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7화 (97/248)

97. 남문 돌파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서 건물의 뒤편으로 내려갔다.

지금 당장 리네아에게 돌아가야 했다.

뱅트손 공작의 기사들이 몰려나오고, 황도의 치안유지군까지 함께 움직이는 꼴을 보니 대회의는 물 건너 갔다.

뱅트손이 황도 전체, 적어도 일부는 장악했고, 선제후들 중에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을 쳐내려는 상황임이 틀림없다.

대회의는 무슨 대회의!

선제후들에게 대회의는 그냥 덫이었다.

다들 그 존재가 방문할지 여부를 두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뱅트손처럼 다른 선제후들 역시 결단을 내렸겠지.

그러나 선제후들과 달리 아무런 정보가 없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대회의를 참가하러 왔다가 날벼락을 맞게 생겼다.

오히려 선제후들 간의 알력이 너무 심하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귀족들은 이번 대회의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전통과 관례에 따라 얼마 안 되는 호위와 함께 황도에 온 것이겠지.

그중에서 좀 더 조심스럽고 현실적인 자들은 칼마르처럼 별도의 병력을 대기시켜놓았을 것이고.

그래도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작정하고 준비했을 것이 뻔한 선제후들에 비하면 별것 아닌 준비일 것이다.

어쩌면 고위 귀족들이 단체로 실종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아니다. 그것은 역시 무리겠다.

지금 황도에 들어와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각 지역의 통치자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다.

변경백의 대리자로 와 있는 사람들이 예외인데, 이 경우에도 대개는 후계자나 가까운 친척을 보내는 것이 관례라서 중요도를 생각하면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혼란이 좀 있겠지만 전통과 관례에 따른다며 점잖을 떨던 이들 역시 노골적인 위협 앞에서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제각기 살길을 찾아 이합집산할 것이다.

그들이 호위로 데리고 온 기사들을 합쳐놓으면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8명의 선제후가 서로 견제하는 상황에서 포섭한다면 모를까 모두를 힘으로 누르기에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역시 고위 귀족들의 단체 실종은 일어나기 힘들겠다.

그러나 이곳에 남아 있다가 불확실한 혼란에 휩쓸리는 것보다야 빠르게 황도를 뜨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임은 분명하다.

즉시 떠나자.

너무 늦기 전에.

리네아에게 돌아가는 동안 황도의 치안 유지군이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을 보았다.

어둠은 가셨다지만 아직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인데도 황도의 중요 거리마다 치안 유지군이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팔뚝에 색이 있는 천을 감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치안 유지군끼리도 서로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한 사람의 선제후가 황도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고 봐야 한다.

내가 칼마르의 숙소에 돌아갔을 때 리네아는 이미 탈출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네아. 뱅트손 공작이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누구를 공격하러 가는 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동원만 기사만 해도 2백명이 넘어요.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치안 유지군도 있었으니, 적어도 황도의 일부는 뱅트손이 장악한 것이 틀림없어요.”

그리고 나는 내가 오다가 팔에 천을 감아서 표시한 치안 유지군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리네아는 내 판단이 맞는 것 같다고 동의해 주었다.

“전대 황제가 뱅트손의 일가였으니 황도 전체가 뱅트손의 손아귀에 들어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황도의 치안 유지군이 나누어진 것을 보면, 그래도 다른 선제후들이 아주 부족한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움직이도록 하지요.”

나와 리네아는 10명의 호위 기사와 함께 황도를 벗어나기 위해 숙소를 떠났다.

그러나 황도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벌써부터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본격적으로 선제후들간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면 무난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랐다.

상주 인구 10만.

추정 유동 인구 20만.

황도는 오직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도시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최소한 관리와 병사들은 황제로부터 녹봉을 받아서 살아가는 곳인데 지난 10년간은 어떻게 그들의 생계가 유지되었을까?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치안 유지군 간의 전투였다.

서로 다른 색의 천을 팔에 두른 치안 유지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방금 전 내가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던 한 무리의 치안 유지군 뿐이었는데, 지금은 아까의 그 치안 유지군 뿐 아니라 새로운 무리가 등장해서 서로 죽여대고 있는 것이다.

분명 서로 다른 선제후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다.

“젠장. 이게 무슨!”

내게 날아온 화살을 쳐내며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지금 실시간으로 제국이 해체당하는 모습을 보는 중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엉망이 되어가는 꼴을 보니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뒤늦게 성 마르스홀롬 제국의 사람이 된 것일까?

아니면 명분도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안타까운 걸까?

그러나 상념은 잠깐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탈출이고, 방해되는 모든 것은 쓸어버려야 했다.

“밟아버려!”

내 명령에 칼마르의 기사들은 일제히 돌격 대형으로 치안 유지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훈련받은 군마는 맹수와 다를 바가 없다.

마갑을 입은 맹수가 나란히 4마리씩 일렬로 서서 눈 앞의 모든 것을 짓밟으며 달려드는 모습을 견뎌내려면 보통 강심장으로는 안 된다.

아무리 황도의 치안 유지군이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무장을 잘 갖춘 경비병에 불과하다.

실전 경험도 빈약하다.

백년 전을 마지막으로 황도에서 전투가 벌어진 일이 없다.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격렬하게 싸우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당히 눈치보며 투닥거리는 정도였다.

칼마르의 기사들은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리적 거리는 것은 모조리 파괴했다.

무기를 들이대는 자는 죽여버리고, 길을 막는 자는 밟아 죽였다.

팔에 맨 천의 색깔?

