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드래곤도 잡을 수 있는 함정
대회의가 열렸다.
거대하고 장엄한 구조의 대강당은 대회의에 참가한 귀족과 그들의 부하로 가득 찼다.
8명의 선제후 공작들.
변경백을 대리하는 귀족들.
전통있는 대귀족들.
자유 도시령의 대표들.
자치 구역의 대표들.
그리고 대회의를 진행하는 황도의 고위 관리들.
제국의 핵심이자 진정한 권력자들이 황제 선출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전통과 관례에 따르자면,
제일 먼저 황제위에 입후보한 귀족의 이름을 공표한다.
그리고 황제위에 입후보한 귀족은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그다음 8명의 선제후는 자신의 지지가 누구에게 있는지 밝힘으로 새로운 황제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대회의에 참여한 귀족과 대표들이 새로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명료한 순서다.
그러나 10년이나 늦게 열린 황제 선출 의식은 그 간단하고 명료한 순서조차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첫 번째 단계인 황제위에 입후보한 귀족의 이름을 공표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황제위에 누가 입후보할 것인가는 대회의를 열기 전에 대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때는 단일 후보, 어떤 때는 경쟁하는 후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는 선제후들 간에 합의를 마친 후다.
투표는 어디까지나 요식행위인 것이다.
결과를 모르는 투표라니!
제국의 황제를 뽑는 선거에서 그런 불확실한 일이 벌어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 정도면 누가 황제가 될 것인지 대회의에 참가하는 귀족들은 다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 대회의는 달랐다.
물론 황제위에 입후보하는 귀족이 누구인지는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서 모르는 귀족이 없었다.
5살, 2살 짜리 어린애들.
너무 어려서 선제후들간의 합의가 미뤄지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말이다.
선제후의 손자들이라고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성인식을 치러야 비로소 귀족의 일원이 되고, 결혼을 해야 영지를 통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정한다.
그것이 법과 관습으로 통용되는 제국의 상식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선제후들끼리의 기싸움이나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진짜였던 모양이다.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전통과 관례뿐 아니라 제국법과도 얽히는 문제라서 황제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다.
5살, 2살짜리 황제의 권위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 대강당에 있는 누구도 전통이나 관례, 제국법 따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황제 후보가 합의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경악과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자유 도시의 대표로 온 자들은 귀족 절반, 관직을 가진 평민이 절반이었기에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좀 더 노골적이었다.
“설마 진짜 어린애를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2살짜리의 연설이라니! 자기 이름이나 말 할 수 있을까?”
“선제후들이 정말 황제를 선출하기 싫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왜 대회의를 연 것일까?”
“글쎄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말끝을 흐리는 자유 도시의 대표는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벌어지는 이 일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절차다.
자신들의 독립을 억누르던 존재가 진짜 사라졌는지 시험을 하며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제후들은 지금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리를 두드리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의 권위?
선제후들은 황제를 세울 생각 자체가 없다.
5살, 2살짜리 황제 후보자가 그 증거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선제후들을 억누르고 있던 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나와 같다.
물론 지구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가졌던 힘을 보면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구인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지난 생에서는 5년간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곳의 정치 체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의 나는 이 세상을 봉건제가 중심이 되는 중세 사회 정도라고 받아들였고, 선거로 황제를 뽑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귀족들 간의 타협의 산물 정도로 생각했다.
귀족정에서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정도.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하루하루의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서 까마득하게 높은 분들의 사정은 내 알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내가 시야에 넣을 수 있었던 가장 높은 분은 칼마르의 백작 리네아였다.
그리고 지금, 리네아와 동일한 위치에 서서 아래도 보고, 위도 올려보니까 이건 말이 안되는 정치구조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제국의 정치구조는 정치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 출신이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 만들어낸 어설픈 흉내내기였다.
중세에 민주정을 이식하려고 하다니.
그나마 상식은 있어서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선제후 제도로 타협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가 가졌던 지구에 대한 지식은 대단히 편협했던 모양이었다.
지식 배경이 딱 서양식 민주주의가 득세한 곳에서 자란 사람이다.
교육 수준은 학부 졸업 정도?
사회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투표 좋아요 민주주의 좋아요 수준의 이런 엉터리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
억제기였던 그가 사라지자마자 내전이 시작될 판이자 않은가 말이다.
20년이나 버텼다고?
20년이라는 시간은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이다.
더구나 그 중 10년은 아직 황제가 살아있었고.
이제서야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제국은 끝났다.
힘으로 눌러서 이식해 놓은 기형적인 정치체제는 이제 끝장이다.
선제후들은 왕이 되고 싶어한다.
칼마르로 돌아가면 내전 준비부터 시작해야 겠다.
