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6화 (96/248)

96. 뱅트손의 선택

그러나 괴물은 오지 않았다.

선제후들의 악몽이자 억제기.

선제후 살인자.

선제후의 뼈를 부러뜨리는 자.

그리고 제국 성립의 배후.

머리 위에 매달린 칼 같은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지나 별이 사라지고 새벽 미명이 밝아오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성문이라도 깨부술 수 있는 무력과 끓는 쇳물을 준비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 거실에서 뱅트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괴물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가지고 갈지도 모르는 의심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었는데도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까?

뱅트손은 결정했다.

이제는 그 괴물이 진짜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더 이상 몸을 숙이고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끝났다.

“우놀프! 브리타!”

거실 구석에 서 있던 두 명의 기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에 옆으로 딱 벌어진 어깨, 갑옷 사이로 꿈틀거리는 근육은 보기만 해도 강함 그 자체를 떠 올릴 수 있었다.

“괴물은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돼. 이제부터 우리 상대는 스케티다.”

“죽일까요? 주인님.”

“그래. 죽여. 그 집안은 그 노인네만 죽이면 돼.”

“예. 주인님.”

스케티 공작의 외아들은 얼마 전에 죽었고, 남은 자손은 2살짜리 어린 아이 뿐이다.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모두 욕심만 가득 찬 눈뜬 장님들뿐.

스케티 공작만 사라진다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끝장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집안이다.

“함정도 다 해체해 버려. 이제 이 빌어먹을 도시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다.”

선제후 뱅트손의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쾅! 쾅! 쾅!

돌로 된 거실 바닥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그 아래에서 펄펄 끓고 있는 쇳물이 담긴 커다란 용광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의 용광로는 10년 전부터 저택을 개조하여 곳곳에 함정을 설치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다.

뱅트손은 이 용광로를 완성했을 때 그 괴물을 반드시 죽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대로 묻어 버려야 하다니.

괴물과 같이 묻어버렸으면 했는데.

아쉬움과 억울함에 가슴 한 켠이 아릴 정도였다.

지하는 어둡지 않았다.

쇳물에서 나오는 빛은 지하 곳곳에 횃불이라도 걸어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닥뿐 아니라 지하의 벽까지 빼곡하게 깔려있는 대형 발리스타와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덩치 큰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데 충분한 빛이었다.

기사들은 통짜쇠로 된 창을 꺼내고, 발리스타의 중요 부품을 따로 챙기면서 밖으로 나왔다.

“너!”

“예. 주인님.”

뱅트손이 밖으로 나오던 기사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기사는 즉시 뱅트손 앞으로 달려와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느릿하고 불분명한 발음이었다.

그러나 기사의 움직임은 반대였다.

그는 마치 잘 훈련된 군마 같았다.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즉시즉시 반응하는 특상품의 군마처럼 뱅트손에게 복종했다.

“고개를 들고 투구를 벗어라.”

투구를 벗은 기사의 모습은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있었다.

빛이 나오는 것 같은 붉은 눈.

찢어서 이어붙인 것 같은 흉터가 있는 얼굴.

감정이 거세된 것 같은 표정.

흉터는 목을 지나 갑옷으로 숨겨진 부분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몸 전체가 흉터 투성이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입을 벌려.”

뱅트손은 입을 벌린 기사의 이빨을 살펴보았다.

기사의 이빨은 마치 상어이빨과도 같았다.

살덩어리같은 것은 그냥 깨물기만 해도 한 덩어리씩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뱅트손은 손가락으로 그의 이빨을 살짝 흝었다.

손가락에 통증과 함께 살짝 피가 맺혔다.

피가 기사의 입에 떨어진 순간 기사의 붉은 눈이 더욱 붉어졌다.

뱅트손은 기사의 눈에서 원초적인 폭력의 고삐가 천천히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찢어버리고 싶어하는 욕구가 엿보였다.

그래도 이성을 잃고 날뛸 정도는 아니었다.

“확실히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야.”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공작 각하. 그래도 다른 공작들에게 조력을 제공하는 자들과 비교한다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피부나 질기게 만들고 뼈를 강화하는 수준이라니! 신비의 구도자이자 생명의 근원을 쫓는 탐구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요.”

뱅트손은 눈앞의 기사에게 물러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다가와서 주절거리던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주장이 맞는 것 같아. 그 괴물은 오지 않았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자는 특별한 신비를 접했던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강한 자였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8명의 선제후와 그들의 군대를 모조리 억누르며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3백년 전의 사건에는 뭔가 속임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지.”

뱅트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호위 기사들을 보고 자신의 투구를 챙겼다.

검을 놓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한 때는 뱅트손 공작령의 제 1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췄던 그였다.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자신 같은 사람이 뒤로 빠져서 돌아가는 상황이나 살핀다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행정관. 황도의 창고는 제대로 확보하고 있겠지?”

