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기사가 살아가는 법-92화 (92/248)

92. 혼인 서약

기사와 고위 귀족이 결혼한 가장 최근의 사례가 3백 년 전이라고 한다.

엄청난 혼란기가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리네아 백작과 나의 결혼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일반 영지민들, 심지어 기사나 하급 귀족까지도 열광하는 분위기였지만, 세상 살아본 경험이 좀 있는 사람들은 말을 아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교육을 받지 않은 영지민조차 눈치빠른 자는 본능적으로 이게 꼭 환영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백작의 상대는 그에 준하는 귀족 가문의 사람이 되어야 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백작가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전형적인 혼인동맹이 결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공표된 백작의 약혼자는 일개 기사일 뿐이다.

아무리 내가 명성을 떨쳤다고 해도 아무런 배경이 없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가문 단위로 움직이는 귀족가의 세력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이래서는 칼마르 백작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백작의 약혼자들이 연달아 암살시도를 겪고 실제로 암살 당한 자가 나왔다고 해도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나마 딴지를 걸만한 유력자들은 미리미리 숙청해 버리고, 연달아 영지전을 치르고 난민을 수습하면서 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상황을 만들었기에 그냥저냥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어야 했다.

칼마르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과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화려한 결혼식을 올릴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우리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장 한 달 후면 황도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라니.

백작가, 그것도 상업 도시를 장악한 유서깊은 백작가의 결혼식이다.

반년 전부터 준비해도 충분하지 않다고 할 판인데 한 달은 말도 안 되는 기간이다.

결혼식에 초대할 귀족들에게 전령이 갔다가 오는 시간만 따져도 한 달은 된다.

그래서 백작가의 가신들은 황제가 결정된 후 여유있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대신 혼인 신고를 먼저 하기로 했다.

리네아의 백작위에 대한 조금의 흠도 없도록 하고 겸사겸사 대귀족들의 결혼 동맹 제안도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기사 출신 약혼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약혼을 했음에도 자꾸 지분거리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가 없는 동안 꽤나 귀찮은 일을 겪었다는 모양이다.

심지어 시녀장인 사라 남작 부인이 직접 팔을 꺾어 버린 귀족까지 있었다고 한다.

혼인 신고를 하면 이런 귀찮은 일은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내가 귀찮은 일을 좀 겪을 가능성은 있다.

나만 없으면 리네아는 다시 트로피가 될 테니까.

*

혼인 신고를 위해 나와 리네아, 그리고 백작가의 가신과 유력자들이 모였다.

지금 당장 결혼식을 올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다들 이해는 하고 있지만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은 망설임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만약 리네아의 가까운 친척이 있고, 그가 예법에 고지식한 사람이었다면 결혼식이든 혼인신고든 황제가 결정된 이후에 하라고 호통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관례를 깨고 혼인 신고부터 진행해 버렸다.

평민의 결혼식과 달리 귀족의 결혼식은 하루 종일 걸리는 길고도 화려한 예식이라고 한다.

남에게 꿇리지 않게 결혼식을 치른답시고 1년 수입 전부를 써버리는 귀족도 흔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혼인 신고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차이가 한 가지 있기는 하다.

혼인 신고를 하러 시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시청에서 담당관이 출장을 온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와 리네아는 혼인 신고를 담당하는 관리 앞에서 둘이 부부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에 차례로 이름을 적고 서명까지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증인으로 마스터 요한, 사라 남작 부인, 자문위원회의 대표 린드스톰, 시의회 의장 옌센, 법률 고문인 스렌센이 차례로 서명을 했다.

“결혼식은 반드시 제대로 치러야 합니다. 백작가의 체면이 있지, 무슨 약탈혼도 아니고 이렇게 얼렁뚱땅 혼인 신고부터 하다니.”

“이미 합의된 일에 토를 달지 마세요. 나도 못마땅하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

“그만 좀 해요! 사형.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마스터 요한이 뒤에서 툴툴거렸지만, 시녀장인 사라 남작부인의 일격에 쭈그러들었다.

그제서야 린드스톰이 조곤조곤 혼인 서약에 따르는 권리를 설명해 주었다.

“혼인 신고를 하셨으니 윌리엄 공께서는 리네아 백작님의 권한과 동일한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칼마르는 두 분의 통치자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두 분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는 리네아 백작님의 의견이 우선시 됩니다. 그것은 윌리엄 공의 권한은 ‘아내의 권리’에 근거한 통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이다.

통치의 근거가 핏줄에 있고, 유일한 계승자가 리네아 백작이니 그녀의 권력이 우위에 있는 것이 합리적이다.

오히려 나에게 거의 공동 통치자에 가까운 권력을 준다는 것이 놀랍다.