*
내 깨달음과는 상관없이 대회의의 순서는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황도의 대표 행정관이 직접 황제위에 입후보한 두 사람의 이름을 발표했고, 5살과 2살의 꼬마는 귀족들 앞에 나와서 얼굴을 비추고 들어갔다.
연설 같은 것은 없었다.
그나마 5살짜리는 자기 발로 걸어 나왔었지만 2살짜리는 유모의 품에 안겨서 나왔다.
자기 발로 걸을 수도 없는 황제라니.
대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불만이 터지고 말았다.
선제후들 중 가장 약한 축에 들어가는 막시밀리안 공작이 시작부터 대놓고 들이박은 것이다.
“나, 바르거 막시밀리안은 투표하지 않겠다. 미성년자는 통치자가 될 수 없다. 황제 또한 예외는 아니다.”
막시밀리안 공작은 자신의 투표권을 포기하고 들어갔다.
“나, 알핀 리딕슨은 투표하지 않겠다. 전통과 관례에 따르면 입후보자는 제국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연설하지 못하는 자는 황제가 아니다.”
곧이어 리딕슨 공작이 자신의 투표권을 포기하고 들어갔다.
리딕슨 공작은 막시밀리안 공작과 함께 가장 약한 축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받는 선제후다.
투표를 거부하는 선제후가 연달아 나오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지만 그렇게까지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막시밀리안 공작이나 리딕슨 공작에게 동의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황제 후보가 영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만 선제후들 중 둘이나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투표권까지 포기했다는 것이 이곳에 모인 귀족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자명한 일이다.
자유도시 쪽의 귀족들부터 불평하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축에 속하는 귀족들은 대놓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아직 퇴장을 선동하는 귀족이 없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결국 지슬리 공작이 쐐기를 박았다.
“후보자들에게 결격 사유가 너무 많다. 따라서 나는 대회의를 유예할 것을 요구한다. 유예 기간은 내일 정하는 것이 어떤가?”
지슬리 공작의 요구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황제 후보자를 내놓은 두 명의 공작은 내일 모든 것을 결정하자며 일단 대회의를 산회했다.
돌아가는 길에 리네아는 내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덫이군요. 막시밀리안, 리딕슨, 지슬리는 몰이꾼이구요.”
“예. 리네아.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냥꾼은 뱅트손이나 스케티겠지요.”
“선제후들이 정말 그 존재를 두려워하는 모양이에요. 평소에는 그렇게 싸우던 자들이 손을 잡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그 정도로 두렵다는 뜻이겠지요. 지금까지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그가 아직 존재한다면 오늘 밤에 나타나겠지요? 큰 분란없이 황제를 옹립하기에는 오늘 밤이 적절할테니까요.”
“맞습니다. 오늘 밤을 놓친다면 선제후들을 협박하겠답시고 제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존재가 다시 나타난다면 선제후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3백년 전 8명의 선제후를 모두 억누르고 선제후 제도를 세웠다는데 그런 존재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걸까요?”
리네아는 진심으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 선제후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는 했다.
특히, 그들이 사용할 수단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었다.
분명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선제후들이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이 두 손을 놓고 기다릴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덫이라고 할 만한 것을 준비해 놓았을 겁니다. 어떤 대단한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죽일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덫을 준비했겠지요.”
“궁금하네요. 어떤 덫일지.”
“호기심은 목숨을 아홉 개나 가지고 있는 영물조차 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호위 기사들과 함께 숙소에 머물러 주십시오. 리네아.”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나도 위험한 일에는 머리를 들이밀지 않아요.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답니다!”
리네아가 웃음을 섞으며 항의했다.
그러나 나는 웃음으로만 대꾸했다.
리네아와 달리 그 정도의 분별력이 내게 있을지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오늘밤 그 괴물을 잡기 위한 준비는 다 끝났다.
선제후 뱅트손 공작은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반문했다.
과연 그 존재.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그 괴물을 제거할 수 있을까?
그 괴물이 20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갑자기 돌아온다면?
그 괴물에게 반기를 들었던 선제후들에 대한 기록이 눈에 밟혔다.
그들은 다 죽었다.
함께 계획을 세웠던 가신들과 함께.
뱅트손은 반기를 들었던 선제후들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3백년 전의 뱅트손 공작이 남긴 기록을 분석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목격담을 비교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잘하면 죽일 수도 있겠다.
독이 안 통하는 것은 분명했다.
칼이나 창으로 급소를 찌르는 것도 소용없었다.
피부가 갑옷 같아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공성병기로 때려 버리면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발리스타에 맞고 상처를 입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렇다면 끓는 물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쇳물은 어떨까?
쇳물에 빠져도 살아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준비했다.
공성병기급 무력과 쇳물 함정을.
감히 장담하지만 전설 상의 드래곤이라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제 오늘 밤 그 괴물이 온다면 반드시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