 물러서다가 무기까지 버리고 그냥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 꼭 적만은 아니다.
도망치던 황도 수비군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적전 도주는 즉결 처형이다!”
“도망치는 놈은 죽여!”
살벌한 명령과 함께 도망치던 병사 몇이 저항도 못하고 목이 잘렸다.
앞뒤로 다가오는 죽음을 본 병사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그리고 지금 다가오는 자들도 우리 사이에 있는 비겁자들에게 나누어줄 관심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있던 적을 하나 발로 차서 아래로 굴려 버리고 내 눈앞에 늘어선 적을 노려보았다.
일곱 명.
그중에 3명은 기사였다.
그렇다면 수문장까지 해서 기사라고 할 만한 자들은 다 나타난 것일까?
아까 수문장을 비도로 죽인 것은 매우 운이 좋은 경우였다.
방심하고 있던 자를, 상상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한방 먹인 것이다.
만약 내가 활로 수문장을 쏘았다면 막지는 못해도 피했을 거다.
활을 당기는 나를 봤을 테니까.
이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병사들과 달리 비도를 던져서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다.
내가 비도를 던지면서 병사들을 학살하다시피 하는 것을 봤으니까.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때려잡아야 한다.
나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전투 망치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달렸다.
성벽 위는 그리 넓지 않다.
네 명쯤 나란히 서면 끝이다.
그 정도면 말 한마리가 지나갈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무기를 휘두르는 기사 한 명도 감당하기 어려운 좁은 공간이기도 하다.
세 명의 기사가 동시에 내게 달려들 수 없다는 말이다.
나를 잡고 싶다면 일대일로 나를 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몸을 낮추고 멈춘 순간 크게 휘두른 칼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첫 번째 기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칼을 양손으로 잡고 내 얼굴을 노렸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몸을 잡은 채 어깨 위로 들어올린 긴 칼로 내 얼굴을 찍어버리려고 한 것이다.
나는 찍어오는 칼을 왼손으로 쳐내며 오른손에 든 전투망치로 첫 번째 기사의 어깨를 가격했다.
*
첫 번째 기사는 자신의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윌리엄을 향해 창으로 찌르듯 내질렀지만 엉뚱하게 빗나가는 칼끝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않는다며 가끔 허세를 부릴 정도로 자신 있었는데 칼을 쳐내는 윌리엄의 힘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힘에 휘말려서 몸이 휘청인 순간, 벼락처럼 전투망치가 떨어졌다.
벼락처럼?
그렇다.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어깨를 가격한 윌리엄의 전투 망치는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전투 망치가 아니었다.
거대한 공성추에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첫 번째 기사는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전투 망치를 보며 허망한 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단 한 방.
어깨에 맞은 단 한 번의 충격이 그의 몸을 고장내 버린 것이다.
첫 번째 기사의 투구와 머리가 동시에 박살나는 순간 두 번째 기사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윌리엄의 마지막 일격을 막으려는 몸짓이었지만 그가 뛰는 속도보다 전투 망치를 내리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심지어 전투 망치를 내려친 후 자신에게 달려든 두 번째 기사를 향해 발길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윌리엄에게 달려들던 두 번째 기사는 미처 윌리엄의 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자신의 무릎을 찍어버리는 윌리엄의 발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무릎은 뒤로 접을 수 있을 뿐 앞으로 접을 수 없다.
갑옷 역시 그에 맞추어 만들어진다.
그러나 두 번째 기사는 자신의 상식이 깨어지는 것을 고통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무릎을 찍어버리는 윌리엄의 발은 두 번째 기사의 무릎을 앞으로 접어버렸다.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어지는 느낌은 생경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다.
두 번째 기사는 칼에 손이 베인 어린애처럼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윌리엄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두 번째 기사의 얼굴을 발끝으로 걷어찼다.
기사의 신발이라는 것은 무기의 일종이다.