“이혼한 경우 윌리엄 공은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별로 윌리엄 공만 남게 될 때는, 만약 후계자가 성년인 경우는 후계자가 백작위를 계승하고, 미성년이라면 성년이 될 때까지 윌리엄 공이 섭정으로 통치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정당한 후계자를 옹립할 때까지 윌리엄 공이 섭정으로 통치해야 합니다.”

“정당한 후계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칙적으로는 가까운 친척 중에 계승 순위를 따져서 옹립합니다. 그러나 칼마르의 경우는 리네아 백작님 말고는 계승 순위를 따질 정도로 가까운 친척이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정당한 후계자가 옹립될 지는 그 때 가서 의논해야 할 겁니다.”

이거 후계자가 없이 리네아가 죽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안간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피를 아주 많이 볼 것 같다는 점 뿐.

외부와 손잡고 있는 유력자들부터 싹 다 쳐낸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윌리엄 공. 우리는 후계자가 필요해. 공자가 되었든 공녀가 되었든 많을 수록 좋으니까 젊은이답게 노력을 하라고!”

마스터 요한은 내 어깨를 치며 내게 후계자를 강요했다.

이런 식의 중년 내지는 장년 아저씨의 감성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리네아까지 있는 곳에서 이러면······

“사형은 아까부터 왜 그렇게 미운 짓을 하는 겁니까? 혼인 신고의 증인으로 들어왔으니 혼인 신고가 끝났으면 어서 가서 할 일이나 하지 왜 자꾸 옆에서 끼어들어서 헛소리를 합니까? 어서 가요.”

역시나 사라 남작 부인이 마스터 요한을 타박해서 쫓아내 버렸다.

다른 증인들도 엉거주춤 눈치를 보다가 사라 남작 부인의 눈짓에 우르르 퇴장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와서 경고했다.

“윌리엄 공. 마스터 요한 경의 농담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확실히 말씀드리는데 아직 합방은 안 됩니다. 결혼식 이후에나 가능하니까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법도 공부했습니다.”

시녀장인 사라 남작 부인은 내가 뭐라고 말해도 믿기 어렵다는 눈빛을 하고 있다가 자리를 비켜줬다.

내가 귀환한 후 처음으로 리네아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알게 된 비밀을 리네아와 공유할 수 있었다.

리네아는 내 말이 끝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리네아. 어쩌면 그는 미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든 망상 속에서 살면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그가 건넸다는 펜던트를 황궁 도서관에 가져가 보면 알겠군요. 미친 자가 아니라면 그곳의 사서들이 반응하겠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펜던트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목걸이로 만들어서 걸고 있던 펜던트를 리네아에게 건냈다.

그녀는 천천히 펜던트를 쓸어보며 감상했다.

“보통 장신구는 아니네요. 세공도 그렇고 합금재질도 그렇고 같은 무게의 금을 준다고 해도 비싼 가격은 아닐 것 같습니다. 황궁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습니다.”

이불을 수십겹으로 깔고 누운 공주가 가장 아래에 있는 콩알 때문에 불편해서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만큼 살아온 환경이 중요하다.

리네아는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백작가의 후계자로 살아왔을테니 명품은 일상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평가가 전문가의 평가보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갑자기 리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펜던트를 양손 사이에 놓은 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역시!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펜던트는 둘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열쇠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숫자가 음각된 금으로 된 열쇠였다.

“아무래도 황궁 도서관에는 꼭 가봐야겠습니다.”

내 말에 리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

황도로 떠나는 길에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제국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에는 초청된 귀족과 그를 호위하는 10명의 병력만이 황도에 들어갈 수 있다.

10명?

모조리 기사로 채워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다.

그 정도의 숫자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과거에는 10명의 호위병력만으로도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암중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이 시국에 10명의 호위병력이라고?

스스로 인질이 되고 싶다고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참할 수는 없다.

선제후들의 타협으로 황제가 선출이 된다면 불참한 귀족은 좋은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갓 선출된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에 좋은 먹잇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사를 중심으로 한 백인대를 꾸려서 황도로 가기로 했다. 더 많은 숫자는 주목도만 높일 뿐이다.

대신 만약을 대비해서 탈출로를 선정하고 그곳에는 용병을 중간중간 배치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안 생긴다면 다행인 것이고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다면 배치된 용병과 함께 탈출로를 달리면 된다.

일단 탈출로를 달리면 중간중간 용병이 증원되는 셈이 되니까 숫자에 눌려서 어이없게 포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8명의 선제후가 모두 황도에 모이니까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모양새가 될테니 함부로 날뛰는 자가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 같은 귀족도 백인대를 하나 데리고 황도 근처에까지 가고 심지어 용병까지 대기시키는데 선제후는 어떨까 싶어서다.

물론 선제후가 황도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호위는 100명뿐이지만 황도 주변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배치할지는 감이 안 잡힌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최악으로 일이 돌아 간다면 수만명이 엉켜서 싸우는 대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내 걱정과는 별개로 우리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적당한 때에 황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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