“예. 치안감이 황도의 치안 병력을 장악했고 운반을 준비 중입니다. 외부에 배치한 병사들이 오면 창고 안의 물건들은 즉시 공작령으로 나를 수 있습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 온 대표 행정관은 뱅트손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가 전대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고, 뱅트손 가문의 가신 출신이라고 해도 황도에서 보낸 세월이 벌써 20년이 넘는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아무리 명목상의 상하관계라고 해도 장악하지 못하는 자가 병신이다.

눈에 거슬리던 치안부감 따위는 이미 몇 시간 전에 치워버렸다.

“창고의 귀중품도 중요하지만, 황궁 도서관의 자료들은 절대 잊지 말게.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태워버려. 다른 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서들은 어떻게 할까요?”

“뭐라고 하던가?”

“또 속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군요.”

“속이 좁은 놈들. 에할름의 흔적은 아직 못 찾았나?”

“전대 황궁 도서관장은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따로 드러난 행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지. 다 죽여. 마침 황궁 도서관도 태우기로 했으니 그 속에 집어 던지면 뒤처리도 완벽하겠군.”

“주군의 뜻대로.”

“나는 지슬리에게 가겠다. 병사들을 준비시켜.”

“예. 선제후 각하.”

뱅트손은 답변 한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치안감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머리를 숙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용서하십시오. 각하. 말씀 하시면 제 잘못을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군. 앞으로 선제후라는 칭호는 쓰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선제후는 이제 사라질 칭호니까.

오늘만 지나면 선제후보다는 공작, 아니면 외국처럼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너도나도 황제를 자칭할지도 모른다.

황제?

어감이 나쁘지 않았다.

뱅트손은 준비된 병사들을 거느리고 지슬리에게 출발했다.

*

황도는 원래 계획 도시로 구상되었고, 앞으로의 대략적인 건설 방향까지 잡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야심 있는 황제일수록 황도의 건설에 힘을 써서 웬만한 도시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쭉쭉 뻗은 도로와 멋진 건물이 연달아 잇대어 있다.

나는 그런 건물들 사이를 지나 선제후들이 묵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8명의 선제후는 황도에 자신의 저택을 가지고 있다.

하나같이 작은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한 저택이다.

심지어 선제후 뱅트손과 선제후 스케티의 저택은 황궁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다.

황제 선출 투표 시기 이외에는 선제후들이 황도의 저택에 머무를 일이 없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고위 귀족들 간의 자존심 싸움 때문이라도 언제 어떤 식으로든지 갈등이 터져 나올수 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잠시 후 나는 목표에 도착했다.

바로 그 대단하다는 선제후 뱅트손의 저택이었다.

8명이나 있는 선제후들 중 하필 뱅트손을 목표로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뱅트손은 5살짜리 황제 후보를 내세우며 대놓고 황제 선출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티는 아들이 없으니 손자라도 내세웠다며 면피할 수 있고, 적당한 후보가 나온다면 2살짜리 아이는 저절로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뱅트손은 여러 명의 아들이 있음에도 손자를 내세웠다.

그것도 5살 짜리를.

이것은 대놓고 트롤짓이다.

만약 황궁 도서관의 사서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 존재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리고 아직도 황제 선출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있다면 안 나타날 수가 없다.

뱅트손만 제압하면 이번 대의 황제 선출은 가능해 보이니까.

그래서 나는 뱅트손의 저택이 잘 보이는 건물 지붕에 올라가서 장식 사이의 그늘에 몸을 숨겼다.

밤의 어두움이 내 존재를 완전히 숨겨 주었다.

뱅트손의 저택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아예 선택지로 잡지도 않았다.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가나?

지금 저 안에는 그 존재를 잡겠답시고 무시무시한 함정을 설치해 놓았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내가 잡았던 거인족 같은 규격 외의 기사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내가 제법 날뛴다고 해도 그런 곳에 어슬렁 거리고 들어갔다가는 누구 손에 어떻게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다 모험을 하는 것이지, 싸움에 미친 것이 아니다.

리네아 역시 몇 번이나 내게 당부했다.

절대로 저택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되고,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보내지 않겠다고 해서, 리네아의 명예를 걸고 맹세까지 해야 했다.

대신 리네아는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도록 기사들과 준비하기로 했다.

나도 리네아도 내일의 대회의가 과연 열릴 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밤이 깊어지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택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황제 선출을 앞두고 정치적인 타협을 위해 가신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오히려 정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택의 불이 다 꺼져있고 조용했다면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저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새벽 미명이 밝아오도록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오판을 했던 것일까?

약간의 허탈함까지 느끼며 돌아가려고 하던 그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선제후 뱅트손 공작의 저택이 활짝 열리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과 10명의 호위병만 대동하고 온 우리를 조롱이라도 하듯, 백 명이 아니라 그 두 배는 넘는 숫자의 기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비정상적으로 덩치가 큰 자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오르보그 공작령에서 겪은 일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황도의 치안 유지를 맡고 있는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뱅트손은 선제후 노릇을 때려치운 모양이다.

이제 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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