신발에 아예 짧은 칼날을 달아놓은 사람도 있지만 윌리엄의 신발은 끝에 철덩어리가 들어있는 표준적인 전투용 신발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신발 끝의 철덩어리는 사람의 얼굴뼈 정도는 가볍게 부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한 호흡, 두 호흡, 세 호흡.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명의 기사가 죽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머지 황도 수비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었다.
방금 자신들이 처리한 도망병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도망치면 뒤통수가 박살이 날 것 같고, 그렇다고 앞으로 가면 얼굴이 박살 날 것 같았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 중 하나는 심지어 자신의 무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떨어진 무기에 모두의 신경이 잠깐 쏠린 그때,
윌리엄은 비도를 던졌다.
그리고 남은 자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아무리 실전 경험 없는 기사라고 해도, 쌓은 훈련량은 일반인의 상상을 불허한다.
바로 코앞에 적을 두고 있는데,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 번째 기사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비도를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비록 모양새는 영 아니었지만 오른쪽 팔뚝을 대가로 목숨을 살렸으면 그렇게 나쁜 교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통의 병사들까지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세 번째 기사가 완갑과 오른쪽 팔뚝까지 한꺼번에 방패삼아 살아남을 때 그와 함께 온 병사들은 눈 앞에 닥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윌리엄은 단숨에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칼을 내지를 때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를 잡아다가 앞에 세웠다.
앞에 있는 사람이 동료 병사임을 분명히 보면서도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죽어가는 병사 뒤에 있는 윌리엄을 찌르기 위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들을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달려드는 대로 병사의 갑옷을 잡고 아래로 던져 버렸다.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이미 죽어버린 병사까지 던져 버리자 남은 것은 세 번째 기사뿐이었다.
세 번째 기사는 부하들이 아래로 던져지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도망가야 했다.
*
나는 도망가는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가끔 사람은 공포에 질리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기도 한다.
아마, 지금 저 기사의 도주는 바로 그 이해할 수 없는 짓의 범주에 드는 일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비도를 던져서 그의 뒤통수에 박아 주었다.
그리고 곧장 도르래가 설치된 방으로 뛰어갔다.
아주 잠깐의 지체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니까.
그러나 내 생각은 반쯤만 들어맞았다.
아마 내 손에 죽은 수문장은 꽤나 유능했던 모양이다.
그가 죽었음에도 그의 부하들 중 일부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도망쳐 버린 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리 정예병만 모아 놓은 부대라도 일어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자들이 몇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다.
성문을 여는 도르래가 설치된 방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대형 버스를 절반으로 잘라서 나란히 놓으면 여기에 다 들어가겠다 싶은 정도?
그 안에 성문을 열기 위해 설치한 도르래가 3개나 있었다.
3개의 문을 위한 것이었다.
사람이 편하게 도르래를 돌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손잡이 달린 바퀴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고, 도르래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쇠사슬과 회전축 역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몇 병의 병사들이 대형 도끼를 들고 맹렬하게 도끼질 중이었다.
이미 손잡이 달린 바퀴 하나는 박살이 난 후였고, 다른 하나도 곧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다행히 쇠사슬과 회전축은 쇠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손을 못 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전투 망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그들 역시 내가 누군 줄 아는 것이다.
“씨발. 밖에 있는 새끼들은 벌써 다 뒈진 건가?”
“무기를 버리고 떠난다면 보내주겠다.”
“쳐!”
내 호의는 거절당했다.
그리고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
홀로 남은 나는 손잡이 달린 바퀴 중 가장 멀쩡한 것을 돌렸다.
마주 보고 2명이 돌리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혼자서 돌려도 돌릴 만했다.
방 아래에 나 있는 창을 통해 보니 격자모양으로 생긴 문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다 올리고 난 후 반쯤 부서진 바퀴를 잡고 억지로 돌렸다.
이것까지는 돌릴 만했다.
반쯤 돌리자 도개교를 연결하고 있던 쇠사슬이 저절로 풀리면서 도개교가 해자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다 박살을 내놓아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아까의 귀족이었다.
나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손잡이 달린 바퀴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