누가 누구 편인지도 모르겠고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다시 볼 일도 없는 자들이다.

불과 10명에 불과한 기사들이었지만, 2개 백인대에 달하는 치안 유지대는 순식간에 박살이 나서 흩어졌다.

나는 리네아와 함께 그들 사이를 뚫고 달렸다.

벌써 멀리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느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더 늦기 전에 황도를 떠나라는 신호 같았다.

“남문으로 간다! 황도를 나가야 한다!”

길을 뚫어버리자 금방 황도의 남문으로 향하는 대로에 접어들 수 있었다.

여기는 의외로 길을 막는 자들이 없었다.

이미 한바탕 한 모양인지 죽은 자들과 버려진 무기들이 흩어져 있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남아있는 자들은 없었다.

죽어 있는 자들은 대부분 황도 치안 유지군이었다.

길을 막고 있던 치안 유지군을 쓸어버리고 대로를 따라 남문으로 간 군대가 있는 것이다.

남겨 두고 떠난 시체를 보니 팔에 천을 감고 있지 않았다.

치안 유지군이 아니라는 의미다.

남문을 장악하러 간 것일까?

아니면 남문을 통해 탈출하러 간 것일까?

의문은 금방 풀 수 있었다.

남문을 지키는 황도의 수비군이 일단의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뒤에 있는 황도의 남문은 아직 닫혀 있었다.

황도를 둘러싼 4개의 성문, 16개의 작은 출입문을 관리하는 병력은 별도의 황도 수비군으로 독립되어 있다.

황도 수비군은 치안 유지군보다는 좀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선지 치안 유지군에 비해 싸우려는 의지가 좀 더 강한 것 같았다.

지금 남문 앞에서 일단의 병력과 대치하고 있는 수비군의 기사 역시 귀족을 상대로 꽤나 기세를 올리는 중이었다.

“아직 남문을 열기에는 이른 시간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시면 적당한 시간이 될 듯 하니 그렇게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기껏해야 병사 20명을 지휘하는 하급 기사가 뭔 말이 이렇게 많나? 시간이 없다. 남문을 어서 열어라.”

“안 되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정시가 아닌 때에 남문을 연다면 제 목이 달아납니다. 남작께서 내 목을 붙여 주실 겁니까?”

“이런! 네가 안 된다면 수문장을 불러!”

“수문장께서는 아직 출근을 안 하셔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미 한 번 피를 보고 온 사람들이라서 전투를 마다할 상황도 아니었다.

임계점 바로 직전.

그것을 양쪽다 알고 있는지 대거리를 하고 있는 기사 뒤편의 수비병도, 남작 뒤에 있는 병사들도 잔뜩 긴장을 한 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끼어들었다.

12마리의 완전무장한 군마와 기사집단은 꽤나 강력한 전력이다.

그런 자들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니 양쪽 다 일단 언쟁을 멈추고 우리를 경계했다.

“너희는 어느 선제후를 따르는 자들인가?”

남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을 향한 내 질문은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했다.

“무, 무슨 소리요?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황도를 지키고 있을 뿐이오!”

“어느 황제? 뱅트손? 스케티? 아르보그? 프리시오?”

기사는 내 비아냥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리고 있었다.

지위 낮은 기사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 성벽 위에 숨어 있을 수문장이라면 모를까.

나는 멀리서 연기가 올라오는 황도의 내부를 가리켰다.

“저기서 선제후들끼리 서로 죽이고 있지. 그런데 과연 네가 모시는 선제후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만약 여기서 성문을 막고 귀족들의 불평을 사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가 모시는 선제후는 너를 보호할까 아니면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네 목을 자를까?”

연달아 내뱉는 내 질문은 황도 수비군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성벽 위에 숨어있을 수문장도 잘 들으라고 크게 말했으니 수문장의 생각도 복잡해 질 거다.

“이봐. 용감한 기사. 나는 아직 네 이름을 묻지 않았다. 수문장의 이름도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단지 제안을 하나 하지. 귀족들의 발목을 잡으면서 네 머리통을 날려버릴 가능성을 키우는 것보다는 저기 연기가 솟는 곳,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저 곳으로 가서 네가 지지하는 선제후를 돕는 것이 출세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 제안은 눈 앞의 기사가 아니라 저 성벽 위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수문장을 향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황도에 4개 밖에 없는 정식 관문 중의 하나인데 여기 있는 병력이 다 일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중요한 날에 말단 기사 하나에게 성문을 지키라고 남겨놓았을리도 없고.

역시나 내 미니맵에는 백 개가 조금 넘는 붉은 색의 점이 성벽에 모여 있었다.

문제는 이들 중 수문장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서 수문장을 설득하든지 제거하든지 해서 남문을 열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진짜 위협은 열심히 황도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외부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전서구가 될 수도 있고, 특별한 신비에 접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황도의 소식을 받아든 선제후의 군대가 최고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황도를 나가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남문을 나갈 수 있겠다.

수문장이 등장했다!

“우리는 남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군은 명령의 엄중함을 되새기라!”

내 꼬드임에 동요하는 수비군을 추스를 생각인지 수문장이 몸을 드러내고 수비군들에게 일갈했다.

수문장은 성벽 위 높은 곳에 서서 한마디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겠지만 일단 내 눈에 잡힌 이상 끝이었다.

나는 수문장을 향해 비도를 던졌다.

수십미터 정도의 높이는 비도에게 별것 아닌 거리였다.

내가 던진 비도는 수문장의 이빨을 부수고 입 안에 박혔다.

어쩌면 목을 뚫고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수문장은 죽었다! 남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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